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3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33화(229/300)
233화 천 클래스 (2)
들어선 천 클래스는 학기 초 특유의 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어색하면서도 설렘이 뭉근하게 섞인 그런 분위기 말이다.
그래서인지 일단 기본적으로 적막이었다. 클래스 구성원들–레온 반 라인하르트, 아벨 폰 니벨룽, 레이첼 드 뮈라, 사키 료조, 스피드 웨폰, 클로이 아디토레, 혼테일-로 개성 넘치는 애들을 묶어 놓았으니.
첫날부터 정답게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그림은 기대도 안 했다.
‘그리고 애초에 이 클래스 개설 목적은 소란 통인 다른 클래스들과 괴리하는 거였으니까.’
이 숨 막힐 듯한 침묵은 어쨌건 나와 학원장님이 의도한 바이긴 했다. 그렇기는 한데…….
나는 왼손을 올려 인사를 하려 했다. 근데 녀석들, 정확히는 과반을 차지하는 여자애들은 입술만 오물거린다. 그러다가 홱 고개를 틀어 버린다.
나는 올렸던 손을 슬쩍 내려 턱을 긁적였다. 뻘쭘하다, 뻘쭘해.
그래도 개중에서 나를 보고 웃어 주는 건, 혼테일과 클로이. 근데 얘네도 눈치를 보는지 눈빛으로만 인사를 보냈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클래스에서 몇 없는 남성인 스피드 웨폰이 보인다. 그가 내게 눈으로 말했다. ‘숨 막혀. 질식사할 것 같아.’ 나도 눈으로 그에 동의했다.
‘첫날 분위기부터 왜 이런지 이따가 물어봐야겠네.’
제1 목적이 용사 육성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천 클래스는 아카데미 일부다. 2차 인마대전이라는 암운이 예정되었을지언정, 나는 얘네들이 학창 생활을 즐겨 줬으면 한다.
-사람을 만나고 유대를 쌓는 법. 그건 동갑내기 친구들과 섞여야지만 배울 수 있는 거야.
첫 스승님이 전생에 내게 했던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여기 있는 모두한테 적용된다. 비록 몇 년 후, 이들이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울 운명일지라도. 그전까진 청춘을 구가할 권리가 있는 생도들이기에.
성장과 더불어 이들 간에 우정도 돈독해졌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볼 장 다 본 나 같은 애어른과는 다른 진짜 십 대니까.’
나는 슬슬 걸음을 옮기면서 클래스 안을 둘러보았다. 남아 있는 자리가…….
‘왜 가운데 자리만 남아 있는 거야?’
저기 너무 주인공 자리잖아. 클래스의 중심인 건 그렇다 쳐도, 사위가 여생도들이다. 흡사 공작새가 꼬리를 펼친 것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여튼, 누가 봐도 용사 레온의 자리인 건 확실한데. 정작 레온은 클래스의 중심에서 떨어진 구석에 앉아 있었다.
‘레온 저거, 일부러 날 위해 비켜 준 거 같은데?’
그딴 배려 필요 없어, 인마. 어이없어하기를 잠시.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털썩.
뒤통수가 따끔따끔하다. 애써 외면 중이지만 일견 여생도 전원이 나를 쳐다보고 있음은 확실한 듯하다. 가시방석이란 관용어를 피부로 느꼈다.
다만 선택지가 여기 말고는 없었다. 좌석을 인원수대로 딱 맞춰서였다. 어차피 정원이야 이대로 쭉 갈 거고, 서로 가까이 있어야 대화도 많이 하고 할 테니. 근데 독이 돼서 돌아올 줄이야.
나는 불편함을 느끼며 상체를 앞으로 뺐다. 그리고 칠판 쪽 벽면 상단 중앙에 걸린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아홉 시 오 분 전. 여기서 교실 문이 힘차게 열렸다.
또각, 또각.
가지런한 리듬의 구둣발 소리. 생도들의 형형색색 홍채가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숨 막힐 듯한 적막이 일소했다. 그럴 만했다.
‘미친.’
누가 올지 빤히 알고 있던 나조차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으니. 료조와 웨폰도 마찬가지였다.
싱그러운 연녹색 머리칼. 민트색 눈동자.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아는 그녀의 특징이다. 그러나.
보폭을 시원시원하게 가져간 그녀가 곧 교단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입매를 기분 좋게 늘였다.
“좋은 아침!”
원래라면 그녀의 가슴께까지 올라왔을 교단은, 그 높이가 배꼽까지밖에 못 미쳤다.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나는 앞으로 천 클래스를 담당하게 된 담당 교수, 메아인 포이즌이야.”
얼마 전까진 산하나란 가명으로 우리와 함께했던 선배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 새끼들.”
…소녀에서 어른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 * *
같은 시각, 학원장실.
메디아가 응접용 테이블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배회했다. 엄지손톱을 연신 물어뜯었다.
“언니, 이거 뭐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초조함이 역력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때맞춰 내선 전화가 신경질적으로 울렸다. 메디아는 헐레벌떡 수화기에 대고 사죄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혹시 메아인 포이즌이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그런 사람이 제 쌍둥이 언니라서 죄송합니다.”
-날세.
목소리의 주인은 검제였다. 그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전화선이 일순간에 포물선을 그리며 늘어졌다. 뻣뻣하게 경직됐던 메디아의 어깨 근육도 조금 풀렸다.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곧 툴툴거렸다.
“아오, 깜짝아. 심장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죽는다는 말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모르나? 우리 나이를 생각하게. 벌써 일흔이야. 그런 부정 타는 발언을 쉬이 입에 담으면 진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검제의 꾸지람에 메디아는 이맛살을 구겼다. 그녀가 짜증을 담아 내뱉었다.
“나는 너보다 몇 곱절은 더 살아서 상관없거든?”
-고대인이라고 지금 현대인을 기만하는 건가?!
“응, 기만하는 거 맞아. 억울하면 너도 고대인으로 태어나든지.”
-…….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어. 오늘은 숨만 쉬어도 머리가 지끈거리니까.”
-뉴스 봤네. 만력님께서 호아킨 아카데미에 복귀하셨다지.
“복귀가 아냐. 생도 신분으로 올해 초부터 몰래 숨어 있었더라.”
검제가 너털너털 웃었다. 메디아는 전화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몸 숨기기에 아카데미만 한 곳이 없잖아. 보안이나 이것저것 세계 최고 수준이니까. 또 그걸 잘 아는 사람이 내 언니잖아.”
-종잡을 수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시군. 어쩐지 협회를 통해서 행방을 찾으려 했는데 당최 찾을 수 없더니만, 설마 아카데미에 계실 줄이야. 그럼 짐짓 이해되는군.
강검마가 하와이섬을 떠난 뒤, 검제는 만력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의 취지 또한 강검마와 같았다. 만력이 아카데미에 머물며 생도들을 지켜 줬으면 해서였다.
그런 만력이 제 발로 아카데미에 들어가 있었다. 검제의 목적과도 수렴해 안심되기도 했지만, 마냥 마음이 편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만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금의 형국이 심상치 않다는 걸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게헤나 게이트의 이변, 뜬금포로 출현한 만력 메아인 포이즌. 징조가 태엽처럼 맞물려 간다.
검제는 아른거리는 불길한 상상을 지웠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기자들이 물밀듯 닥쳤을 텐데. 아카데미는 어떤가.
“어떻긴 뭐가 어때, 난리지 아주. 그래도 협회 직원들이 입구마다 버티면서 기자들 상대해 주고 있어. 덕분에 생도들한텐 피해는 안 가고 있고.”
-협회가 확실히 그런 쪽으로 일을 잘하긴 하지.
“대신 학부모 측에서 난리야. 자기들 몰래 천 클래스 개설했다고. 그건 무슨 클래스냐, 차별이다, 뭐다 하면서.”
검제가 콧방귀를 꼈다.
-웃기는군. 여태껏 저희는 신분 하나 믿고 차별을 해 왔으면서, 옳게 된 차등을 차별로 치부하다니.
“하여간에 나 너무 피곤하다… 진짜. 밖에선 기자들이 난리고, 안에서는 학부모들 항의 전화에. 그뿐만이야? 언니가 혹여 사고 치지 않을까 노심초사에. 분마다 수명이 일 년씩 깎이는 기분이야. 아, 그래도 틀딱 너보단 오래 살겠지만.”
-…조크가 악취미군.
검제가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만력님도 자네처럼 포이즌 가의 고유 가호를 발현하셨겠지?
“응. 본모습대로 등장하면 포이즌가가 고대인의 후손이란 게 만천하에 까발려지잖아. 뭐, 근데 도긴개긴이긴 해. 어차피 몇 년 후의 미래 모습이니까. 아, 그때는 틀딱 너는 없는 미래일 수도 있겠다!”
-메디아! 너- 어는 진짜!
메디아가 악동스레 킥킥거렸다. 검제와 떠들다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서 만나 평생을 함께한 친구였다.
“근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나네… 그때 우리 가르쳤던 게 생각해 보니 우리 언니였-”
메디아는 순간 오금이 저렸다. 녹색 동공이 마구 떨렸다. 눈으로 과거를 더듬던 그녀가 이내 입을 떼었다.
“…틀딱, 우리 언니한테 받았던 수업 기억나?”
-잊을 수가 있겠나… 그걸…….
검제가 잇소리를 냈다. 그는 치를 떨고 있었다.
-솔직히 그걸 수업이라고 말해도 될 는지부터가 의문이지. 방식이 원체 과격하니 말이야.
“염병, 까먹고 있었어! 지금 가서라도 말려야 해! 그러다 우리 애들, 틀딱 너나 창성처럼 인성 파탄자로 전락해 버릴지도 몰라!”
-자네는? 왜 자네는 빼놓고 말하지?
메디아는 그 말을 무시했다. 검제는 피곤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야단법석 그만 피우고 진정하게. 말은 그렇게 해도, 자네도 인정하지 않나. 메아인 님이 기인이긴 하셔도 그 생도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내신다는 덴 이견이 없지. 그분은 천부의 교육자시네.
“그, 그건… 그렇지. 까놓고 말해서 칠성 전부를 속성으로 강하게 만들어 준 게 언니의 특훈 덕이긴 했지만… 그래도…….”
-생도를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아네만, 그들에게 필요한 수업일세.
검제가 침음했다. 숨소리에 근심이 한가득했다. 막상 손녀가 겪을 거라고 생각하니 새삼 막막했다.
-뭐… 조금, 아니 많이 가학적이긴 하다만…….
* * *
강의실의 면면을 훑은 만력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다들 유명한 얼굴들이고, 서로 아는 사이일 테니 자기소개는 넘길게. 나도 딱히 이름 말고는 소개할 게 없는 사람이니까 패스! 참고로 첫사랑 같은 거 물어봐도 없으니까 대답 못 해! 그러니까 바로 수업에 들어가자.”
만력은 몸을 돌렸다. 분필을 집어 판서를 써 내렸다. 모두의 시선이 새하얀 뒷덜미에 닿았다.
“전투, 격전, 박투, 상잔. 여러 단어가 있지만 결국 싸움이란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
“훈련과 단련입니다.”
대답은 웨폰이 했다.
“끊임없는 훈련과 수양으로 기초 능력을 상승시켜야 합니다.”
“이유는?”
“건강한 정신과 신체와 맞물려야 가호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은 필기보다도 근력 운동과 실전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역시, 웨폰.”
웨폰은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 덕분에 만력의 강의는 흐름을 탔다.
“맞아. 우리 인간이 마법을 다루는 마족과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저력. 그건 웨폰 생도가 말했듯 ‘훈련’에 있어. 마족은 본디 강하게 태어나 발전이 더디지만, 인간은 태생이 나약하여 계속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거든.”
고저가 확실한 어조는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생도들의 눈길을 칠판으로 응집했다.
“대신 인간은 자원 소비 없이 단련을 통해서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 다만 고통이 수반되지. 근육도 찢어지고 아물면서 더 튼튼하게 굳잖아? 정신력도 마찬가지야. 깎아 내면 깎아 낼수록 마모되는 것 같지만, 견고해지지. 더한 정신적 충격일수록 그 효과는 뛰어나고. 충격요법이라 부르는 그거야.”
생도들은 허리를 반듯이 세웠다. 필기마저 잊고 귀를 기울였다.
“근력 증대는 아카데미가 아닌 개인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야. 그건 각자 알아서 하는 걸로 하자. 어린애들도 아니고, 옆에서 운동하라고 보채는 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우리 천 클래스의 커리큘럼은 정신력을 높이는 걸 장려할 거야.”
팔짱 끼고 있던 레온이 질문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칠판을 긁던 분필이 정지했다. 분필 끝에서 하얀 송진 가루가 스러졌다.
만력이 비스듬히 뒤돌며 레온과 눈을 마주쳤다. 민트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정신력 키우는 데 직빵이 뭔지 알아?”
메아인은 대문짝만하게 한 글자 새겼다.
『死』
“익숙해지는 거야.”
탁!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공간이 강의실 천장, 벽, 바닥. 빈틈없이 촘촘히 보랏빛 막을 입혔다.
“앞으로 매일 아공간에서 스무 번씩 죽으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자. 생도 별 맞춤 학습은 그다음.”
생도들의 눈빛이 멍해졌다. 만력이 분필을 내려놓았다.
“뭐해 다들? 책상, 의자 옆으로 안 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