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3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37화(233/300)
237화 첫눈 (1)
첫날부터 삐걱거린다 싶었던 천 클래스.
실질적인 창립자로서 내심 앞날이 걱정됐었다.
행여 정사에 반하는 괜한 짓을 한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감도 들었다. 여하간에 천 클래스는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클래스였으니.
이 세계의 밑그림이 ‘기적의 가호 M’이니 게임으로 비유를 들자면.
‘시스템 오류 및 버그.’
웬 배경 인물 A였을 놈이 칠성 영웅이 된 것도 모자라 클래스까지 창설해 버렸다. 그러니 뭔가 꼬여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이는 물론 각오한 바이긴 했지만.
‘각오랑 현실을 받아들이는 거는 다르잖아.’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위에서 구구절절 떠들었던 이 모든 걱정이 기우였다는 걸.
클래스 원들은 만력의 수업 방향성에 군말 없이 따랐다. 어제, 오늘, 내일, 모레, 글피. 매일매일 스무 번씩 죽어 나갔다.
죽는 방식도 가지각색. 그들의 인권 보호와 더불어 혹자의 정신 건강을 위해 자세한 서술은 삼간다.
아무튼.
이런 가혹한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게워 내도, 코피를 흘리며 졸도해도, 낯빛이 거무죽죽해져도. 그들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코어 힘이 빠져서 새우처럼 구부러진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탈력감에 저며진 몸과 정신을 어떻게든 되살려 냈다.
말초적인 공포, 죽음에 대한 면역을 기르고자.
‘왜 이렇게까지.’
얘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이 뭘까. 이렇다 할 물질적 보상도 없는데도 말이다. 싫은 소리 하나 안 내니 외려 불안했다.
미쳐 버릴 것 같다고 말하면 기꺼이 하나 선배한테 건의했을 거다. 수업의 강도를 조금 낮춰 달라고, 이건 학대에 가깝지 않냐고.
나만 보고 클래스에 들어온 녀석들이니 그 정도는, 아니 그 이상도 얘기할 수 있다. 절궁에게서 지원도 약속받은 마당 아닌가.
한데 녀석들은 조용했다. 낯빛이 시체가 될지언정 투정조차 부리지 않는다.
‘아무리 호아킨 아카데미의 생도라지만, 그중에서도 엄선된 생도들이라지만.’
암만 그래도 얘네는 아직 미성년에 지나지 않는다.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도 괜찮은 나이다. 그렇다고 누가 꾸중하지도 않는다.
그건 십 대가 누릴 수 있는 마땅한 권리다. 적어도 첫 스승님은 그렇게 강론했다.
-애는 애다워도 괜찮다. 오히려 철든 척하는 것보다 힘들면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게 훨 나아. 괜히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묵혀 뒀다간 속에서 곪는단 소리다.
‘스승님, 근데 당신 세계의 십 대는 왜 이런 겁니까?’
그래서 천 클래스가 개설된 지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웨폰한테 물었다.
그에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솔직히 힘들지. 죽는다는 거 여전히 적응도 안 돼. 눈앞이 캄캄해지면 불안하다니까. 나, 이대로 정말 죽는 거 아닌가. 눈떠 보니 현실이 아닌 사후 세계면 어쩌나. 근데도 다들 버티는 이유? 글쎄… 요 며칠 너무 정신없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굳이 따지면 ‘욕심’ 아닐까. 더 강해지고 깊다는 열망에 가까운 욕심. 그게 저 녀석들이 어금니 꽉 깨물고 버티는 이유일 거야. 적어도 난 그렇거든.”
당시 난 얼을 탔다. 그 말이 조마조마했던 내 마음을 다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것도 반년 전까진 머메이드 앞에서 부르르 몸을 떨기 바빴던 웨폰이.
‘녀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이 나이 돼서 나보다 훨씬 어린애한테 강고함을 다시 배운다. 뒤늦게 회환이 들었다.
“은연중에 난 애들을 십 대라고 무시하고 있었네.”
아무래도 난 어느덧 내가 소싯적 혐오하던 부류- 꼰대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 * *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노랗고 붉었던 가을의 색감이 바랜 지도 어언 한 달. 잿빛 구름이 찌뿌둥한 하늘을 유영하는 날씨의 반복이었다. 그에 맞춰 생도들의 옷감은 나날이 두꺼워졌다.
휘이잉.
냉한 공기가 간담을 훑었다. 바야흐로 초겨울. 바람은 차디찼다.
“으… 으.”
나는 목도리 안으로 입을 파묻었다. 겉옷 단추를 단디 여미고서 두 손을 파리처럼 비볐다.
“뭐 이렇게 춥냐.”
거울이 없어 안 보이지만 내 입술은 아마 푸르죽죽할 거다. 다만 손과 귀, 코끝. 혈관이 모이는 말초 부위는 피가 쏠려서 불그스름했다.
이 세계의 겨울은 유독 추운 감이 있었다. 기숙사를 나서기 전, 확인해 보니 가볍게 영하 10도 그 아래였다. 지금이 12월인 걸 감안해도 엄동설한이었다.
‘초겨울이 이러면 한겨울은 얼마나 추운 거야?’
추위 속에서 툴툴거리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가는 곳은 학원장실. 천 클래스 개설 이래 나는 학원장님과 주마다 회의를 갖는다.
‘말이 회의지 과외에 가깝지만.’
메디아와 만나면 보통 향방을 논했다. 비단 천 클래스만 아니라, 국제 정세, 마족의 동향 등등. 교실에서 가르칠 일 없는 주제들을 다뤘다.
덕분에 야트막했던 시야가 날이 갈수록 트여 감을 체감한다. 물론 공무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지만, 차피 메디아도 사정은 같았다. 그녀도 일에 치이면서 애써서 시간을 쪼개는 것이기에.
나 혼자 시간 없다고 불평하는 건 몰양심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부쩍 추운 오늘, 가기가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당히 멀면 말을 안 해요.”
호아킨 아카데미는 넓다. 많이 넓다. 더럽게 넓다. 찬 바람이 쌩쌩 부니 새삼 다시 느낀다.
거기다 발에 치이는 삭은 낙엽들이 싸늘함을 더했다. 차라리 눈이라도 있으면 뽀독뽀독 밟는 맛이라도 있지.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보았다. 쥐색 하늘은 여상스럽고 구름의 이동은 굼뜨다. 눈이 올 것 같진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서 도로 고개를 내린 순간이었다. 시야 귀퉁이에 색이 어렸다. 하늘색. 겨울 날씨에 잊힌 색상이 낭창낭창 흔들린다.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불렀다.
“료조.”
료조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는데 머리색과 퍽 잘 어울렸다.
료조는 뚱한 눈길로 말했다.
“웬일이래, 주말인데 밖을 다 나오고.”
쌀쌀맞은 음색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학원장실에 가는 길이야. 주말마다 학원장님이랑 독대가 있거든.”
“그렇구나. 추운데 고생이 많네.”
“뭐, 그치.”
건조하게 오가는 대화. 사실 천 클래스가 개설된 뒤로 료조와 살짝 서먹해졌다. 딱히 별 이유가 있다기보단 아무래도 마주칠 일이 적어져서였다. 나도 이것저것 할 게 많거니와, 료조도 그녀 나름대로 바빠 보였다. 하긴 매일 아공간에서 스무 번씩 죽으랴, 공부도 하랴. 비단 나만 시간 부족에 허덕이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어색한데.’
료조는 천 클래스의 전신인 여행 동아리의 창립 멤버다. 비록 좀 소원해졌어도 그녀는 내게 각별한 친구다.
‘어차피 학원장님이랑 약속 시간까지 좀 남았으니까.’
아무 이야기나 해 보기로 했다.
“료조, 너도 주말엔 밖에 잘 안 나오잖아.”
그녀는 지긋하게 내 눈을 바라보았다. 묘한 눈빛이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그렇지만 미지근하진 않은 그런 눈동자.
“나…….”
잠시간의 침묵 끝에 료조가 입을 열었다. 그 과정이 조금은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끝내 말을 맺었다.
“…엄마 보러 가.”
내가 눈을 껌뻑였다. 마주하는 료조 시점에선 내 표정이 봐줄 만했을 거다. 그녀도 동의하는지 피식 미소를 띠었다.
“물어봐 놓고 그런 맹한 얼굴 하는 거, 너무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거 아니야?”
나는 당황했다.
“어, 그게… 뭐야… 잘, 됐네.”
“풉.”
짧은 웃음. 료조의 샐쭉한 입술을 비집고 입김이 흐트러졌다.
“검마, 너 처음 봤을 때랑 지금이랑 이미지 진짜 많이 변한 거 알지? 초면에 면박 좀 줬다고, 과녁에 사시미 던지고 그랬잖아.”
“…….”
그땐 한창 동화율 치닫던 탓에 한창 인간성이 마모되던 시기였다. 이를테면 ‘검신의 가호’의 적응기 또는 사춘기였다.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 ‘인간의 격’의 상승으로 많이 나아진 게 지금이다.
‘지금 생각하니 나도 어마어마한 미친 새끼였군.’
민망함에 엄지로 눈썹 어림을 긁적였다. 놓칠세라, 료조는 짓궂게 말했다.
“그땐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니까? 근데 지금은 표현이 엄청나게 풍부해졌어.”
료조는 빙글 몸을 돌려 나와 나란히 섰다. 하늘색 머리칼 사이로 옆얼굴이 간헐적으로 보였다.
“사실 어제 사키 히나한테 문자가 왔어. 엄마의 현 소재지 링크더라.”
“…….”
“솔직히 기대 1도 안 했거든, 그때 한 약속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핑계라고 생각해서. 뭔 바람이 불었는진 몰라도, 히나 걔도 진짜 예상 밖이야.”
료조의 말에서 난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는 의심이 많다. 돌다리도 몇 번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성격이다. 하지만 지금의 료조는.
‘확신하고 있어.’
사키 히나가 보내 준 주소를, 제 친모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내가 잘 아는 료조의 모습과는 괴리가 있었다.
그새 성격이 변했을 가능성도 적다. 그랬다면 오늘 만나자마자 내가 눈치챘겠지.
‘거진 일 년을 같이 했는데.’
그럼. 어째서 료조는 단정 짓는가. 간단한 이유다. 그야…….
료조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눈치챘어?”
“…….”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론 가장 좋은 대답이 되곤 한다.
료조는 다시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내게 짓고 있는 표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맞아, 엄마 주소 진작 알고 있었어. 내가 빅스빅을 만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엄마 주소 찾는 거였거든. 그리고 빅스빅이 너무나 성능이 좋은 나머지 바로 찾아내더라고.”
오래된 치부를 들춰 내서일까. 료조는 호흡과 맥박이 불규칙했다.
“그렇게 주소를 찾아내고 나서, 뭘 해야 할지 몰랐었어. 그야 그렇잖아, 대뜸 엄마를 찾아가서 ‘당신의 딸이 왔어요.’ 할 수도 없으니까.”
어렸던 료조는 두려웠을 것이다. 막상 찾아간 엄마가 자신을 만나길 원치 않을지, 박대하진 않을지. 어쩌면 새로이 가정을 꾸렸을 수도 있으니.
“어디 사는지 알면 뭐 해. 당사자의 의사도 모르고, 안다 해도 원하지 않으면 민폐일 뿐이고. 그래서 알아도 모른 척 지냈어. 근데…….”
바람이 일순 멎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가 또렷해진 건 동시였다.
“…사키 히나가 알아냈다는 건 아마 상대 쪽, 그러니까 엄마가 내게 주소를 알려 줘도 괜찮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걸 거야. 응, 맞아. 그럴 거야.”
료조는 두 손을 주먹 쥐었다.
“히나, 걔가 알았다는 건 절궁에게서 알아냈다는 소리일 거고. 당연히 엄마한테 물어봤을 거거든, 주소 알려 줘도 되냐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내뱉는 말들은 어쩌면 그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지 모른다.
“거기에 동의했으니까. 히나가 나한테 주소 링크를 보냈을 거야.”
사키 히나가 엄마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나, 그 일말의 가능성을 그저 지우고 싶었다. 머리론 알고 있어도 가슴에서 거부했다.
빈약한 명분을 보강할 합리화일지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는 결심했다. 엄마에게 찾아가자고. 용기를 짜냈다.
‘그렇지만…….’
막상 쉽사리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겨울 한복판에서 아카데미를 서성이고 있던 것도 망설임 때문이었다.
그때 강검마가 나타났다. 착잡한 가운데 그 얼굴을 보니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한데 이 또한 발이 바닥에 붙은 양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달 만에 가까이서 보는 얼굴. 정말 보고 싶었던 그리웠던 얼굴이니까.
창피한 모습을 보일 걸 빤히 알고서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 버렸다.
그 결과가 이거였다. 과거의 치부와 자기 합리화나 중얼대고 있었다.
수치심에 안쪽 볼을 잘근잘근 씹어 대서 피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그때였다.
“료조.”
나지막한 부름에 료조는 시선을 들었다.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을 녹이는 미소로 그가 말했다.
“같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