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3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39화(235/300)
239화 첫눈 (3)
문을 연 건 여인이었다. 어른스러운 분위기로 어림하건대 삼십 중후반의 나이대. 하나 액면가는 훨씬 젊었다. 길거리에서 봤으면 이십 대로 착각할 만큼.
‘이 사람이…….’
척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너무나도 많이 료조와 닮아 있었으니까. 료조의 어머니. 그녀는 머리나 홍채색만 좀 다를 뿐, 당신의 딸과 판박이였다.
묘한 기류가 아파트 복도에 맴돌았다. 스산한 바람도 어색함을 더했다.
여인의 시선은 내게로 먼저 꽂혔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있으니 눈길이 절로 갔을 터. 시선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동하기 마련이다.
“누구세요……?”
후드티를 입었기에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길을 료조 쪽으로 돌렸다. 이제야 여인의 동공이 두 배가량 커졌다. 더듬더듬 여인의 입술이 열렸다.
“료, 조?”
료조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호랑이를 마주친 강아지처럼 눈을 들 엄두를 못 냈다.
“…저, 그게.”
질끈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 우리 딸…….”
여인이, 료조의 어머니가 당신의 딸을 껴안았다. 예상치 못했는지, 료조는 완전히 넋이 나간 눈이 되었다. 하늘색 눈동자에 스친 건 놀람과 당황 그 이상이었다. 다만 긍정적인 감정이었다.
“저, 저, 저기.”
갈 곳을 잃은 료조의 두 손은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녀는 허둥지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빛으로 요청하는 도움!
나는 생긋 웃으며 도움 요청을 부러 피했다. 더해서 몇 걸음 성큼 뒤로 물러났다. 지금 이 순간, 어느 아파트 복도에서 이뤄진 모녀 상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 *
한편, 호아킨 아카데미 부속 병원.
사키 히나는 약 봉투를 한 꾸러미 품은 채 복도를 걸었다. 아버지, 절궁의 퇴원 절차를 마치고 주치의에게 약을 탄 뒤 복귀하는 것이었다.
“흐흐흥~”
약 봉투 때문에 두 팔은 묵직했으나 사키 히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오늘로 드디어! 간호인 해방이다, 오예!’
한 달을 꼬박 절궁의 병시중을 든 히나였다. 초반엔 효심이었지만, 나중에 가선 의무감으로 그 곁을 지켰다. 그 의무감마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졌다. 정확히는 강검마가 병문안(?)한 직후부터.
사키 히나에게 있어 삶은 절궁가(家)가 전부였다. 그녀의 주변인도 절궁가 내지 일본 행정부 쪽 사람들뿐. 호아킨 아카데미일 적 동기들도 있긴 했어도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근래 사키 히나는 삶이 다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분함으로 점철된 인생에서 뜻깊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천검님.’
사키 히나의 입에서 배시시 미소가 피었다. 약 봉투 사이로 보이는 뺨으로 옅은 홍조가 번졌다. 스물을 훌쩍 넘은 규수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검마가 다녀간 뒤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은연중에 챙겨 주기까지 했다.
‘물론 일반적인 배려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예전의 아버지였다면 상상하기 힘든 변화였다. 변한 건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도 전과는 달라졌다.
사키 히나는 인간의 감정을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여겼다. ‘유혹의 가호’를 발현하면 사내들은 기꺼이 종복이 되곤 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유혹의 가호 같은 거 쓰지 않아도 돼.’
불현듯이.
‘당신은 원래 미인이니까.’
천검님께서 했던 말씀이 파편화를 거쳐.
‘그런 거 없이도 아름다워, 충분히.’
왜곡되어 뇌리를 맴돌았다.
“아, 진짜. 나 이런 사람 아닌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히나는 헤벌쭉 입꼬리가 승천했다.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힐끗 그녀를 곁눈질하더니 소곤거렸다.
“저 사람, 절궁의 딸 아니야? 표정이 왜 저런대? 정신과에 연락 넣어 봐야 할 것 같은데.”
“한 달쯤 전에 천검님이 절궁님이 입원 중인 병실을 습격하셨잖아. 그때 이후로 맛이 갔대.”
“딱하기는 한데, 솔직히 난 천검님이 하신 행동이 맞는다고 봐.”
“왜, 무슨 일 있었어?”
“너 알지? 나 절궁님 병실 담당 간호사인 거. 절궁님, 겉보기엔 점잖은 데 완전히 벌레 보듯 보는 눈빛이었거든.”
“역시 윗분들이란……. 천검님은 우리 볼 때마다 꼬박꼬박 고개 숙여 인사해 주시는데.”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 분이 진정한 칠성이시지, 암암.”
따각, 따각.
간호사들의 쑥덕임은 경쾌한 나막신 소리에 묻혔다. 행여 들었어도 히나는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일본 귀국하기 전에 천검님 얼굴 한 번 더 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기분 좋게 걸음 하던 히나가 돌연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는 우중충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걔는 잘 찾아갔으려나…….”
사키 히나는 료조의 어머니, 그러니까 막내 새엄마의 주소를 딱 어제 찾아냈다. 얼마나 꼭꼭 숨었는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병 수발도 해야 했기에 죽을 맛이었다.
그렇다고 상태가 좋지 않은 아버지께 물을 수도 없었다. 해서 히나 자신이 직접 발품을 팔아 수소문하였고.
마침내, 어제 상세 주소를 료조한테 전송했다. 답장은 한참이 없다가 느지막한 새벽에 왔다.
[ㄱㅅ.]아무래도 료조는 한국 정서에 많이 젖어 든 모양이었다.
짐짓 상념을 마친 히나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 근처에 다다랐다. 검은 정복을 입은 남자들이 그녀를 마중했다. 절궁의 경호대였다.
“아가씨, 짐 주십시오. 제가 들겠습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결벽증 몰라서 그래요? 약 봉투에 당신 손 닿았다간 손목 잘려요.”
“아, 예…….”
뻘쭘하게 뒷덜미를 긁던 경호원은 잠시 히나의 귀를 빌렸다. 그가 작게 속닥였다.
“게헤나 게이트 쪽에 저희 일본 영웅 대대를 보내신 거 기억하십니까?”
“알죠, 당연히. 몇 주 됐잖아요. 왜요, 물자 지원 요청했어요? 아끼지 말고 팍팍 줘요. 예산 갖고 뭐라 하는 의원들 있으면 천검님이 시켰다 해요. 그럼 알아서 입을 다물걸.”
“…그게 아니오라. 아무래도 게이트 쪽에서 흉흉한 소문이 도는 듯합니다.”
“흉흉한 소문이요? 무슨 소문?”
히나가 눈을 깜빡였다. 사내가 가까이 밀착했다.
“게이트 쪽에 생긴 틈새 있잖습니까. 이젠 어린아이 정돈 오갈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답니다. 아마 일주일 내로 큰 이변이 있을 듯합니다.”
히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경호원이 재차 물었다.
“타이밍 봐서 저희 쪽은 애들한테 철수 명령 내릴까요?”
“안 됩니다.”
히나는 단호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형국이 심상치 않아요. 이럴 땐 단기적인 손실만 보고 움직일 게 아닙니다. 길게 봐야죠.”
“그렇다면.”
“최대한 협조하세요. 혹여 일이 일어나면 일본은 그 최전선에 있었다고 소리 낼 수 있게끔.”
히나가 똑똑하게 말했다. 그녀는 일본 총리대신을 내리 따라다니면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었다.
“대신 우리 측 영웅들 신변 안전을 위해서라도 공급하는 물자들의 질을 높이세요. 겸사겸사 협회랑 검제님 측에도 공급해 주시고요. 훗날 저희 평판에 도움이 될 겁니다.”
“예, 아가씨.”
“아카데미에서 근무 중인 협회 쪽이랑 학원장님, 그리고 천검님께도 알리세요.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아버지나 저는 건너뛰고 바로 보고할 수 있게 사람들한테 말도 해 놔요.”
“넵.”
남자가 핸드폰을 들자 히나가 한 템포 늦게 만류했다.
“천검님께는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예? 아가씨가 직접요?”
경호원은 의아함에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가씨는 천검에게 험한 꼴을 당한 당사자였다. 한데 본인이 직접 연락하신다고? 이상했다.
히나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아버지 성격 몰라요? 여러 입 거치는 거 싫어하시는 거. 이런 중대 사안은 제가 직접 전하는 게 맞아요. 이야기라도 새나가 봐. 나는 그렇다 쳐도 당신도 입에 화살 꽂힐걸요.”
“아, 예…….”
방금과 같은 패턴. 경호원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료조의 어머니는 우리를 집 안으로 맞이했다.
“차를 내올 테니, 두 사람 다 소파에서 조금만 기다려요.”
그녀는 친절한 미소로 거실로 안내하곤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슬슬 집을 둘러보았다. 밖에서 보기엔 평범했던 아파트의 실내는 널찍해서 좋았다. 창문 밖으로 부산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져 있었다.
‘혼자 사시는 집이 엄청 좋네.’
료조는 거실 한복판에서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렸다. 어머니 외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서 그녀는 숨을 돌렸다.
“네 어머니 말대로 일단 앉자.”
“응…….”
료조의 어머니가 차를 내오는 동안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달그락거리는 찻그릇 맞물리는 소리만 나지막이 울렸다.
그때, 료조가 내 팔꿈치를 슬며시 당겼다. 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는 하늘색 눈동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해.’
료조는 문전박대도 각오했을 터다. 근데 반대로 어머니는 그녀를 보자마자 껴안았다. 딸을 버리고 떠날 사람이 지을 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에 료조는 혼란할 것이다. 이 친절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놔두었다. 이럴 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료조의 다른 면을 많이 보네.’
냉철하고 차갑기만 하던 모습은 없었다. 감수성 풍부하고 겁 많은 소녀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만큼 료조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남다른 듯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잠시 후, 료조의 어머니께서 고급스러운 쟁반을 협탁에 내려놓으셨다. 허브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처음 맡는 냄새에 코를 씰룩이자 어머님이 생긋 웃었다.
“바람이 많이 찼죠? 캐모마일이에요. 몸을 데워 주는 효능이 있답니다.”
나는 찻잔을 건네받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갑자기 찾아왔는데 친절하게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무슨 말씀을요. 저야말로 제 딸과 동행해 주셔서 영광일 뿐이랍니다, 천검님.”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셨습니까?”
“어머! 이 세상에 천검님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요. 다만 초면엔 후드 때문에 못 알아봤답니다. 결례를 용서하소서.”
료조의 어머니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서 깍듯이 인사했다.
“저, 신시아. 위대한 대영웅 천검님을 뵙습니다.”
“성함이 신시아시라면…….”
“네. 천검님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이랍니다.”
나는 냉큼 고개를 돌렸다. 료조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 한일 혼혈이었어?’
눈빛으로 묻자 료조가 낮게 까딱였다. 그러면서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대꾸했다.
‘안 물어봤잖아.’
‘…….’
맞다, 료조는 이런 애였지. 혈통의 비밀, 엄청난 반전마저 묻지 않았다고 말도 안 해 주는 여우 같은 성격. 오늘 분위기가 소녀소녀해서 깜빡했다.
‘그래, 한일 혼혈을 순수 일본인으로 오해한 내 잘못이다.’
턱을 괸 채로 우리를 구경하던 신시아는 시선을 거둔 뒤, 주전자를 기울였다. 경직된 분위기 가운데 그녀만이 부드럽게 행동했다.
신시아가 료조에게 말했다.
“네가 여길 찾아왔다는 건 내게 묻고 싶어서 온 거지? 왜 너를 떠나야만 했는지. 혹시 네 아버지, 절궁한테 강제로 내쫓긴 게 아닌지. 우리 딸은 아마 후자로 확신하겠지?”
료조는 잘게 어깨를 들썩였다. 신시아가 먹기 좋게 자른 양갱을 이쑤시개로 찍어 딸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거 먹으면서 들을래?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다소 씁쓸할 예정이라서.”
료조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곤 다시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 양갱 끊었어.”
신시아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다 컸구나,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