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40)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40화(236/300)
240화 첫눈 (4)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어머님은 큐브 모양 양갱을 포크로 집어 오물거렸다. 내가 슬쩍 눈치를 살피곤 제안했다.
“제가 있어서 불편하시면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천검님이 들어 주신다면 제 쪽에서 감사하죠.”
“아… 예.”
“혼자 살다 보니 누군가와 이야기할 기회가 줄어들어 말이 잘 안 나올 뿐이랍니다. 불편을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어머님은 나를 공손하게 대했다. 그 정도가 과해 황송하기까지 했다.
‘이 세계가 신분 사회인 건 알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엄청 민망하네.’
자식인 료조는 나를 반말로 부르는데, 그 부모는 나를 존대한다.
외부인인 내겐 이상하지만, 이 세계인들에겐 지극히 상식적인 품행일 것이다.
다만 이 묘한 상황에 난 속이 울렁였다. 료조와 똑 닮은 어머님이 이러시니 더 거북했다.
‘료조는 머리랑 눈동자 색만 절궁을 닮았고, 외모는 그냥 어머니를 빼다 박았구나.’
어쩐지 사키 히나와 이복 자매치고도 영 안 닮았더라니. 료조는 일본 쪽 피보다 상대적으로 한국 쪽 피가 진한 모양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찻잔을 매만졌다. 꽁꽁 얼었던 손가락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어머님이 입을 떼셨다.
“내가 료조, 너를 떠난 이유를 말하려면 어쨌든 네 아버지 ‘사키 코지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네. 우리 딸이 나를 원망하는 시간은 그 이후로, 어때?”
“…….”
어머님이 말문을 열자 료조의 인상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아마 절궁의 이름이 나와서이리라.
어머님은 료조의 이마에 콩 꿀밤을 먹였다.
“물론 네 아빠가 이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천검님 앞에서 그런 표정 지으면 못 써, 요 녀석아.”
그러곤 허리에 손을 올리며 딸을 혼냈다.
“어쩜 같은 나이인데도 천검님처럼 의연하지 못할까. 다 큰 척하지만 속은 완전히 어린애였네. 네 옆에 계신 천검님의 반이라도 닮아 봐!”
료조는 이마를 감싸며 낮게 씨근거렸다.
“그 사람이 엄마 쫓아낸 거잖아, 나 때문에. 절궁이 나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엄마가 제 발로 나를 떠났다고 했다고! 근데 난 알아. 엄마는 자의로 나를 떠난 게 아니란 것을…….”
“네 아빠 말이 맞아. 나는 내 의사로 절궁가를 떠나왔어.”
“뭐……?”
반문하는 료조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어머님의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체, 대체 왜? 엄마가 나를 떠났다고? 왜? 어째서?”
료조가 횡설수설 토막 난 말을 토해 냈다. 어머님은 쓰게 웃으셨다.
“이 말을 하면 우리 딸이 나를 엄청엄청 미워할 걸 알아. 하지만-”
말을 잇기 전에 어머님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호선을 그렸다.
“어쩌면 다 큰 지금의 내 딸이라면,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 줄지도 모르겠네.”
“마음? 무슨 마음? 딸을 버리고 간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 달라는 건데?!”
“벌써 원망 타임이야? 각오는 했지만, 너무 훅 들어오니까 마음이 쿡쿡 쑤시는걸.”
료조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난 미안하단 말부터 나올 줄 알았어. 변명이라도 했으면 다 알고서도 넘어가려고 했다고!”
“변명은 못 써. 사람은 매사에 정직해야 해. 그래야 진심이 통해. 네가 어렸을 때 숱하게 말하지 않았니.”
“지금도! 방금은 검마, 얘랑 나를 비교하질 않나! 엄마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잔소리를 하는 건데!”
“주제에서 계속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니까 대화 상대로서 지적했을 뿐이야, 엄마로서가 아니라.”
료조가 사나운 눈매로 따졌다. 어머님은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두 사람은 예사 모녀처럼 티격태격했다.
‘허.’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딸바보란 신조어도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녀는 그 통념에서 가볍게 비껴 갔다.
“엄마는 예전에도 그랬어. 내가 무슨 일을 겪든 나만 야단치고!”
“호소만으론 사람을 설득할 수 없어, 료조. 그리고 자식이 빈약한 근거를 들이밀 때, 그걸 조정해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잖니.”
쏘아붙이는 료조에게 어머님은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그러나 확실하게 응수했다. 그녀는 료조의 감정적인 공세를 정론으로 방어했다.
“또 십 년 만에 엄마 행세!”
“그럼 우리 생판 남남처럼 말 높이면서 할까요, 사·키·료·조·씨? 저도 그게 더 편할 것 같네요.”
어머님은 딸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딸천재였다.
나는 둘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난감한 기색으로 차만 홀짝이며 관망했다. 어쭙잖게 중재했다간 괜한 불똥이 튈 것 같았기에.
그렇다고 사시미를 꺼내면서 그만하라고 으르렁거릴 수도 없으니까. 내 사시미는 악인에게만 이빨을 드러낸다.
‘그건 그렇고, 저 어머님도 대단하시네. 그 료조를 상대로 한마디를 안 지고 계셔.’
어머님은 달변가였다. 학년 수석의 말솜씨로도 당해 내지 못했다. 옥신각신이 길어질수록 수세에 몰린 건 딸, 료조였다.
료조는 씩씩거리더니 이내 소파에 풀썩 앉았다. 어머님은 웃으시며 양갱을 하나 더 입에 넣었다. 미소가 달았다.
“이럴 줄 알고 양갱 먹으면서 대화하자고 한 거야. 나만큼 우리 딸 성질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료조는 휙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뒤늦게 내가 같이 있다는 걸 인지한 건지 얼굴색이 상기됐다.
“어쨌든 화낼 거 다 냈으면, 이젠 내 이야기를 해도 될까?”
“그러든지.”
어머님은 어깨를 으쓱하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스스로도 인정해. 딸을 내버려 두고 떠난 이기적인 사람인 거. 그 부분에 대해선 정말 할 말이 없어. 평생 속죄는 하겠지만 네게 용서를 바라진 않아. 여기서 더 이기적인 엄마가 되고 싶진 않거든.”
한 아이의 엄마가 자조했다.
“근데 있잖아, 료조. 당시의 난 엄마가 되기엔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이었나 봐. 누군가의 엄마란 자각보다 한 사람의 여자란 자각이 더 컸거든.”
소강상태에 접어 든 거실은 정적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 네 아빠를 진심으로 좋아했거든.”
“……!”
료조는 휘둥그레 눈이 커졌다. 못 들을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얼이 빠진 낯이었다.
“그 사키 코지마를?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세뇌당한 건 아니고?”
료조가 비명에 가까운 기함을 질렀다. 정신 차리라며 멱살 붙잡고 흔들 기세였다.
“얘는 엄마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원래 감정이란 건 불가지인 거야.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어. 그래서 사람이 미련해지는 거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파렴치한을… 애초에 그 인간 부인만 몇 명인데!”
“그건 딱히 상관없어. 영웅 사회에서 일부다처제는 흔한 일이잖니.”
아, 이런. 당사자가 긍정해버리다니. 2년을 넘게 살았지만 이 봉건주의 사고방식은 적응이 안 된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나도 알아, 네 아빠가 결벽증 환자에 맛이 간 사람이란 거. 그리고 가족한테 충실하지도 않지. 첫째 부인이신 철심(鐵心) 님을 제외한 부인들은 안중에도 없어.”
어머님도 료조의 말에 동의했다. 공감을 넘어 힐책했다. 말투가 조곤조곤하니 더 무서웠다.
“근데 어쩌겠어. 첫눈에 반한걸. 이를테면 나쁜 남자 콤플렉스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정략결혼이라 해도 부인을 그렇게까지 두는 건 순수한 절궁의 능력이야. 권력도 막강하긴 하지만, 일단 얼굴이 잘생겼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암만 세탁해도 그 인간은 나쁜 남자가 아니야! 여자를 여러 명 꼬시고 다니는 거, 그건 그냥 나쁜 새끼 잖……!”
료조는 버럭 소리치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뭔데. 왜 나쁜 새끼란 말을 하다가 나를 보는 건데.’
어머님은 그런 우리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 딸은 나를 너무 많이 닮아 버린 것 같네. 안 좋은 면까지.”
* * *
이후로 어머님, 신시아의 이야기는 두 시간가량 이어졌다.
“엄마는 네 아버지, 절궁을 진심으로 좋아했어. 이뤄지지 않을 사랑이란 걸 알면서도.”
이십 대 초반의 그 시절, 신시아는 그저 감정에 충실했던 젊은 새신부였다.
하나 인성 파탄자 절궁은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차갑게 쳐 내진 않았으나 무관심으로 대했다. 그에 열렬했던 신시아의 사랑도 차츰차츰 식어 갔다. 무상의 관심은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료조의 비범함을 눈치챈 절궁은 신시아에게서 딸을 떨어뜨려 놓았다. 이는 사실상 절궁이 그녀에게 하는 경고였다, 사키 료조에게서 멀어지라는.
“그쯤 되니까 더 이상 못 버티겠더라고.”
신시아는 기꺼이 제 발로 나왔다. 그건 일종의 치기였다. 자신이 사라지면 절궁이 후회하길 바라는 그런 치기.
“이 점은 명심해 둬, 료조. 나는 사키 코지마 때문이 아니라 내 발로 직접 걸어 나온 거야.”
신시아는 부산 여자였다. 드넓은 바다처럼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더불어 강단과 지조가 굳셌다. 절궁을 사랑한 것도, 그를 떠난 것도 그녀가 택한 일이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딸을 두고 왔다는 죄악감도 그녀가 평생을 져야 할 부채였다.
여하튼.
그래서 절궁이 후회했느냐? 아니었다. 우리의 절궁은 역시나였다. 그는 신시아를 붙잡지 않았다.
그래도 꼴에 배려라고 도쿄 중심지에 큰 저택을 얻어줬단 다. 몇백억을 호가하는 호화로운 저택을 말이다.
“이혼한 것도 아닌데, 위자료 셈 치라고 덜렁 넘긴 거지.”
신시아는 그 호의를 단칼에 거절.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와 새 인생을 시작했다.
‘절궁, 그 양반 돌아이인 줄은 알았지만 진짜 미친놈이었네.’
알고 보니 그 인간도 속 깊은 양반이었던 거야. 같은 클리셰 따윈 없었다. 료조의 말마따나 절궁은 타지 않는 쓰레기였다.
이렇게까지 천편일률적이니 되려 사람이 담백해 보였다. 부정적인 의미로.
‘첫째 부인을 얼마나 좋아했던 거야?’
듣자 하니 사정은 딱했다. 근데 뭐 어쩌라고? 세상에 사정없는 사람이 있나? 장사를 하면서 별의별 인간들 존나게 봐온 나다.
그간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단언할 수 있다. 절궁은 그냥 미친 새끼였다. 반론의 여지는 없다.
‘다음엔 아주 목에다가 칼침을 박아야겠네.’
먼젓번엔 외교 문제로 불거질까 봐 허벅지로 끝냈다. 하지만 그 추악한 내면을 안 지금은 외교고 나발이고 없다.
또 이딴 소리가 들려온다? 일본 전체와 척지는 한이 있어도 참교육을 가할 생각이다.
왜란을 사시미로 잠재울 것이다.
‘일본 침몰. 제목이랑 사이즈도 딱 맞아떨어지네.’
그렇게 신시아와 사키 코지마 사이의 비사는 끝이 났다. 옆을 보자 혼란한 기색의 료조가 보였다. 그녀는 여자 신시아와 어머니 신시아의 괴리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면서도 심통이 난 눈초리는 여전했다.
‘하긴, 십 년 묵은 앙금이 대화 한 번으로 풀리진 않겠지.’
그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신파였다. 현실은 그리 극적이지 않다. 뒷맛이 찝찝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죄송합니다, 천검님. 제가 너무 귀한 시간을 많이 뺏었네요.”
“아닙니다. 어차피 아공간 워프를 타고 와서 금방 가는걸요.”
“그래도 귀하신 분이 아카데미를 오래 비우면 안 될 일입니다. 자, 료조 너도 얼른 일어나.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고.”
“어…….”
우리는 집을 나왔다.
어머님은 아파트 입구까지 배웅해주셨다. 떠나기 직전 그녀가 내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이런 말 하기는 염치가 없지만, 제 딸 잘 부탁드릴게요. 아무래도 얘가 절 닮아서 그런지 한 성격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네요.”
어머님은 머리를 살짝 숙였다. 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료조는 저 없이도 아카데미 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저 말고도 친구 많고요.”
“친구라…….”
어머님은 몇 번 입술을 뻥긋거리시더니 결국 한숨을 쉬었다.
“제 딸은 나쁜 남자가 아니라 눈치 없는 남자가 타입이었나 보네요.”
“…네?”
내가 눈을 깜빡였다. 료조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엄마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야, 더 상대해 주지 마. 가자, 얼른.”
료조가 거칠게 옷소매를 끌었다. 나는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멀어지는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했다. 날씨가 찬데도 그녀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계셨다.
저벅, 저벅.
아파트의 풍경이 사라지고 고가 해안 도로가 드러났다. 바다 때문인지 비릿한 물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쯤에서 내가 말했다.
“잠깐 서 봐. 아공간 워프 터미널까지 갈 택시 잡아야 해.”
“워프 말고 고속버스 타고 가자.”
“다섯 시간은 꼬박 걸릴 텐데? 주말이라 차 막혀서 더 걸릴 수도 있어.”
“그래서. 아니, 그래도 버스. 워프 멀미가 너무 심해.”
얘, 올 때는 멀미 전혀 안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워프 그렇게 사적으로 이용하는 거 권력 남용이야.”
“…그래 그럼, 고속버스 타자.”
“버스 터미널까지도 걸어갔으면 좋겠어. 머리가 뜨거워서 바닷바람 좀 쐬면서 가게.”
료조는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그걸 보며 나는 한 발짝 먼저 나가 마주 섰다. 그리고 머플러를 꼼꼼히 동여매 줬다.
“말을 그렇게 할 거면 추워 보이지나 말든지.”
“…….”
료조는 내 얼굴과 손길을 번갈아 쳐다봤다. 안색은 터질 듯한 분홍색이었다.
“저기… 있잖아. 나…….”
료조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였다.
사락.
머플러 위로 희끄무레한 조각이 스며 내렸다.
우리는 동시에 머리를 젖혔다. 잿빛 하늘, 청록빛 해안선, 그 사이에서 너울거리는 새하얀 가루. 물감을 푼듯한 풍경은 절묘하게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이건.”
첫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