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4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47화(243/300)
247화 혈전 (1)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는 일은 부지기수다.
그 반대는 어떨까?
위의 경우보다는 드물 거다.
가벼운 상처조차 흉은 쉽게 져도 아물기까지는 족히 몇 달은 걸리니까.
인간관계는 오죽하겠나.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통하면 모를까,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나 간혹 일어나곤 한다, 그런 일이.
협회장과 내가 그 드문 사례 중 하나였다.
“시간 될 때면 언제든 놀러 오게나. 모처럼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네.”
협회장이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를 배웅했다. 음습한 광기를 내비쳤던 눈빛은 한결 맑아진 상태. 손을 흔드는 그를 보며 나는 잠시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양반이랑 대화가 잘 통한다는 건 칭찬인가, 욕인가.’
치료 이후, 협회장과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프로젝트를 열렬히 설명했다. 그런 협회장의 모습에 나는 새삼스럽지만 놀랐다. 물론 이는 좋은 의미의 놀람이었다.
‘마냥 광인인 줄 알았는데, 역시 협회장은 협회장인 건가…….’
협회장의 식견과 해박함에 내심 감탄했다. 어째서 그가 현 인류 최고 지성이라 불리는지도 짐짓 알 만했다. 다만, 중간중간 용어가 너무 어려워 반 정도만 이해했다.
그래도 성의차 고개는 끄덕여 주었다. 전생에 서비스직에 종사했던 나였다. 노인 상대로 하는 맞장구는 내가 도사다.
한데 그 서비스 정신을 협회장은 ‘대화가 통한다.’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럴 리가. 내가 광인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럼에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프로다.
“저도 재밌었습니다.”
내 말에 협회장은 기분이 더 좋아졌는지 미소가 진해졌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그가 문득 물었다.
“말하는 걸 까먹을 뻔했군. 천검, 자네 팬 사이트 인원 제한 해제된 거 알고 있나?”
“예. 오기 직전에 친구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거 내가 그런 것일세.”
“……?”
협회장이 내게 스마트폰을 꺼내 보였다. 내 팬 사이트가 담긴 화면. 그 안엔 협회장의 닉네임도 자그맣게 적혀 있었다.
‘천마_toxic?’
별 희한한 닉네임이다 싶었다.
“팬 사이트 인원에 제한을 둔 이유는 단일 영웅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함이었네. 영웅 협회가 출범한 연유도 그 때문이었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집단은 개인이 지대한 힘을 갖는 걸 몹시도 두려워하거든.”
“어째서죠?”
협회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웃대가리들이 별 이유가 있겠나. 그저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질까 봐 두려운 게지.”
그에 나는 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웃대가리의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그들을 조롱하고 있으니.
“하지만 언제까지고 집단이, 정확히는 기득권이 개인을 억압할 수만은 없네. 그건 너무 시대착오적이잖나. 게다가 세상도 시끌시끌하지. 1년 새에 군단장이 셋이나 나타난다는 게 기실 말이 안 되는 거나 다름없으니. 이렇게 흉흉한 시국일수록 인류에는 대표자, 즉 리더가 필요하네.”
“협회장님이 그 리더에 가장 가까우신 분 아닙니까.”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협회장은 껄껄 웃더니 메디아에게 말했다.
“둘째야, 네 부하가 출세욕이 있나 보다. 듣기 좋은 소리를 참 잘해.”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농담이네. 그리 당황하는 걸 보니 자네는 농담이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
“나를 높게 평가해 주는 건 고맙네만, 나는 하늘의 선택을 받은 몸이 아니야. 몇 시간 전까지 죽음을 부르짖던 내가 그런 위대한 사람이라면 인류의 미래가 너무 어둡잖은가. 그리고 뭣보다 난 영웅 협회라는 집단에 속해 있어. 진정한 리더의 자질은 집단의 힘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더불어 시대의 선택을 받아야만 해.”
말을 하던 도중에 협회장은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가 야트막한 탄식을 흘렸다.
“다들 운이 좋구먼. 떠나기 전에 하늘이 이리 귀중한 선물을 다 주고.”
나와 일행들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전원 눈을 크게 떴다. 밤하늘을 너울거리는 장막이 눈동자에 가득 찼다. 자주색과 청록색 빛무리가 넝쿨처럼 엉겨 있는 광경. 일견 빛의 융단으로 짜인 커튼처럼 보였다.
“오로라…….”
누군가 중얼거렸다. 여자 목소리였으니 학원장님이나 비서 둘 중 한 명일 터다. 어쩌면 둘의 목소리가 겹친 거일지도.
쿵쿵.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지.
‘아름답다.’
이 이상의 어휘는, 적어도 나는 알지 못한다.
오로라. 그것은 아공간 장막과는 또 다른 신비함이었다.
대자연의 편린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푸른 별의 황혼이었다.
“남극이나 북극 주변에서만 관측할 수 있는 천문 현상이네. 학자들 사이에선 ‘천상의 커튼’이라고도 불리지. 극지방 원주민들은 ‘신의 영혼’이라고도 일컫더군. 부르는 이름이 거창한 만큼 보기가 힘든 기상 현상일세. 나도 여기 오고 나서 두 번째로 보는 것이니.”
모두가 황홀한 기분을 느끼는 가운데 협회장이 내게 말했다.
“역시 시대의 선택을 받은 건 자네야, 천검.”
협회장의 손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지만.
“시대를 바꿔 보게나. 내 뒤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음세.”
말의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 * *
남극에서 복귀하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밀린 업무들이었다. 겨우 하루 동안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서류 더미는 산처럼 높아졌다.
허탈함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래도 어쩌나. 오늘 일을 다음으로 미루면 곱절로 늘어서 되돌아온다.
투덜거릴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해치우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뭔 서류들끼리 짝짓기라도 하나. 이거 어째, 해도 해도 줄기는커녕 늘어나는 것 같냐.”
…라고 다짐하기 무섭게 나란 놈은 신경질을 부린다. 근데 어떡해, 짜증이 나는걸. 남들 다 잘 시간에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내 처지가 처량할 따름이다.
“웨폰한테 놀러 오라고나 할까.”
겸사겸사 업무도 좀 떠넘기고.
이 또한, 생각이 들기 무섭게 머리를 흔들었다. 현재 시각 오후 11시 30분.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웨폰의 재잘거림에 일을 못 할 게 분명하다.
웨폰을 호출하면 일도 잠도 포기해야 한다.
‘당장의 심심함 때문에 잠을 포기할 순 없지.’
이때, 집무실 문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도둑인가 싶어 반사적으로 사시미를 더듬다가 말았다. 여기에 훔칠 거리라곤 서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나는 은연중에 기대했다. 도둑놈이 이것들을 훔쳐 줬으면 하고.
그럼,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도둑놈이라도 한 번은 눈감아 줄 생각이었다. 내키면 자는 척이라도 해 줄 수 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도둑에게마저 자비롭다.
끼이익.
아쉽게도 집무실로 들어온 이는 도둑이 아니었다. 다만 도둑고양이처럼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는 아벨이었다.
‘쟤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아벨은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밀면서 물었다.
“바빠……?”
“아니, 괜찮아.”
바쁜 건 사실이었으나 곧이곧대로 대꾸하진 않았다. 묻는 사람 입장이 있지. 저리 꼼지락거리는데 얼마나 무안하겠나.
아벨이 살금살금 문을 닫고서 들어왔다.
“방해했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그녀는 헛기침하며 애써 태연함을 연기했다.
‘뭐지.’
이 장면, 왠지 기시감이 든다. 언제였더라.
‘아, 니벨룽가에서 하숙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지.’
토끼 모포를 돌려주겠다며 아벨이 내 방에 찾아왔을 때. 참고로 그 모포는 지금까지도 잘 사용하고 있다. 모질이 좋아서 덮고만 있어도 잠이 솔솔 오는 물건이다.
“그래서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다. 아벨은 우물쭈물하다가 들릴 듯 말 듯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한테 들었어. 조만간에 게헤나 게이트 인근에서 큰 사건이 벌어질 것 같다고. 아아, 그렇다고 기밀까지 전해 들은 건 아니야!”
“들었어도 상관없어.”
명료한 내 어조에 아벨은 눈을 깜빡였다. 나는 턱을 괴었다.
“검제님은 아벨, 네 가족이시잖아. 할아버지가 큰일을 앞뒀다는데, 적어도 가족인 너만큼은 알아야 하는 게 맞지. 기밀이고 나발이고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내가 말해 줄게.”
그러고는 현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검제님이 정확히 게이트에서 뭘 하고 계시는지, 무엇 때문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내 나름대로 정리한 인과 관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사실, 이번 사달은 그 어느 때보다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게헤나 게이트를 뚫고 오는 퍼머쉬의 전력조차 불분명하다. 놈이 얼마나 강한지, 자세히 어떤 마법을 부리는지 명확히 밝혀진 게 없다. 그저 역사서에 의존해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전하는 모든 영웅이 생환하면 좋겠지만 ‘반드시’라고는 장담 못 한다.
그건 노력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운에 기대야만 한다. 하지만 영웅들을 통솔하는 나로선 희망찬 말만 할 수 없는 노릇.
나는 병사가 아니라 장수다. 장수는 언제나 최선과 최악의 가능성을 같이 생각해 둬야 한다.
“아무튼, 여기까지야.”
“…….”
가만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벨은 의외로 표정 변화가 적었다. 그러나 안색이 살짝 굳은 게 이미 알고 있던 기색은 아닌 듯했다.
“그렇구나.”
충격에 무뎌진 것. 천 클래스 수업의 성과가 지금에서 드러난다.
“너도 당연히 참전하겠네.”
“응, 그렇게 되지.”
“두렵거나 그렇진 않아? 네 말대로면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며.”
“무섭지.”
부정하지 않았다. 다른 의미-행여 아군의 피해가 막심하다든가-이긴 하다만 두려운 건 사실이다.
나는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어 집무실 책상을 두드렸다.
“근데 내 위치가 위치잖아. 최전선에 서야 하는 사람이 떨면 후방에 있는 영웅들 사기가 어떻겠어. 무서워도 안 무서운 척, 덤덤한 척을 해야 하는 게 이 자리니까.”
아벨은 자그맣게 소리 내어 웃더니 놀리듯 말했다.
“거기에 하나 추가해, 멋진 척까지.”
“야,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진지하게 말해서 더 웃기네요!”
아벨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문 쪽으로 향했다. 왜인지 후련해 보였다. 집무실을 나가기 직전 그녀는 천천히 반만 뒤돌았다.
“그래도… 할아버지 곁에 검마, 네가 있다고 생각하니 안심이야.”
머리카락 사이로 귓바퀴가 방울토마토처럼 빨갛다.
“그러니까 특별히 뒤에 ‘척’은 빼 줄게.”
아벨은 그 말만 남기고는 집무실을 떠났다.
* * *
하와이 섬, 게헤나 게이트 바로 앞.
성 부장과 검제가 나란히 서서 게이트를 쳐다보았다. 게이트에 새겨진 유격은 이젠 사람 한 명은 오갈 수 있을 만큼 커진 상태.
그 두 사람 뒤로는 협회 직원들과 일본 영웅들이 집결해 있었는데, 다들 얼굴이 사색이었다.
침통한 적막이 일대를 휘감았다. 그나마 성 부장을 포함한 굴지의 워리어급 영웅들 정도가 양호한 수준. 그들도 표정이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드디어군요.”
성 부장이 중얼거렸다. 검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을 부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