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5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51화(247/300)
251화 혈전 (5)
오늘도 아침은 평화롭다.
다만, 지저귀는 새소리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겨울인 탓이다.
후우웅.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휘모는 장소. 덩그러니 놓인 단상 앞으로 수많은 영웅이 서 있다. 퍼머쉬 토벌전을 위해 세계 각지에서 차출된 영웅들이었다.
“아침부터 모이라고 한 것 보니. 오늘이 디데이로구먼.”
한 남자가 턱수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무심결에 내뱉은 한마디를 곁에 있던 웬 사내가 받았다.
“그러게나 말이오. 바람 선선하고, 하늘 흐리고. 마족들이 환장할 만한 날씨요.”
“그쪽은… 완장이 녹색인 걸 보니, 나와 같은 시니어급 영웅이고. 소속은 어디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일본 1대대 소속이요.”
“어쩐지 어깨에 활이 걸려 있다고 했소. 후방이라 좋겠구먼.”
“군단장을 마주하는데 전방과 후방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전방이 뚫리면 후방은 5분도 못 버티고 전멸할 텐데 말이오.”
“그것도 그렇군.”
턱수염 남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 웃었다. 두 남자는 일면식 없는 생판 남이었다. 한데도 오랫동안 안 사이 친구처럼 친근한 말투로 대화를 주거니 받았다.
영웅이란 이런 자들이었다.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도 농담을 던질 정도의 담이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영웅이라 불리며, 존경과 질시를 한 몸에 받는 것이다.
“어쨌든 내 잘생긴 뒤통수 기억해 뒀다가 잘 피해서 쏴 주시오. 아군의 화살에 맞아 죽으면 그것만큼 불명예가 있겠소?”
턱수염 남자는 궁사에게 뒤통수를 내보이더니 손으로 탁탁 쳤다. 궁사가 눈을 가늘게 좁히더니 곧 입매를 늘였다.
“털이 적어서 눈에 띄는군. 내 꼭 기억하리다.”
“예끼! 탈모인 놀리는 거 아니오!”
“하하, 놀리려는 의도는 없었소. 그나저나 우리는 왜 여기에 모인 거요?”
턱수염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으레 하는 것 있잖소. 이런 거대한 전투 전에 통솔권자들이 상투적으로 연설하거나 그런 것 말이오.”
“그렇군.”
“내 영웅 밥만 삼십 년 넘게 먹었소만, 솔직히 그런 것들 왜 하는지 모르겠소. 우리가 아카데미 생도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 훈시나 들어야겠소?”
“그것도 그렇소.”
궁사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수염 남자의 주장이 이어졌다.
“사기가 높아지긴커녕 오히려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단 말이오. 안 그래도 이번 토벌전의 총책임자가 웬 핏덩이라 불안해 죽겠구먼.”
턱수염 남자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꿍얼거렸다. 궁사가 두리번거리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입을 턱수염 남자 귀 가까이에 대고 속닥였다.
“보는 눈이 많소.”
“차라리 잘됐소. 그럼 듣는 귀도 많을 테니.”
턱수염 남자는 픽 코웃음을 흘렸다. 그는 궁사의 첨언에도 개의치 않고 말했다.
“위대한 영웅이라는 게 강해서만 될 수 있는 게 아니오. 전장에선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오. 그리고 그런 건 대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법이지. 그런데 인제 겨우 열일곱이 이 많은 영웅을 통솔할 감이 될지 그게 의문이다. 이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아오만… 그래도 그분께선 칠성이시오.”
“칠성이 뭔 대수요? 어차피 군단장 눈에는 칠성이나 우리나 거기서 거기일 것이요…….”
그때였다.
터벅, 터벅.
자리한 모두의 시선이 단상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를 쫓았다. 검은 제복에 백의를 두 어깨에 걸친 소년, 천검 강검마였다.
턱수염 남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수염 때문에 거무튀튀한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턱수염 남자는 새삼 놀라웠다.
후미에 있는 이목들까지 단숨에 사로잡는 전율스러운 존재감. 마인이 아닐까 싶을 만큼 시커먼 기백이다.
그제야 영웅들은 허둥지둥 전열을 가다듬었다. 뭉근한 여유가 감돌던 장내는 한순간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터벅.
천검이 단상 중앙에 섰다. 뒤 따라 올라온 검제는 그의 좌익에, 창성은 우익에 섰다. 흡사 두 노장이 천검을 보좌하는 것처럼 보였다.
천검은 무심한 눈으로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영웅들은 순간 몸이 졸아붙는 걸 느끼며 그 시선을 피했다. 특히나 열심히 나불대던 턱수염 남자는 거의 눈을 내리깔다시피 했다.
“…….”
분위기가 완전히 잠잠해지자, 천검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영웅 전원은 돌처럼 자세가 굳었다.
뭐지? 설마 자신들을 한심스럽게 보는 것인가? 행여 프로 실망러같은 말이라도 하려나?
터벅.
천검은 한 발 앞으로 내디딘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이윽고 그는 단상의 맨 끝자락에서 멈췄다. 반보라도 더 내디디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낭떠러지.
천검은 그곳에 털썩 앉았다. 두 다리는 단상 아래로 늘어뜨린 채, 눈높이는 서 있는 영웅들과 맞추며.
감히 눈을 들지 못하는 영웅들을 보며 천검이 입을 열었다. 건조하지만, 분명 다정한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다들 댓바람부터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뜻하지 않던 강검마의 겸양에 영웅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사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은 건 제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거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린 제가 말해 봤자 딱히 설득력도 없을 거라는 거 저도 잘 알거든요.”
천검은 한 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 다른 손으론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관례라고 하니까……. 대신 짧게 하겠습니다. 말주변이 없다는 거 참작해 주시면 감사하겠고요.”
영웅들은 생각했다. 말을 고르는 그 모습은 퍽 인간적이라고.
“‘목숨을 바쳐 싸워라.’ 같은 말은 안 하겠습니다. 어차피 여러분은 영웅들입니다. 당연히 그럴 각오로 여기에 있는 거겠죠.”
동시에 목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다고.
“그러니 같은 맥락으로 ‘죽지 마십시오.’라는 말도 안 하겠습니다. 그건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니까요. ‘제게 힘을 빌려주십쇼.’처럼 나약한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발음이 단정하고 문장은 짧고 간결하다. 또한 중간중간 여백을 들여 말의 무게를 더한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목숨에 대한 책임이 제게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강검마는 구태여 자신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는 스스로의 권위를 잠시간 내려놓는 것.
“저는 새파랗게 어립니다. 아마 여러분의 아들뻘이겠죠. 믿음이 안 갈 만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는 기억해 주십쇼.”
더불어 자신들과 함께 싸우겠다는 의사를 표하는 것이다.
“저는 적어도 제가 짊어진 책임에서 눈 돌리는 사람은 아닙니다. 비록 어리지만, 그 정도의 책임은 짊어질 만큼 강하다고 자부합니다. 음- 이야기하다 보니 길어졌네요. 이 자리에 서면 다 이렇게 되나 봅니다. 아무튼 제 말의 요점은 하나.”
강검마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는 짤막하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깁시다.”
강검마가 부드럽게 몸을 돌린다. 뒷모습을 올려다보는 모두의 망막에 맺히는 두 글자.
『天劍』
제자리로 돌아가는 강검마의 등 뒤로.
와아아아아……!
귀청이 찢어지라 함성이 울린다. 진솔한 연설에 영웅들은 용기백배하였다.
영웅들의 무장이 하늘을 찌를 기세로 치솟는다. 북소리가 둥둥- 심장박동과 맞물리고,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깃발이 흘렀다.
“…마치 신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보는 것 같군, 안 그렇소?”
턱수염 남자가 궁사에게 혼잣말하듯 물었다.
“틀렸소.”
궁사가 송곳니를 보이며 대꾸했다.
“저분은 이미 신화요.”
* * *
연설을 끝마치자마자 우리는 진군하였다. 나와 검제, 창성이 선두에서 이동했다. 사기 증진의 목적도 있거니와 군단장 경험자인 우리가 최전선에 있는 게 맞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단장급. 그것도 마경을 찢고 나오는 군단장과 정면에서 조우하면…….’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게거품 물고 기절할 테니까. 거기다 피어까지 발산하면 한순간에 전열이 무너질 수도 있다. 요모조모 따져 봐도 우리가 선두를 맡아야만 했다.
따라서 다른 책임자들, 레미 장군과 성 부장 및 협회 간부들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자 부대를 인솔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행군하여 드디어 게헤나 게이트 목전에 도착했다. 흉측한 조각상들이 고름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이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기괴한 기물이었다.
‘뭐, 좀 있어 나타날 괴물들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전투태세를 재정비할 시간을 가졌다. 정확히는 한 뭉텅이로 있던 군대를 포지션별로 탑, 미드, 정글, 바텀으로 찢기 위함이었다.
당장 어제 도입된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영웅들은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흩어지는 와중에도 혼비백산하지 않고 딱딱 도열을 맞추다니.
‘과연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만 차출했다더니, 다르긴 다르구나.’
내심 안도하며 나도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이었다. 4군단장 퍼머쉬가 저 게이트를 찢고 등장한다. 마력을 한껏 머금은 전력인 상태로 말이다.
‘아고르 때와도, 베스나 때와도 비교가 안 되겠지.’
사람은 경험해 본 적 없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전력의 군단장을 겪어 본 적 없는 나다. 손에 땀이 차는 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증상이었다.
“천검.”
어느새 가까이 오신 검제님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옆에는 창성도 함께였다.
“자네답지 않게 표정이 어둡군.”
“아, 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검제님과 창성님은 두렵지 않습니까? 반세기 전 이곳에 동료 세 분을 잃으셨잖아요. 저 같으면 다시 오기 망설여졌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검제님은 반년 전에 아고르한테 팔을 잃기까지 했잖아요.”
내 말에 검제와 창성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은 앙숙임에도 이 순간만큼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제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건 영웅의 미덕이네. 아주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네만, 적어도 오늘은 40년 전보단 덜하네.”
창성이 말을 보탰다.
“그때는 영웅 군대가 편성되지도 않았어. 근데 지금은 어떤가? 워리어, 시니어급 할 것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이지 않았나? 그뿐인가. 천검, 자네랑 같이 싸울 생각을 하니 벌써 신이 나.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아, 그렇군. 내가 영웅이란 자들을 나도 모르게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곰곰이 되뇌어보면 게임에서도 영웅들이 벌벌 떨고 도망가는 모습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 그땐 단순히 유저의 커맨드에 따라 움직이는 숫제 데이터 덩어리라 생각했었다.
하나 그게 아니었다.
이들은 영웅이다. 호아킨 아카데미의 혹독한 교육을 수학한 초인들, 전장에서 죽는 걸 영광으로 아는 전사들이었다.
반면 나는 불과 반년 전에 이곳으로 온 이계인이다. 때문에 무심코 지구인의 상식으로 이들을 대해 버렸다.
‘아직도 지구 물을 다 못 뺐군.’
내가 픽 웃자, 검제와 창성도 덩달아 미소했다. 저 웃음의 의미가 뭔진 모르겠다만 큰 위안이 된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육중한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전원 고개를 틀어 게이트를 쳐다봤다. 소름 끼치게 생긴 대문짝에 금이 새겨지면서 돌 부스러기를 흘렸다.
낯익은 오싹함이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게헤나 게이트가 폭발하듯 열릴 거란 것, 그리고 너머에서 퍼머쉬가 걸어 나오는 장면까지. 머릿속에 선명한 영상처럼 그려진다.
“전원 전투 준비!”
창성의 쩌렁쩌렁한 지시가 널리 널리 퍼진다. 탱커 영웅들 속칭 ‘탑’은 투구를 내리고, 둔중한 방패를 올렸다.
기이잉.
검제가 검을 뽑아 수직으로 곧추세웠다. 검날이 주름진 얼굴 반을 가렸다.
쿵!
창성도 창대를 내리찍었다. 노면이 잘게 들썩였다. 나란히 선 검제에게 창성이 말했다.
“행여 내가 이번 전투에 팔을 잃게 되면 꼭 대련을 받아 주게나, 니벨룽.”
검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 검날엔 새하얀 빛의 입자가 아롱졌다. 검성의 오러였다.
“자네는 팔이 두 개 다 있어야 내 상대가 될까 말까야. 그러니 잘 간수하게. 혹시 아나? 두 팔 잘 붙어 있으면 내가 변덕이라도 부릴지.”
“크하하! 좋군, 좋아!”
창성이 사납게 웃었다. 그는 상체를 낮게 수그리며 창대를 짧게 잡았다.
콰-앙!
이때, 굉음이 터지면서 게이트의 문짝이 산산이 박살 났다. 시야는 제한적이다. 먼지구름 사이로 그림자들이 걸어 나오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검제와 창성, 두 백전노장이 등을 내보인 채로 내 이름을 외친다.
““강검마!””
하여 대답했다.
“이기어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