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5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54화(250/300)
254화 싸움의 기술 (3)
퍼머쉬가 입술을 뗌과 동시에 거신의 주먹이 빗발쳤다. 회백색 하늘의 싸늘한 겨울, 한여름 장마철처럼 사나운 빗줄기가 마구잡이로 지면을 때려 댔다.
거신은 매몰차게 천지를 부쉈다. 한없이 온화한 얼굴로 생명을 몰수했다.
“탑! 바로 앞으로!”
종말이 도래한 가운데 협회 간부가 소리쳤다. 절박한 외침이 투구 안에서 부딪쳤다.
그에 맞춰서 바이저를 쓴 영웅들이 저마다의 가호를 발현, 방패벽을 세워 거북이 모양의 진형을 구축했다. 고대 로마의 방진인 테스투도(Testudo).
“미드와 정글은 저 안으로!”
‘미드’와 ‘정글’은 재빨리 진형 안으로 피신했고, ‘바텀’은 거리를 멀찍이 벌리려 했다. 하지만 모두가 피할 수는 없는 법.
불상 거신이 등에 부채처럼 매단 팔만 총 이천여 개. 거기에 주먹을 내지르는 속도 역시 가공해서 잔상만 얼핏 보였다.
속도와 중량이 곱해졌다. 파괴력은 말해 무엇하나? 운석처럼 떨어지는 주먹 한 방에, 수십 명이 구축한 방패 등딱지를 주저앉힐 기세였다.
“씨이바-알!”
영웅들은 악을 쓰며 버텨 내려 했지만.
콰앙!
거신의 철퇴에 못 이겨 결국 방패와 함께 납작해졌다. 영웅들은 동료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방패만 추켜올렸다. 슬픔에 젖는 순간, 자신도 저 꼴을 면치 못할 테니까.
으아아아아아아……!
흙보라 속에서 귀곡성이 길게 늘어졌다. 무차별 난사되는 거신의 주먹은 영웅들을 개미처럼 짓이겼다. 지반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육편이 사방팔방 튀었다. 오목 파인 고랑에 핏물이 흘러들어 피 웅덩이가 생겼다.
퍼머쉬는 거신의 머리 위에서 그 처참한 광경을 관람했다. 느긋하게 팔짱을 낀 채로.
“그래, 너희 인간들은 이게 맞는 거야.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우리 마족의 손짓 한 번에 몸이 터져 나가는 천한 존재. 그것이 너희 인간이다, 천것들아. 이참에 주제를 알거라, 어?”
퍼머쉬는 어린아이의 그것이라곤 할 수 없는 길게 찢어진 미소를 걸었다.
“살아 나갈 녀석이 없으니 저승에서나 제 주제를 깨닫게 되겠구나. 그건 그거 나름대로 유쾌해.”
퍼머쉬는 생각했다. 인간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은 없다. 벌레에게 짜증 이상의 감정을 품어 뭣하겠는가? 군단장은 이런 자들이다. 시각부터가 다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한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인간들끼리도 마찬가지. 기득권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자의 생태를 이해 못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나저나.”
퍼머쉬는 주변을 넓게 휘둘러보았다. 전장은 아비규환인데 그 칼잡이 노인이 사라졌다.
‘그놈은 각성자다.’
이 정도로 뒈졌을 리가 없다. 수세기 전, 직접 상대해 봐서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검 강검마.
그 녀석의 존재가 계속 신경 쓰였다. 아까부터 보이지 않는다. 허공을 날던 회칼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퍼머쉬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천성이 방심하는 법이 없는 그녀이기에 쿠아른 님이 출전을 허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쿠아른 님이 엄청난 위험을 감당하면서 게이트를 열어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쿠아른 님께 총애받고 있어.”
그러니 그 기대를 배신하면 안 될 일이다.
‘쿠아른 님께 방해가 될 벌레 놈들을 모조리 도살하겠어.’
더불어 쿠아른 님께서 예의 주시하는 강검마를 업화의 고통 속에서 죽인다. 그분의, 오라버니의 관심은 자신만의 것이니까.
쐐액!
다짜고짜 내다 꽂히는 비습을 퍼머쉬가 고개를 젖혀 흘렸다. 사시미 한 자루가 발밑 어귀에 박혔다.
퍼머쉬가 홱 시선을 꺾자, 검을 타고 자신을 향해 질주하는 검제가 보였다. 그는 공중에서 사시미를 낚아채서 비수처럼 다시 투척했다.
퍼머쉬는 예상치 못한 기습에 잠깐 움찔했다. 그것도 잠시, 얼굴이 흉신 악살처럼 구겨졌다.
“날개를 달았다고 기고만장하구나.”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거신이 주먹의 궤도를 상단으로 틀었다.
“하지만 날개를 달았어도 벌레다.”
육중한 주먹이 구름을 두들기듯 몰아쳤다. 검제의 시야를 깎아 먹듯 날아오는 주먹 세례. 일일이 반격했다간 이쪽이 파리처럼 터져 나간다.
‘피한다.’
전부 피해서 접근한다. 자세를 낮춘 검제가 한 손으로 칼자루를 붙잡았다. 마치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그를 태운 직검은 매끄러운 검로를 그리며, 주먹과 주먹의 틈새를 비집었다.
이리저리 재주 좋게 피할수록 추진력이 더해졌다. 물살에 몸을 맡기듯이 기세를 탄 것이다.
검제는 백발을 치렁거리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와중, 그의 앞니가 주름진 입술을 파고들었다.
‘젠장.’
지상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못 본 척해야 했다. 두 눈을 정면에만 단단히 묶어 놓듯 고정했다. 저들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검마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더 나아가 조그마한 상처라도 낼 수 있다면.’
금세 거리를 좁혔다. 날렵하게 사시미를 던졌다. 그제야 새삼 강검마가 이 식칼을 고집하는 까닭을 깨달았다.
삼천 원짜리 다이쏘 사시미. 상상 이상으로 품질이 좋고 쓸 만했다. 즉, 가성비가 좋았다.
팅- 티디딩-!
퍼머쉬가 기관단총처럼 내쏜 자갈과 사시미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퍼머쉬가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날파리 새끼.”
이윽고 검제는 공세를 전부 흘리는 데 성공했다. 착지한 즉시 뒷발로 불상 머리를 밀어내듯 전진했다. 날카롭게 내지르는 검격.
“오냐.”
퍼머쉬는 손바닥을 펴서 자갈을 바닥에 흩뿌렸다. 놈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더니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토록 난타전을 원한다면 장단에 어울려 주지.”
돌 잔해들이 퍼머쉬의 팔뚝을 휘감았다. 순식간에 조형되는 건틀릿. 그녀는 도약을 위한 보법을 밟았다.
검제도 맞도약함과 동시에, 둘의 신형은 중앙에서 충돌했다.
-콰과광!
그야말로 눈 깜빡할 찰나. 둘 사이에서 무수한 공방이 오갔다. 불티와 파공음이 거신의 머리 위에서 명멸하길 반복했다.
퍼머쉬와 정면으로 맞서는 검제는 내심 놀랐다. 자갈질만 하던 놈의 무투가 훌륭하다는 것과, 군단장과 일대일 대결을 벌이고 있는 스스로에게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각성의 힘은 소모적이다. 거대한 힘을 주는 대가로 생명을 징수한다.
검제는 조바심을 애써 지워내고 차분하게 검을 휘둘렀다. “퉁” 검면으로 주먹을 튕겨낸다. “쉭” 검을 휘저어 급소만을 집요하게 노린다.
방어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싸움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전투의 양상은 서서히 검제 쪽으로 기울었다. 퍼머쉬가 부러 어울려 주는 것도 있거니와, 근접전에선 당해 낼 자가 없는 그였다. 거기에 생명을 연료로 가호를 각성했다.
움직임은 전성기 이상으로 가볍고, 검날은 시시각각 예리해졌다. 금안은 규칙성을 찾아내어 상대의 허점을 만들어 냈다.
결국 퍼머쉬의 뒷발이 앞 발목에 걸렸다. 노련한 검 놀림에 주먹과 발이 서로 엉킨 것이다.
검제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기함을 내질렀다.
“퍼머쉬, 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르게 생긴 년!”
새하얀 오러를 그러모아 검날에 입힌 다음, 우하단에서 좌상단으로 대각선으로 올려 쳤다.
후웅- 쾅!
가슴으로 검풍을 받아 낸 퍼머쉬는 거신의 머리 장식에 처박혔다. 검제는 호흡을 다듬곤 퍼머쉬를 퍼뜩 노려보았다.
원래 벽화 그림의 일부였다는 것처럼 각인된 모습. 고개를 떨구어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입은 제대로 보였다. 놈은 실실 쪼개고 있었다.
“…흐흐흐.”
웃음소리가 음산하다. 퍼머쉬는 전신을 비틀고는 벽면에서 걸어 나왔다. 툭툭, 여유롭게 치마를 털며 그녀가 말했다.
“내 인정하마. 지금의 너는 찰나이지만 검성의 경지에 도달했었다.”
뜬금없는 찬탄에 검제는 이마를 찌푸렸다. 놈의 치마는 해지고 찢겨 너덜너덜했다. 뺨에는 혈선이 꽤 그어져 있었다. 하지만 입가엔 미약한 쾌락이 번져 있었다.
퍼머쉬는 검제와 눈을 마주쳤다. 놈의 눈빛은 여전히 칙칙하게 죽어 있었다.
“다만 안타깝구나, 나이만 젊었어도 네 선조를 웃돌았을 것을.”
돌연 퍼머쉬가 손가락 세 개를 세워 보였다.
“네가 오늘 죽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각성자를 상대해 본 나를 만난 것. 둘째, 나를 오늘에서야 만난 것.”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말했다.
“셋째, 나를 만난 것.”
“별 같잖지도 않은 개소리를 거창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검제의 혐언에도 퍼머쉬는 킥킥거리고 말았다.
“너도 네 선조처럼 입이 걸었구나. 아론 니벨룽도 그 외모가 아깝게 말이 상당히 험했지. 재밌는 여인이었다.”
건조한 눈동자가 수백 년 전의 과거를 더듬었다. 퍼머쉬는 눈을 감았다 뜨고서 입을 열었다.
“그 검은 머리 애새끼가 어딨는지 말해라. 그리하면 경의를 표해 일격에 머리를 터뜨려 주마.”
“말할 것 같나?”
“아니.”
퍼머쉬가 피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해 본 말이었다.”
다음 순간, 퍼머쉬가 독수리 발톱처럼 열 손가락을 구부렸다. 세운 손톱을 허공에 걸었다.
이어지는 경악스러운 장면에 검제는 눈을 크게 떴다. 놈의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울렁거리는 공간의 질감이 보였기 때문이다.
“쌀통에 섞인 벌레를 솎아 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나?”
“……!”
당혹스러워하는 검제에게 퍼머쉬가 입꼬리를 올렸다.
“‘통’ 채로 뒤집는 것이다.”
퍼머쉬의 열 손가락이 허공을 할퀴었다. 무형의 커튼을 잡아끌 듯이.
「만트라( मन्त्र)」
◑
○
卍
●
◐
땅이 기울었다. 광오했던 하늘은 거꾸로 누웠다. 지평선은 태양을 집어삼켰다가 도로 뱉어 냈다.
예와 같은 요란한 굉음은 나지 않았다. 그저 우롱했다, 발바닥은 언제나 땅에 붙어 있다는 당연한 상식을.
흙을 붙들고 있던 자들은 하늘로 떨어졌다. 허공에 매달려 있던 자들은 반대로 땅에 처박혔다.
뒤집힌 세상에서 반듯하게 서 있는 건 소녀의 모습을 한 악마뿐.
“하하하!”
퍼머쉬는 위를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광소했다. 이채 없는 눈동자는 하늘인지 땅인지 모를 상층을 가득 담았다.
“…아, 아.”
가까스로 칼날을 바닥에 심었으나 검제는 칼자루에 매달린 신세였다. 여태까지 그는 절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떠한 강적을 상대로도 검 하나로 맞설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품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 사내의 신념은 하늘과 함께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세상을 희롱하는 저 악마를, 과연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비통과 절망이 검제를 잠식했다. 이 검자루를 놓게 되면 저 잿빛 구름에 잠기게 되겠지. 그렇게 그가 황망한 눈으로 검과 발아래를 번갈아 보던 순간이었다.
“……!”
상아색 날개를 퍼덕이며 쾌속으로 접근하는 인영들. 바닥에서, 구름에서, 하늘에서… 두 손에 각기 사시미를 쌍수로 쥐고서 퍼머쉬를 향해 솟구쳤다.
“저건 또…….”
그에 자약했던 퍼머쉬의 얼굴에 비로소 당황이 스쳤다. 전투 이래 처음으로 낭패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저벅.
발소리가 났다, 하늘에서 나는 건지 땅에서 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다만…….
저벅.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저벅.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