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5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58화(253/300)
258화 축복 (1)
회백색 석조 하늘과 새카만 태양을 찌르듯 세워진 제단과 같은 구조물. 그 정상에서 쿠아른은 팔걸이에 턱을 괸 채로 수하의 보고를 받았다.
“인간의 군세가 골렘들과 야전을 벌였으며, 퍼머쉬 님은 아론 니벨룽의 후손과 전면전을 치르시다가 결국 ‘그자’의 손에 당했답니다. 추가로 그자는 영웅 협회의 장과 손을 잡아 천사들을 종처럼 부렸다고 합니다.”
수하 하이 엘프는 감히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납작 엎드려서 들은 바를 상소했다.
보고를 전해 듣는 쿠아른은 보고받기 전이나 후나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무정물처럼 칙칙한 눈으로 삼라만상을 내려다볼 뿐.
하이 엘프는 땀을 뻘뻘 쏟아 냈다. 그녀에겐 이 보고 자체가 고역이었다. 4군단장의 전사. 더불어 쿠아른의 출신을 생각하면 ‘천사’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그자라.”
쿠아른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새하얀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백안에는 심연보다도 짙은 허무가 맴돌았다.
숨 막히는 적막이 휘몰길 잠시, 하이 엘프의 길쭉한 귀가 쫑긋 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하하하!”
검은 태양을 올려다보며 광소를 터뜨리는 쿠아른이 보였다. 새하얀 동공에서 진득한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쿠아른의 두 손이 뺨을 거칠게 벅벅 갉아 댔다. 살점이 손톱에 껍질처럼 떨어져 나왔다.
“…쿠, 쿠아른 님?”
하이 엘프는 헛숨을 들이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소리가 그쳤다. 쿠아른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
“……!”
하이 엘프는 흠칫 굳어 버렸다. 그녀는 뒤늦게 이마를 노면에 연신 쿵쿵 찍어 댔다.
“죄, 죄송합니다!”
쿠아른이 저벅저벅 다가와 발치에서 쭈그려 앉았다. 하이 엘프의 시야엔 희고 고운 두 발만이 보였다. 그녀는 기다란 발가락에 대고서 빌고 또 빌었다.
“너는 지금 내가 실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나?”
쿠아른이 무기질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하이 엘프는 이마를 찧은 채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 미천한 소저, 쿠아른 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아 일족의 영광으로 아뢰옵니다.”
“…….”
쿠아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그는 딱딱 이빨을 떠는 턱을 붙잡고는 창백한 낯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얼굴이 상했구나.”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보는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니 안 괜찮은 거다.”
쿠아른은 언행에 두서가 어긋나 있었다. 그는 그런 자였다. 저 머리 안에 무슨 모략을 꾸미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부디 목숨만은…….”
하이 엘프는 최대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럼에도 쿠아른의 얼굴이 망막에 서렸다. 흉터가 아로새겨진 입꼬리가 높게 치솟아 있었다.
“말해 보아라. 내 눈과 머리는 무슨 색이지.”
“설기보다 더 눈부신 순백이십니다.”
하이 엘프의 아첨에 쿠아른은 슬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 태양과 같이 거멓다.”
뭐라는 거지? 하이 엘프는 콧잔등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솟았다. 터진 이마에서부터 피 한 줄기가 콧날을 타고 쭉 흘러내렸다.
일단 그녀는 비실비실 웃어 보였다.
“마, 맞습니다. 쿠아른 님께선 저 공고한 태양처럼 찬란한 암흑이십니다.”
쿠아른은 검지로 그녀의 콧등을 슥 닦더니 입안에서 굴렸다.
“이 맛은.”
손가락을 쪽 빨아먹은 그가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하는 맛이로구나.”
“쿠아른 님… 커-헉!”
그 단말마의 비명이 유언이었다. 쿠아른이 그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하이 엘프의 명치께에 조막만 한 구슬이 생성되었다.
“네가 이 자리에서 죽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 나를 그분과 나란히 놓았다는 점이다. 더불어-”
쿠아른은 뼛조각을 튀기며 죽는 하이 엘프에게 싸늘하게 을러 댔다.
“그분을 존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능하신 그분이 네 친구더냐? 이 건방진 것아, 주제를 알라.”
꾸구구국.
“네 죄는 수억 번 고쳐 죽여야 마땅하나, 퍼머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한 점을 높게 샀다. 그러니 단숨에 죽는 것은 내 자비다.”
그러는 와중에도 하이 엘프는 구멍과 가까운 부위부터 나선형으로 꾸겨지듯 말려 들어갔다. 피부가 행주처럼 짜부라지고 뼈대가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하이 엘프는 최고위 마법을 시전해 저항하려 했다. 하나, 그마저 그 석유색 구슬이 마법째로 게걸스레 빨아먹었다.
잠시 후 하이 엘프가 머물던 자리엔 공허가 휘몰았다. 동심원을 그리며 파인 둥그런 고랑이 하이 엘프의 유일한 자취였다.
“그분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
쿠아른이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아카데미가 곧 방학이라지. 조카를 마경으로 불러내어라.”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옥좌 뒤에 뒷짐 지고 서 있던 마인이 끄덕였다. 그녀는 쿠아른의 보좌관이었다. 군단장들이 차례차례 서거한 현재, 게헤나 내 두 번째 서열이 되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겠구나.”
쿠아른은 까딱 턱짓하곤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조카, 레온 반 라인하르트.”
하늘의 중천에서 시커먼 태양이 기울었다. 검은 볕이 만들어 낸 아스라한 그림자가 덩어리처럼 약동했다.
* * *
호록.
학원장 메디아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곤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맞은편의 여인을 쳐다봤다. 자신과 똑 닮았기에 순간 거울을 보는 듯했다.
‘…근데 나랑 다르게 얼굴 폈네. 저거, 피부에서 윤 흐르는 것 봐.’
메디아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쌍둥이 언니 메아인은 소파에 거의 누운 자세로 밍기적거렸다.
“한숨 쉬면 빨리 늙는 거 몰라? 고대인이라도 피부 관리는 해야지. 안 그래도 학원장직 하면서 얼굴 많이 삭은 거 같은데.”
메디아는 어이가 없었다. ‘나태’라는 두 글자를 행위예술로 몸소 실천 중인 사람한테 들으니 더 기가 찼다.
“나한테 학원장직 떠넘긴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전·학·원·장·님? 아니면 이참에 언니가 다시 학원장 할래, 어?!”
메아인은 손을 내저었다.
“무리무리.”
메디아는 머릿속으로 참을 인(忍)을 세 번 그렸다. 저 키득거리는 낯에 주먹을 꽂아 주고 싶다는 충동과 맞섰다.
“난 월급 주는 사람보다 꼬박꼬박 월급 받는 게 좋더라. 그리고 솔직히 학원장직 하는 일에 비해서 박봉이잖아.”
“…….”
쉽지 않았다. 손에 쥔 찻잔이 파르르 진동했다. 찻잔 안에서 고요한 태풍이 회오리쳤다.
“교관직이랑 학원장이랑 월급 차이가 별로 없더라? 세금 떼고 하면 내가 더 많을 수도? 근데 가장 좋은 건 근무 환경이 세상 쾌적하다는 거! 나 쉬고 싶으면 애들 자습시키면 되고. 교관직 완전 월급 도둑이었어. 아, 당연히 학원장직에 비해서지만.”
메아인이 안경을 바로 쓰며 왼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내 이름은 메아인, 월급 루팡이죠.”
탐정을 가장한 연쇄 살인마의 야무진 패러디까지. 어릴 적부터 메아인은 동생 약 올리기의 도사 아니, 신선이었다.
“우리 월급 루팡께서 왜 퍼머쉬 토벌전에는 참전하지 않으셨을까, 요?”
메디아는 귀밑에 힘을 주어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면서 가장 상냥한 목소리를 짜냈다. 다만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야 가고 싶었지. 근데 천검이 따로 찾아와서 말하더라. 4군단장까지는 자기가 맡을 테니 천 클래스 애들 훈육에 집중해 달라고.”
“그래서 검마가 맡은 일은 잘하고 있나, 요? 못하고 있으면 확 잘라 버리고 다른 사람 앉혀야 해서, 요. 언니 말고도 일할 사람 많거든, 요.”
메아인은 흘끗 눈짓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보고서 거기 있잖아. 읽어 봐, 요요요.”
메디아는 즉시 보고서를 소상히 훑었다. 쌍꺼풀진 눈은 보고서를 자근자근 씹어먹을 기세로 불을 뿜었다.
“제발 하나만 걸려라, 하나만.”
민트색 눈동자가 상하좌우 빠르게 움직였다. 학원장직 수십 년. 자연스레 속독을 터득한 메디아였다.
“성적이랑… 개인 생활기록부… 개개인별 성격 유형.”
보고서는 항목별로 요모조모 잘 정리되어 있었다. 완벽하다. 그래서 더 얄밉다. 일이라도 못하면 면박을 줬을 텐데… 썅!
그러던 중 메디아는 한쪽 눈썹을 미묘하게 찡그렸다. 활자에서 시선을 거두고서 서류를 엎었다.
메디아가 물었다.
“레온 반 라인하르트. 얘 성장 속도가 너무 비약적인 거 아니야?”
메아인은 등받이 뒤로 젖혔던 머리를 천천히 내렸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겁게 끄덕거렸다.
“맞아. 용사인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빠르지.”
“검마랑 비교하면?”
“천검은 혼자서 군단장 셋을 토벌했잖아. 당연히 걔 무릎에도 못 미치지. 하지만.”
메아인의 상반신이 앞으로 쏠렸다. 그녀는 보고서 뒷면을 노크하듯 때렸다.
“잠재력만큼은 강검마에 결코 뒤지지않아. 타고난 거지, ‘그릇’ 면에서.”
“전에 검마한테 전해 들었어. 레온, 걔 네피림이라며. 언니도 알고 있었어?”
“짐작 정도만. 네피림의 존재 자체가 전설상에서만 나오는 거잖아. 그렇게 따지면 우리 고대인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어쨌건.”
포이즌 자매가 대화할수록 학원장실의 공기는 추워졌다. 홍차도 식어 향이 옅어졌다.
메디아는 다 식은 차를 들이켜 칼칼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다시 잔을 뜨끈하게 데우며 말했다.
“레온의 고향이 마경인 건 그렇다 쳐. 근데 걔 친부나 친모가 누구야. 마경 밥 헛먹은 건 아닐 테고, 언니는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 거잖아.”
“친모는 모르겠고, 친부는 대충 알 것 같아.”
메아인도 자신의 잔을 채웠다. 찻잔을 입술에 붙인 채로 그녀가 말했다.
“너 신화시대 때 타천(墮天)한 천사들 알지?”
“어렸을 때부터 아빠한테 종종 들어서 알지.”
포이즌가(家)는 천사들에게 학살당했던 고대인의 후손이었다. 현생 인류 중 그들은 신화와 가장 밀접했다. 그렇기에 금단의 역사를 잘 알았다.
“천상의 대리인이었던 천사들. 개중에서 가장 찬란했던 천사들이 집단을 만들었어. 그게 그레고리(Grigori)야. 아빠한테 들어 본 적 있지?”
언니의 질문에 동생은 주억였다.
“응. 들어 봤어.”
“그레고리의 목적은 천상의 복음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는 거였어. 속된 말로 따까리였지. 근데 힘이 많이 센. 하지만 이걸 웬걸. 그런 그레고리가 천상을 배신해 버렸네? 그들의 필두가 아자젤. 지금 마경에서 수장 노릇을 하는 쿠아른의 옛 이름이고.”
“전에 검마한테 들은 적 있어. 네피림 신전 갔다가 우연히 들었다고.”
“쿠아른이 왜 거기서 신관 노릇을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쿠아른 외에도 사마엘, 루키펠, 산달폰 등등……. 아무튼 천사 중에서도 최강급 놈들의 주동 아래 반란을 꾀했어. 요컨대 신들을 향한 쿠데타를 일으킨 거지. 명분이 뭐인지는 불분명해. 사실 구체적으로 따지는 게 우습지. 단어 그대로 신화니까.”
메아인은 차로 입술을 축이곤 달그락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눈빛을 차분히 가라앉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레고리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어. 그것도 완전한 실패로.”
“명분은 모른다면서 결과는 어떻게 알아?”
“금방 말했잖아. 쿠아른이 아자젤이었다고. 반란에 성공했으면 걔가 마경에서 그렇게 웅크리고 있겠어? 뿐만이야? 쿠아른이 그러고 있는 이유는 걔 빼고 그레고리는 사실상 전멸해서야. 그것도 신들이 내세운 단 한 천사에 의해서.”
“천사 하나가 전부를 상대했다고? 그게 가능해?”
메아인이 피식 웃었다.
“왜? 무한에 가까운 신들도 한 존재에 의해서 사실상 멸족해 버렸잖아. 그레고리도 같은 수순을 밟은 거지, 뭐. 그 안에서 가장 강했던 쿠아른만 그나마 호각으로 싸웠다지만, 졌다는 건 변함없지.”
“그래서… 그 천사는 뭐고, 그게 레온의 출생이랑 무슨 상관인데?”
“어우, 얘 재촉 좀 하지 마. 넌 궁금한 게 생기면 예전부터 참을성이 없어.”
“알았어…….”
메디아는 시무룩해졌다. 메아인은 그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36장의 날개, 쿠아른의 형제, 모든 천사의 으뜸이었던 신의 사도의 이름은 메타트론(מטטרון).”
잠깐 뜸을 들인 메아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메타트론의 피붙이, 그게 레온이야.”
* * *
료조와 아벨이 동시에 나를 쏘아붙인다.
““나야, 얘야. 정해.””
같은 대사, 성난 도끼눈, 삐죽이는 입술. 거기에 사이좋게 서로 볼을 딱 붙이고서는 날카로운 시선 처리까지 단결했다. 짜고 쳐도 이렇겐 못 할 것 같다.
하여튼.
…퇴원하자마자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사건의 발단은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