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5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59화(254/300)
259화 축복 (2)
퇴원 하루 전날.
보안상의 이유로 친인척(?) 외 출입 금지였던 병실을 개방했다. 내가 허락한 인원들 한에서.
단순한 이유였다. 홀로 창밖만 보고 있는 게 너무 고역이었다.
초겨울의 잎새가 두어 개 떨어질 즈음 내가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더라고.
뭐랄까, 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이쪽이 눈을 감아 줘야 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몸은 거의 완치된 시점이었다. 그러니 방범·보안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간덩이가 수박만 하지 않고서야 누가 내 병실에 침입하겠는가.
병문안 온 침입자에게는 다이쏘 사시미를 듬뿍 선물해 줄 생각이다.
어쨌건.
그리하여 적막했던 병실은 순식간에 야단법석해졌다. 천 클래스 애들이 우르르 몰려왔기 때문이다.
웨폰과 클로이가 오전반, 레이첼과 혼테일이 오후반. 이렇게 두 명씩 짝지어서 병실을 방문했다.
“이야아아아-! 수고했다, 천마!”
솔직히 말해서 웨폰에서 살짝 후회심이 들었다. 녀석은 약장수가 봇짐 풀 듯이 말을 쏟아 내는데, 순간 정신과 고막이 아찔했다.
“…수고하셨어요.”
클로이가 비교적 조용했다. 그녀는 구석에서 훌쩍거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웨폰은 팬 사이트와 포털 등지를 보여 주면서 나에 대한 소식을 쉼 없이 보도했다.
나는 귀찮아서 확인 안 하고 있던 터라 라디오 삼아 가만 들었다.
“검마, 네 팬 사이트 회원 수는 이미 2억을 돌파했어! 이것만으로도 네 영향력은 웬만한 국사 수장들 열 명 이상이고, 또 이 기사도 봐 봐. ‘천검에서 천마로. 그를 추앙하는 신봉자는 갈수록 늘어’. 너를 숭배하는 종교까지 창설될 정도라니까?”
어떻게 종교 이름이 천마신교(天魔神敎)…….
마족이 떡하니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굉장히 위험하고, 괴이한 단체명이었다.
지구였다면 몰매 맞기 딱 좋은 종교다. 이 세계가 그나마 종교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해 줘서 다행이지.
사이비도 이런 사이비가 또 없다.
영웅 숭배.
웨폰은 이런 현상은 그렇게까지 흔치도, 드물지도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이 전멸당한 세계관이라 다들 신앙심이 깊진 않다고.
종교 중에서 세가 가장 거대한 게 외신교라는 단체인데, 여기는 밀교적 성향이 강해서 노출을 극구 꺼린단다.
참고로 여기서 그 유세인이 (파계) 성녀직을 수행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거기도 썩 믿음직한 종교는 아니군.’
종교는 율법의 가부를 떠나서 이미지가 중요한 법이다.
이처럼.
유세인이 성녀라는 부분에서 신뢰가 팍팍 깎이는데, 나를 교주로 떠받드는 종교는 웬 말인가.
한숨이 나온다.
‘그래도 교내 기사단만으로 S급 마수를 토벌할 정도면.’
외신교의 위상이 마냥 삿되진 않았다는 거겠지. 꽁으로 마석을 얻었다고 긍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다.
그건 너무 속물 마인드잖아. 내가 암만 K-게이머라도 그렇지.
“…….”
아무튼 그렇다.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운 웨폰과 클로이를 뒤로.
오후반 레이첼과 혼테일이 약소한 선물(한우 세트)을 싸 들고 와서 퇴원을 축하했다.
‘생각지도 못한 조합인데.’
내색은 안 했지만 둘의 방문에 조금 놀랐다.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여서였다.
듣자 하니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레이첼이 혼테일의 아카데미 적응을 많이 도와준 모양이었다.
물론 레이첼은 혼테일이 드래곤이란 걸 전혀 모르겠지만.
미소가 절로 입가에 배었다.
한편으론 궁금했다.
어떻게 둘은 종족을 추월한 우정을 다졌을까? 같은 인간끼리도 유대감을 형성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풀떼기는 근성장의 수치! 심기체의 근간은 고기로부터!”
혼테일이 팔을 번쩍 들었다.
“인간의 육체는 수분과 단백질만 있으면 충분해! 채소를 먹을 바엔 그냥 굶는다! 야수의 심장은 고기로부터!”
옆에서 레이첼이 팔짱을 끼고서 대견스레 끄덕거렸다.
“옳소!”
다시 생각해 보니 별로 안 궁금하다.
‘…혼.’
나는 측은한 눈으로 혼테일을 바라보았다.
초면엔 빵만 줘도 배시시 웃던 애가 어쩌다 이리 타락했을꼬. 근데 마인한테 타락이란 말을 쓰기도 참, 애매하다.
‘최설아가 알아서 교육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제 지갑이 거덜이 날 테니. 구멍 난 통장을 틀어막기 위해서라도 교육이 시급해 보였다.
‘좋네, 그래도.’
병원은 내게 좋은 시설은 아니다. 산자와 망자가 들락날락하는 개찰구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병원이 시끌시끌하다. 죽음의 냄새는 옅어지고 활기가 가득 찼다. VIP 병실이니 민폐를 끼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오전반과 오후반이 병실을 휩쓴 후에 밤이 되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퇴원에 앞서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월광도 듬뿍 쬐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렸다. 저녁반, 아벨과 료조가 들어온 것이었다.
“왔어?”
오전, 오후반에 이어 저녁반. 나는 익숙하게 그녀들을 맞이했다.
내가 반기자, 아벨과 료조는 쭈뼛쭈뼛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분위기가 묘했다. 나를 불편해한다기보단 둘 사이가 몹시 서먹서먹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먼저 들어온 료조가 물었다. 아벨은 스르륵- 조심스레 문을 닫곤 뒤이었다.
“할아버지한테 들었어. 퍼머쉬 토벌 후에 바로 기절했다며. 어디 많이 다치거나 그랬어?”
“나야 이런 일 으레 겪잖아.”
나는 베개를 이불 위로 쌓으며 대답했다.
“반 배정 시험에서도, 중간고사에서도, 기말고사에서도 그렇고. 내 가호는 발현하고 일정 시간을 초과하면 보유자를 졸도시켜 버리거든.”
내 말을 들은 아벨과 료조는 순간 벙찐 표정이 되었다.
암묵적으로 이 세계에선 자신의 가호에 대해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약점을 본인 입으로 까발리는 멍청한 짓을 굳이 왜?
주적은 마족일지라도 내부에도 적은 있다.
뱃속에 칼을 품고 언제든 꺼내 들 자들이 산재한다.
귀족 사회에서 어제의 지인이 내일의 적으로 돌변해 흉금을 드러내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다.
따라서 가호의 능력이나 제약을 서로 묻지 않는다.
털어놓는 건 매우 가까운 사이- 가족, 배우자 혹은 약혼자 정도뿐.
많이 양보해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친구. 거기까지가 마지노선이다.
한데 내가 대수롭지 않게 가호의 제약을 흘렸으니, 저 반응들이 예사는 아니다.
그러나 ‘기적의 가호 M’의 게이머였던 나다.
아벨 폰 니벨룽, 사키 료죠.
둘의 성품이 어떤지 그 내밀함까지 낱낱이 아는 이는 거의 없을 터.
‘있다고 해도 자신을 ‘환생자’라 밝힌 유세인 정도.’
유세인이 어떤 경위로 이 세계로 온 건지 모르는 지금으로선 나 외엔 없다고 봐도 된다.
비단 료죠와 아벨 둘만이 아니라 오늘 병문안 온 애들 전부, 고명한 성품이다.
인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 희생 정신은 여간해선 불가능할 테니까.
그래서 말해 줬다.
“그렇게까지 놀라니까 말한 사람이 다 민망하네.”
이들을 신뢰하기에 나에 대해 조금은 알려 주고 싶었다.
내가 ‘빙의자’란 사실은 가슴 깊이 묻어 둬야겠지만, 약점을 드러낼 테니 그만큼 나를 믿어 달라.
그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
료죠와 아벨이 서로를 말없이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홱 내게로 고개를 틀었다.
각자 하늘과 달을 담은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얘… 들아.”
이마에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설마 그 한마디를 두 사람이 다르게 받아들일지는…….
정말, 정말이지 몰랐다.
그저 태생이 이곳이 아닌 내 안일함을 탓할 수밖에.
* * *
“푸하하하하!”
내 사정을 들은 호아킨 아카데미의 야장 뷜란트는 배를 잡고 자지러졌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의 눈가에 눈물방울도 찔끔 맺혔다.
나는 그런 뷜란트를 심드렁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뷜란트가 엄지로 눈가를 훔치며 물었다. 입가엔 웃음기가 여전했다.
“그래서 여자 둘한테 그 말을 한 다음에 대답을 못 하겠으니까. 여기로 도망 온 거냐, 천검 양반?”
“사람이 곤란한 게 그렇게 웃을 일입니까? 저 진짜 아까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고요. 걔들 눈빛이 사람을 그냥.”
뷜란트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려 나를 꾸짖었다.
“예끼, 욘석아! 네가 걔네한테 무슨 말을 한 건진 아느냐?!”
“제가 뭐요. 그냥 입원한 이유에 대해서 조금 알려 줬을 뿐인데.”
“어우, 이 세상물정 어두운 놈.”
뷜란트는 누리끼리한 막걸릿잔을 휘휘 저으며 벌컥벌컥 마셨다. 후- 술 냄새 나는 입김을 뿜고는 말을 이었다.
“천검 나리, 네가 게네들한테 한 말은 사실상 청혼이나 다름없어. 가장 무르게 해석한 게 연애 정도지.”
“제가 한 말이 그 정돕니까?”
뷜란트는 잔을 의자 귀퉁이에 부딪혀 탁탁 털었다.
“여자애들 둘 다 귀족 출신이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니벨룽이랑 사키 이렇게.”
“니벨룽이면 검성 아론 니벨룽의 후예요, 사키면 명궁(明弓) 사키 요이치의 후예잖아. 거물급 중에서도 초거물 집안의 여식들이네.”
뷜란트는 장탄식을 터뜨렸다. 그가 자세를 바로 하곤 검지를 세워 강조했다.
“잘 들어라. 너는 얼마 전까지 평민이었기에 모르겠지만, 귀족 사회엔 귀족 나름의 예법이 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밥 한번 먹자’ 같은 말도 귀족들은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 소리야. 여기까지 알아들었어?”
“예.”
“그중에서도 귀족은 그들의 가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가장 조심스럽게 여긴다. 가문의 뿌리이자 근간이니까. 그렇기에 가호 관련 예법과 교육을 확실히 받아.”
“…그렇군요.”
혼에게 교육 운운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 코가 석 자였다.
“자, 여기서. 그런 귀족 여식들에게 ‘나의 가호는 이러이러해서 이렇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치자. 걔네가 어떻게 해석할지는 불 보듯 뻔한 거 아니냐?”
“거기까진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반박에 나섰다.
“근데 게네들이 그렇게 귀족 사회에 절여진 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워요. 그래서 더 당황스러운 겁니다. 평상시엔 그런 거 전혀 없던 애들이 갑자기 낯빛 싹 바꿔서 추궁하니까. 뭐라 했더라… 좀 있을 축일 무도회에서 파트너를 딱 정하라던데. 이것도 너무 낯설고요.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천검, 아니 강검마.”
뷜란트가 협탁에 양푼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의 감정을 논리로 분석하려 들지 마.”
웃음기 지운 엄한 얼굴로 그가 말했다.
“그 애들이 몰라서 너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 알고서도, 자존심 다 내려놓고 한 말일 거다. 네가 항상 애매하게 나오니까 참다 참다 그렇게 나온 거지.”
“…….”
“그 마음에 네가 ‘뭔가 있을 거다’라고 하는 말들. 게네의 진심을 난도질하는 거야. 상대가 자존심도 버리고 진심으로 나오면 진심으로 화답하는 게 사람 된 도리다.”
그리 말하던 도중 뷜란트는 고개를 살살 털었다. 양푼 잔을 저 멀리 치운 그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술기운이 돌았나. 애한테 괜히 진지해져서 말했네. 여튼 내 말은 이거다. 숙녀분들한테 실례되는 행동하지 말라는 거. 네가 여자 보는 데 까막눈인 건 알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라는 거다.”
나는 뷜란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아저씨.”
“뭠마.”
“왜 독신이에요?”
계피 색 관자놀이에 십자 혈관이 솟았다. 뷜란트의 손이 망치를 잡으려다가 이내 막걸릿잔으로 향했다.
“됐다 됐어. 저기 네가 맡겨 둔 무장 강화해 뒀으니까, 그거 들고 그만 가라. 너랑 있으니까 나도 감정이 말라 가는 거 같으니까.”
“아.”
내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으로 이어졌다. 이에 뷜란트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끌끌거렸다.
“강하기만 하면 뭐 하나, 인간이 덜됐는데.”
오늘따라 술맛이 쓴지 갈매기 눈썹을 과하게 찡그리는 대장장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