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6화(26/300)
26화 준비 (1)
비강을 찌르는 꿉꿉한 약 냄새에 눈이 저절로 뜨였다.
눈을 뜨자 보인 건 낯선 천장이었다. 고개를 살짝 틀자 오른 팔뚝에 깊게 찔린 링거 바늘, 순면의 고풍 진 커튼이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병원인가.’
나는 찌릿한 가슴께를 쓸어내리며 간신히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문득, 시선을 천천히 돌려 실내를 둘러봤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처음 입학했던 병실과는 달리 매우 고급스럽고 세련된 인테리어. 먼젓번에 봤던 녹스의 병실과 유사했다.
‘호아킨 아카데미 부속 병원 VIP 병실.’
대리석처럼 번쩍거리는 흰색 가구들에서는 돈냄새가 진동했다. 기억하기로는 VIP 병동은 귀족들 전용일 터다. 나는 턱을 긁적이고서 두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다시 등을 침대에 파묻었다.
그런 세속적인 부분까지 일일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VIP 병실에 입원하게 된 경위야 어찌 됐든 일단 살아 있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설마 나중에 가서 병원비를 청구하려나?’
나는 머리를 흔들어 걱정을 털었다. 아무리 물가가 야박하기 그지없는 아카데미라지만 그 정도로 비인도적이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만약에 정말로 청구한다면 야반도주라도 해야 하나.
나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 보다 문득 한쪽 팔을 쭉 뻗어 손을 펴 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비추는 병실의 조명.
새삼스럽게 손을 쫙 폈다가 움켜 쥐어도 본다. 왠지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을 펴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도장처럼 찍혔다.
‘살아 있네.’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의도치 않게 죽을 뻔했던 상황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을 해프닝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을 정도다. 마인 머메이드가 다루던 마법에 비하면 아디토레의 천재, 녹스의 칼 놀림마저 어린아이의 투정 섞인 재롱처럼 느껴졌다.
‘마인…….’
서걱서걱하게 썰리던 피부, 가르는 맛이 뻑뻑한 살점. 뼈가 끊기는 감각도 인간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무엇보다 머메이드가 죽기 전 쏘아 내던 마구(魔球). 스산하게 마력을 뿜어 대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나는 그 상황에서도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동그란 파란 구체에 아로새겨진 붉은 선이 보였기에. 몸에 뜨거운 피가 돌고 근육이 부푸는 게 느껴졌다.
육감이란 게 그런 것일까. 나는 본능적으로 사시미를 뻗었고, 칼날이 그 선을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동그랬던 것은 두 동강이 나 물풍선처럼 터졌고, 마법은 일순 소나기로 바뀌었다.
분명 물이었다. 그러나 잘리는 맛이 손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 감각은 뭐였을까.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명경지수에 잔물결이 일은 듯한 기분이다.
그 외엔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검신의 가호를 발현한 후로는 형용하기 힘든 감각투성이다.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헤집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몸체만 슬쩍 올린 뒤, 반쯤 누운 자세로 상태창을 열었다.
파앗―
== ==
[검신(劍神)의 가호]베면 잘릴 것입니다.
◎육신(肉身)의 격 : 7 ▷ 검(劍)의 규격이 완화됩니다.
◎정신(精神)의 격 : (3▶4) ▷ 말과 행동에 위압감이 깃듭니다.
◎무장(武裝)의 격 : 1 ▷ 해금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동화율 : 6.8▶7.2% ▷ 【NEW! 해금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 길이 36센티 이하, 폭 9센티 미만의 검일 때만 가호가 발동됩니다.]== ==
한 단계 상승한 정신의 격. 가호를 발현했을 당시 들렸던 ‘기개를 발휘하여 정신의 격이 상승합니다.’라는 기계적인 음성이 기억났다.
추측이지만 처음 마인을 봤는데도 지레 겁부터 먹지 않고 덤벼들었던 건 이 정신의 격이란 능력치 덕이지 않을까. 그 덕에 몸은 굳지 않고 운신의 자유를 얻은 거지 싶다.
별 쓸모없는 능력치라 생각했었는데, 위급 상황에서 가장 쓸모 있을 줄이야.
용감과 치기는 한 끗 차이라지만 그때 나마저 조원들처럼 캐스터네츠처럼 몸을 떨어 댔으면 사이좋게 황천행이었을 터다.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멋쩍게 뺨을 긁다 시선을 아래 두었다.
‘드디어.’
망막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 문구. 어느새 해금 조건이었던 7퍼센트를 돌파해 해금 조건이 충족된 동화율.
개인적으로 ‘검신의 가호’에서 아래 물음표 다음으로 궁금했던 수치였다.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설렘이 일었다. 나는 검지를 뻗어 그 문구를 두드렸다.
파앗―
== ==
☆동화율 : 7.2% ▷ 【???】의 선(線) (1) 줄이 읽어집니다.
[동화율 15% 달성 시 다음 해금 조건이 충족됩니다.]== ==
‘선이 한 줄 보인다.’
문구 자체의 의미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머메이드의 마법에 그려져 있던 붉은 선. 그것 말고는 없을 테니까.
…근데 중요한 건.
‘아니, 대체 【???】이 뭔데?’
그간 속을 간지럽혔던 의문의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더 모르게 됐다. 마치 정보를 의도하고 숨기기라도 하듯이.
손가락 틈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미꾸라지처럼 떡밥만을 던져 댄다.
아마 동화율 아래에 있는 물음표들과 같은 개념 같은데. 띠껍게 물음표 세 개라 쉽사리 정보를 유추할 수조차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하아…….”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렀다. 나는 가슴을 크게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눈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차다. 괜히 감정을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었다.
그래도 좋게 좋게 생각해 보자면 한 가지 건진 건 있다. 괄호에 싸여 있는 ‘1’이라는 숫자. 동화율 수치가 오를수록 그 수도 오르리라.
이곳, ‘기적의 가호 M’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게임이었기에 통상적으로는 그럴 것이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속 시원히 무슨 무슨 선이라 정의해 준다면 속 편하겠지만, 누군가 윤곽 없는 퍼즐 조각들을 던져 주고 맞춰 보라는 식으로 장난질을 치는 기분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를 이 세계에 내던진 파렴치한 새끼겠지.
나는 짧게 코웃음 친 후, 무정하게 상태창을 닫아 버렸다. 손을 깍지 끼고 팔을 쭉쭉 늘리자 시원한 뼈 소리가 울렸다.
똑, 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문이 옆으로 밀렸다.
“검마야! 일어났구나!”
“……!”
동시에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메디아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우리 검마, 혹여라도 잘못됐으면 내가 사전 답사 했다던 교관들 콱- 씨, 전부 해고해 버리려고 했거든! 정신을 차려서 정말 다행이야, 검마야.”
메디아는 못해도 20년은 못 본 사이처럼 목소리를 울먹거리며 말했다.
“캑, 학원장님, 수, 숨이.”
“에고, 미안. 너무 기뻐서.”
메디아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사과했다. 나는 멋쩍은 헛기침을 뱉고서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
병실 너머에서 또 한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철제문으로 가로막혀 있어도 흘러넘치는 위압감이 숨겨지지 않는다.
내가 문 쪽을 말없이 응시하자 메디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문 쪽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야, 틀딱! 다 큰 어른이 낯 가리냐!? 소개팅해? 빨리 들어와!”
“메디아, 그렇게 부르지 좀 말라고 매번 말하지 않나.”
검제 지크프리트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메디아의 옆에 서서 절도 있게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봤다.
묘하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광경.
입학식 날 입원하고 나서 첫 병문안 왔던 사람들도 학원장과 검제였다.
일개 아카데미 생도 한 명이 입원할 때마다 칠성 영웅 중 두 명이 출두하는 게 나로서는 퍽 부담스러웠다.
“학원장님이랑 검제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떨떠름하게 말을 떼자 메디아는 방긋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조원한테 이야기는 다 들었어. 우리 검마, 너무 대단해.”
메디아가 조곤하게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더니 침대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곧이어 그녀는 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검제도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 모습에 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아킨 아카데미를 대표해서 사과할게. 이번 중간고사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전부 우리 아카데미 측의 과실이야. 그 때문에 검마와 네 조원, 아니 하마터면 스코풀리 섬에 있었던 아카데미 1학년 생도 전원의 목숨이 위험했던 상황이었어. 이번 마인의 출몰은 나, 메디아 포이즌이 호아킨 아카데미 학원장의 명예를 걸고 이유를 밝힐 것을 맹세할게.”
그들로서 핏덩이에 불과할 내게 허리를 숙이는 메디아의 행동은 그 누구보다 어른스러워 보였다. 검제가 결연한 표정으로 첨언했다.
“자네가 생도들을 살렸네.”
인류의 희망이라 일컫는 칠성(七聖) 영웅.
메디아와 지크프리트만 봐도 그들이 왜 희망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다. 언행에는 고결한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할 수 있었기에 했을 뿐입니다.”
뻘쭘한 마음에 나는 코밑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자 메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는 방금보다 옅게 상기됐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얼굴에 침울함이 감돌았다. 메디아는 내 옆에 살포시 자리하고선 머뭇거리다 입술을 움직였다.
“검마, 네 행적은 너무나도 대단하지만… 이번 사건은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당분간은 비밀에 부쳐야 할 것 같아. 학원장인 내가 말하는 게 웃기지만, 이번 일은 아카데미 내의 문제인 것 같거든. 정말 미안해, 검마야. 더 챙겨 줘도 모자랄 판에.”
확실히 사전 답사를 끝마쳤다던 섬에서 불시에 마인의 튀어나온 상황이다. 현재까지의 정황으로는 그리 판단하는 게 옳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딱히 영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솔직히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기에 그녀가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검마, 너도 참. 어린애가 어리광도 부리고 좀 그래라.”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메디아.
“아, 맞다!”
그러더니 무엇이 생각난 듯 크게 손뼉을 치며 로브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옛적에 동네 할머니들이 들고 다니던 똑딱이 동전 지갑이다.
‘나이는 못 속이는 건가.’
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자, 메디아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녀는 히스테리가 다분한 뾰족한 어조로 말했다.
“검마, 너 속으로 지금 나 나이 들어 보인다 생각했지!!”
…어떻게 안 거지?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여자, 독심술이라도 쓰는 것 같다. 메디아는 여자의 감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은 한다지만.
그녀 앞에선 말조심뿐 아니라 생각도 함부로 하면 안 될 것이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하자 메디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선 콧소리를 냈다.
“검마, 네가 무슨 상상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이건 아공간 주머니야.”
“그게요!?”
“뭐야, 아공간 주머니를 알아?”
“네, 뭐.”
아공간 주머니.
부피, 질량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아이템. 게임 플레이 당시에도 경매장에서 최고가에서 거래되었던 만능템이다.
…근데 저것도 성능과는 별개로 스피드 웨폰의 리코더처럼 모양새가 많이 빠졌다.
메디아는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러더니 쭉 하고 길쭉한 쇠붙이가 그녀의 손에 딸려 나왔다. 기세를 탄 메디아가 기분 좋게 그것을 쭉 뽑아 들었다.
메디아의 손에 들린 것은 외날 검이었다.
칼자루를 돌돌 말은 때가 탄 허름한 노끈. 칼날에 수놓아진 담금질의 흔적이 비구름처럼 흐르고 있었다.
B급 무장. 이슬을 머금은 검, 무라사메(叢雨).
“원래라면 공식적으로 줘야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사적으로 주게 됐네. 검마,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메디아가 검을 내게 건넸다. 나는 숨을 집어삼키며 칼을 받아 들었다. 손에 감기는 투박한 칼자루의 감촉. 나는 손끝으로 칼날을 쓸어내렸다.
키리링.
소슬한 검명이 귀울림처럼 귓전에서 번졌다.
‘근데…….’
새로운 무장에 분명 기분은 들떴지만, 뭔가 좀 부족한 기분이다.
어째 속이 답답하고 근질거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메디아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혹시 이거 대장간에 맡겨도 되나요?”
“어, 가능은 한데 왜?”
아리송하게 묻는 메디아. 나는 싱긋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서, 작게 읊조렸다.
“무장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