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60)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61화(256/300)
261화 축복 (4)
“녹스.”
내 부름에 녹스는 창틀에 쭈그려 앉은 채로 고개만 뒤로 돌렸다. 녀석이 복면을 콧등까지 끌어 쓰며 대답했다.
“예, 천검님.”
한순간에 변조된 목소리. 좀도둑처럼 보이는 저 흑의(黑衣)의 기능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저것도 무장의 일종인가 보네.’
나는 이마를 긁적거리다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아까 말했잖아. 인간의 마음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고. 그건 아디토레식 암살자 교육의 산물이지?”
“예.”
녹스가 복면을 주억였다. 나는 추가로 질문을 던졌다.
“억울하거나 그러진 않아?”
“어떤 게 말씀이시죠?”
녹스는 아리송하단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이마를 긁던 손으로 곧장 뒷머리를 헝클었다.
‘아, 씨. 괜히 말했나.’
전·현생을 통틀어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게 처음이라서 어색하고 생경했다. 더구나 녀석의 가정사까지 건드는 것 같아서 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말을 꺼냈으니 뭐라도 뱉는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써는 게 칼잡이의 도리다.
“암살자로 안 태어났으면 다른 또래 애들처럼 친목도 다지고. 그… 뭐야, 연애도 하고 그럴 거 아니야. 그런 점에서 억울하진 않냐 이 말이야.”
“음.”
내 말에 녹스는 잠깐 그 자세로 팔짱을 끼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진지하게 물으시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대 애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녹스는 눈을 들어 나를 응시했다.
“그러나 제 처지가 억울하거나 그들이 부럽거나 하진 않습니다.”
“어째서?”
“제가 해 왔고, 해 나갈 일들을 수월히 하려면 감정은 걸림돌이 되어 버립니다. 혹여 암살 대상이 지인이더라도 망설임 없이 칼을 내지르는 것. 이를 위해서 저희 아디토레는 평생에 걸쳐 감정을 깎아 내고 또 깎아 냅니다. 이 모든 것은 인류를 위해서, 후세에게 더 나은 현재를 물려주기 위해서.”
이 순간 나는 보았다. 혈광만 번들거리던 녀석의 눈에서 미약한 이채가 발하는 것을.
“그러한 긍지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감정이 사라져도 스스로가 부족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이 제 위치에선 최선이자 최적이라고. 그렇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요는 이렇다. 암살자로서 긍지가 감정의 결핍을 대체했다. 그러니 아쉽거나 불만은 전혀 없다.
‘긍지라.’
이 단어를 속으로 굴려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전 생에서 갖은 풍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회칼을 놓지 않았던 이유가 저 두 글자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내 전생도 녹스처럼 많은 걸 포기한 삶이었다.
일반적인 교우관계, 여가, 연애, 결혼. 으레 인간다운 삶의 구성 요소를 배제하고서 사시미 하나만 보고 살았다. 열일곱 살 때부터 줄곧.
그런데도 불행하다는 생각은 사시미의 신께 맹세컨대 터럭만큼도 들지 않았다.
나날이 발전하는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끼며, 사시미의 깊은 묘리에 점차 빠져들었다.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의지. 그것은 얼마 안 지나 긍지가 되어 가슴에 새겨졌다.
일상을 도외시한 성취는 크고 달았다.
‘전국 제일의 칼잡이.’
길거리나 전전하던 비렁뱅이는 그렇게 전국 제일이라 불리게 된다. 누릴 거 다 누리고, 즐길 걸 다 즐겼다면 이루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천검님……?”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녹스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녀석은 복면을 슬쩍 다시 벗고는 창틀에서도 내려왔다.
‘상사의 침묵은 부하한텐 죽을 맛이라더니.’
꿀꺽 침을 삼키며 내 말을 기다리는 녀석에게 작게 미소 지었다.
“여러모로 고맙다. 네 덕분에 막힌 혈이 좀 뚫린 기분이야.”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을까. 핏빛 홍안이 두어 배쯤 크게 열렸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녹스는 반문하지 않았다. 뭐가 고맙다는 건지 모를 일이나 천검님의 표정이 풀렸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조용히 복면을 올리곤 도로 창틀로 다가갔다.
“천검님.”
녹스는 등을 돌린 채로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목숨을 걸고 인류의 거악과 맞서 주셔서. 또…….”
…암살 기계였던 제게 초밥집에서 일할 기회를 주셔서, 그리고 무엇보다 여동생에게 인간다움을 알려 주셔서.
녹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삼켰다.
“아디토레는 천검님을 물심양면 도울 것입니다.”
대신 다른 진심을 전하고서 훌쩍 창틀을 뛰어내렸다. 밤의 어둠에 녹아든 암살자는 금세 기척을 지웠다.
나는 물끄러미 그가 떠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나뭇가지를 밟고 이동하는지 삭정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뜨문뜨문 들려왔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왜 창문은 안 닫고 다니지?”
설레설레 머리를 젓고는 나는 창문을 닫았다. 창문의 걸쇠를 이중 삼중으로 보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 * *
한파가 들이닥친 12월의 어느 날.
엄동설한에도 호아킨 아카데미는 생도들로 복작거렸다. 부지 곳곳에선 번쩍거리는 오색찬란한 조명들이 청춘의 현장을 장식했다.
7걸 축일.
한 해를 마무리 짓는 가장 성대한 이벤트. 지구로 이를테면 크리스마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영락없는 성탄절이었다.
의상실 안.
“어머, 천검님! 너-무 잘 어울리신다!”
똑 부러지는 인상의 스타일리스트가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탄식했다. 립스틱을 듬뿍 바른 그녀의 입술은 뇌쇄적인 홍색이었다.
“기럭지가 훤칠하셔서 그런지 맵시가 확 사시네요! 조금 마른 편이셔서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
나는 그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전방에 거치된 전신 거울을 봤다. 맹한 표정으로 턱시도를 입고 있는 내 모습. 나비넥타이가 목줄처럼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낯빛이 피가 안 통하는 양 화끈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쪽팔려서였다.
“연미복까진 그러려니 하는데, 평범한 넥타이로는 안 됩니까?”
“아니 될 일입니다.”
단호한 거절. 스타일리스트는 샐쭉하게 치솟은 안경테를 추켜올렸다.
“천검님은 근래 들어 가장 영향력이 크신 영웅이십니다. 그런 만큼 체통과 품행을 가지런히 하셔야 합니다.”
“품행이랑 나비넥타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때와 장소에 맞는 의상 착의가 있는 법입니다.”
그녀는 내 넥타이 날개를 옆으로 꾹꾹 당기며 대꾸했다.
“일반 넥타이는 사무용입니다. 오늘같이 격식을 차려야 하는 연례행사엔 이 넥타이를 갖추셔야 합니다. 많은 귀빈분이 방문하실 예정인데 격식에 맞지 않은 복색을 하신 천검님을 보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웃음거리가 되실 겁니다!”
“딱히 상관없는데.”
“아뇨. 제가 상관있습니다. 저 한혜신, 천검님같은 귀한 클라이언트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건 제 자존심이 용납 못 합니다. 암, 그렇고말고요.”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조금만 느슨하게 해 주세요. 클라이언트가 질식사하면 그것도 그거대로 웃음거리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이런 맵시 좋은 모델분을 모시다 보니 그만.”
그녀는 흥겹게 콧소리를 흘리며 한 발짝 물러나 나를 관찰했다. 나는 반쯤 체념하여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끼이익.
이때, 의상실의 문이 열리더니 현자 메디아와 만력 메아인이 들어왔다. 쌍둥이 자매는 같은 드레스를 흑과 백, 반전된 색상으로 입고 있었다.
동생 메디아가 백, 언니 메아인이 흑이었다. 바둑처럼 흑이 선(先)이었다.
“준비는 끝났어?”
대답은 스타일리스트가 했다.
“예, 학원장님.”
메디아가 또각또각 구둣발을 울리며 다가오더니 나를 슥 훑어 내렸다. 메아인은 느릿한 걸음으로 한박자 늦게 동생과 나란히 섰다.
‘나비넥타이가 웬 말이야!’
가늘게 뜬 눈으로 꼼꼼히 살피는 그녀들을 보며, 이런 말을 해 주길 내심 기대했다.
그러한 기대는 메디아가 말함과 동시에 일소했다.
“크으- 우리 검마, 쫙 빼입으니까 너무 멋있는데?”
쌍둥이 자매가 스타일리스트에게 엄지를 척 세워 준 것이다.
“수고했어요, 혜신 씨. S급 연예인들만 전담하는 스타일리스트는 달라도 뭐가 다르네.”
옆에 있던 메아인도 거들었다.
“특히 나비넥타이 센스가. 보는 눈이 있으세요.”
“과찬이십니다.”
스타일리스트는 옅게 웃으며 겸양했다. 여인들의 살가운 수다가 의상실에 퍼졌다. 그녀들 사이에서 고립된 남자, 그게 나다.
‘얼씨구.’
나 빼고 짝짜꿍이 잘들 맞네. 소외감 느껴져서, 원.
쩝. 입맛을 다시며 있다가 문득 할 말이 떠올랐다.
“학원장님, 잠시만요.”
대화를 비집은 목소리에 이목이 내게 쏠렸다. 어차피 산통을 깬 김에 계속해서 말했다.
“따로 이야기 좀.”
“어, 어.”
낮은 어조에 그녀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끄덕거렸다.
“그럼, 저는 잠시 천검님의 메이크업 준비하러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편하게 말씀 나누시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스타일리스트는 한 번 꾸벅 숙이곤 의상실을 빠져나갔다. 자신이 부외자인 걸 바로 눈치챈 듯했다. 탑급 연예인들 상대해 온 사람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좋다.
“둘이 할 이야기면 나도 나가 있을까?”
메아인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선배도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그래. 근데 잠깐만.”
메아인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어 문을 굳게 잠그더니, 조용히 무어라 읊조렸다.
“말소리 새어 나가지 않게 사일런트 주문을 거는 거야.”
메디아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설명했다.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전에 말했지? 언니가 마경을 수십 년 동안 배회했다고.”
“예.”
“그래서 생긴 후천적인 특이 체질이야. 체내에 극소량이나마 마력이 축적됐거든. 그래서 간단한 마법은 시전 가능해.”
“아…….”
“이런 표현 썩 좋아하진 않는데, 언니는 반쯤 빌런 녀석들과 다를 바 없는 상태야. 가호를 사용할 수 없는 녀석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내색은 안 했으나 가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가호와 마법의 속성은 상극이다.
결코 한 그릇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 이게 당연한 상식 혹은 진리다. 하지만 메디아의 주장은 그 진리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럼 만력님은 가호의 각성과 더불어 간단한 마법까지 사용한다는 건가?’
나는 묵빛 순면 드레스를 곁눈질로 흘긋했다.
메아인 포이즌.
‘비밀이 많은 인물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
양파처럼 껍질을 벗겨 내도 뭐가 계속 나온다.
메디아는 가라앉은 눈으로 언니에 대한 말을 이어 갔다.
“근데 본인은 자신이 축복받았다고 만족해해. 가호도 사용하면서 마법도 병용하는 인간은 자신뿐이라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
메아인이 빙그레한 호선을 입술에 달고서 끼어들었다. 메디아는 비소하며 빈정거렸다.
“검마랑 언니 뒷담 좀 하고 있었어.”
“다 들렸거든?”
메아인은 가자미눈으로 제 동생을 찌릿 노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색한 눈빛에 장난기가 깃들었다.
“원하면 알려 줄게. 전문적이진 못해도 간단한 마법 정돈할 수 있거든.”
“됐어. 어차피 나 마력도 없어서 알아도 쓰지도 못해.”
“것도 그렇네, 헤헤. 그건 그렇고 하려던 말이 뭐야? 엄청 심각한 이야기 하려던 것 같던데.”
녹스에게 보고받은 지 이제 막 하루였기에 소식을 전할 짬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포이즌 쌍둥이는 7걸 축일 준비로 한창 바빴던지라 겨를이 없기는 피차 매한가지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제야 빌런의 잠입을 알리는 거였다.
‘어차피 나름대로 방비책을 구상해 두기도 했고.’
말이 새어 나갔다가 낌새를 눈치챈 빌런들이 바퀴벌레처럼 도주할 우려도 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무도회까지 한 시간 남은 지금이 타이밍으론 제격이야.’
그래도 일단 대비는 한 상태였다. 협회 직원 중에서 영웅들을 엄선하여 경비대로 배치했다. 생도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지침도 일러뒀다.
메디아가 같은 칠성인 내게 아카데미 경영권 일부를 양도했으므로. 바쁜 그녀를 대신해서 진즉에 재량껏 조처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하와이섬에서 전력의 상당수가 꺾인 터라, 인력이 다소 부실하다는 점이다.
하나 그 공백은 나와 학원장님, 그리고 선배가 함께라면 메꾸고도 남는다.
‘군단장급만 아니라면.’
그리하여 이건 의례적인 신고였다. 어쨌든 아카데미의 학원장은 메디아이니 상황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숨을 가다듬고서, 다시 입을 떼려던 차였다.
쿵쿵쿵!
누군가 의상실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우리 셋 모두 깜짝 놀라 시선이 홱 넘어갔다.
“처, 천검님! 현자님, 만력님!”
조금 전 나갔던 스타일리스트였다. 그녀가 절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문이 잠긴 탓에 들어오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듯했다.
“저저, 적이! 적이 출몰했습니-”
팍, 하는 파열음에 스타일리스트는 말을 끝맺지 못하게 됐다.
“…….”
거칠게 흔들리던 문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정적이었다. 다만 문 밑 틈새로 핏물이 스멀스멀 의상실로 기어들어 왔다.
쾅!
우리 셋은 약속했다는 것처럼 판석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