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6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57화(300/300)
257화 이방인들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눈에 꽤나 익은 허연 천장이 나를 반긴다. 코끝을 간질이는 화학 약품 냄새까지 말이다.
기억을 잃기 전에 예상했던 장면 너무 그대로라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입술을 씁 빨아들여 감정을 갈무리했다.
여기서 헛웃음이라도 했다간 졸도 확정. 그랬다가 작은 기침이라도 하면 자칫 허파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근거는 따로 없다. 그냥 경험에서 나온 느낌이랄까.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데 입원만 3번 하니 자가 검진이 얼추 가능하다.
그래도 몸은 망치로 다져 놓은 것처럼 아프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어떻게 뒤처리는 잘됐나 보네.’
눈을 뜬 이곳이 병원을 가장한 사후 세계가 아니라면- 내가 기절한 사이 아카데미로 송치됐다는 것일 테고.
그렇다는 건 퍼머쉬 토벌전은 성황리에 마무리됐으리라. 방금 눈을 뜬 자의 심증뿐인 지레짐작이나 그렇게 믿어 보기로 했다.
입원도 간만이니 이참에 좀 몸을 회복해 놔야겠다. 그런 상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사각, 사각.
어슴푸레한 칼질 소리가 들렸다. 과일 같은 걸 써는 소리였다.
‘누구지?’
어떻게든 눈알이라도 돌려 보려고 했다. 그러자 칼 소리는 뚝 끊이고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있으셈.”
목소리만 들었다면 긴가민가했을 터다. 하지만 엉뚱한 말투에서 병상 옆에 누가 있는지 특정 지을 수 있었다. 음슴체면 한 사람뿐이니까.
‘유세인.’
“왜.”
‘……!?’
미친. 속으로 내뱉은 말에 유세인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독심술 같은 거 아니야. 그리고 너도 이쯤 하면 눈치챘을 거잖아. 여태껏 시스템을 통해서 소통해 왔던 게 나였다는 거.”
뭐지 갑자기? 음슴체가 아닌 굉장히 정상적인 말투다. 그 말투 그대로 세인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머릿속으로 해. 그럼 어련히 장단 맞춰 줄 테니까.”
그래, 일단 이것부터 물어보자.
“병실엔 어떻게 들어온 거야.”
“너랑 나, 대외적으론 먼 사촌지간이잖아. 가족이라니까 들여보내 주던데.”
“…….”
가족이란 한마디에 들여보내? 어이가 없네.
속내를 귀신같이 읽었는지 세인이 잽싸게 덧붙였다.
“아카데미 방범 체계가 허술한 게 아니라, 그만큼 너랑 내 특징이 이 세계에선 이질적인 거야.”
“특징? 무슨 특징.”
내 되물음에 세인은 칼질을 중단하고서 친절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고 서로 코끝이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거리. 그녀가 손톱으로 제 눈 밑 눈물점을 톡톡 두드렸다.
“검은 눈.”
그리 말하고서 세인은 도로 병상 옆 의자에 앉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다시 말을 뗐다.
“일단 누워서 들어. 눈치챘겠지만 난 네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
“흡.”
순간 사레들릴 뻔했다. 세인이 찌푸린 눈으로 끌끌 혀를 찼다.
“몸이 약해지면서 정신도 같이 약해졌나. 작은 거에 왜 이렇게 들썩거려?”
“…….”
“그러니까… 아, 어디까지 말했는지 까먹었어.”
“외부에서 온 존재.”
“맞다, 거기. 결론만 짧게 말하자면 나도 너랑 처지가 얼추 비슷한 사람이란 거지.”
세인은 말하다 말고 사과를 한 입 베어 먹고는 감탄성을 흘렸다.
“와, 근데 사과 대박 맛있네. 역시 사람은 출세하고 봐야 하나? 칠성 앞으로 온 사과는 품질부터가 다르네. 살다 살다 낱개로 품질 보증서 붙어 있는 사과는 처음 봤다니까? 달다, 달아. 입에서 아주 그냥 살살 녹아.”
지 먹으려고 했던 거구나, 그것도 나한테 온 사과를. 그리고 나란 새끼도, 서리 강씨가 돼서는 눈앞에서 사과를 서리 당했다. 자존심 상하게.
“주고 싶은데 넌 못 먹지? 에구, 아까워서 어째. 이대로 두면 상하니까 먼 친척인 내가 다 먹어 주는 수밖에…….”
거기에 사람 놀리는 것도 수준급. 자·타칭 성녀란 사람이 이처럼 훌륭한 대도 유망주다. 뿐만인가. 아삭아삭 얄밉게도 먹는다.
유세인이 속한 종교 단체의 진위가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교리에 ‘남의 것을 탐하라.’라는 계명이 있을 듯하다. 아님 그냥 얘가 불량한 파계 성녀든가.
“적당히 하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
“너 칠성 됐다고 사람이 너무 고압적으로 변한 거 아니야? 왜 말이 명령조야.”
정곡을 제대로 찔렸다. 빌어먹게 따끔하네.
“뭐, 일부러 놀린 것도 사실이니까 이쯤 할게. 아무튼, 너랑 나는 파생된 뿌리는 비슷한데 결이 달라. 요컨대 나도 외부에서 온 이방인이야. 근데 루트가 너랑 달라.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거든. 그리고 건너온 세계 선도 다르고. 네가 생각하는 지구랑 내가 살던 지구랑 다른 곳이란 거지. 평행 우주 혹은 멀티버스, 그런 거.”
세계선, 평행 우주, 멀티버스.
히어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줄줄이 말한다. 어질어질하다. 근데 또 내용이 혼란한 것과는 별개로 막상 목소리 톤은 평이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러니까 유세인, 너는 ‘환생’을 했다?”
잠시간 동안 정리한 내가 결론은 이러했다. 세인은 사과를 오물거리면서 경망스레 턱을 까딱였다.
“응. 지구식 접근법으론 그 표현이 맞지. 너는 ‘빙의’, 나는 ‘환생’.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한 너와 내가 빙의와 환생이라면-”
“뭐!? 애초에 넌 검은 머리도 아니잖아.”
“아, 이거?”
세인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쓸어내렸다.
“주기적으로 염색이랑 탈색한 건데? 검은 머리는 너무 튀잖아. 괜히 주목받고 싶지 않았거든. 그렇다고 서클렌즈까지 끼기엔 내가 망막이 얇아서.”
맙소사, 이런 어이없는 내막이. 것보다 튀기 싫다는 애가 음슴체는 왜 쓰는 거지? 제 딴에는 십 대다움을 연기한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 잠깐.’
내 눈동자에 의혹이 서리려는 차에 세인이 잽싸게 부연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난 환생 전에도 여자였어. 얼굴도 지금 얼굴이랑 똑같았고. 원래 나이는 기억 안 나. 환생의 영향인지 전생의 기억이 가물가물하거든. 기억하는 전생과의 차이점은 성녀로 태어나서 ‘연애 감정’이 거세됐다는 거 정도?”
“…거세.”
“남자 앞에서 표현이 좀 그런가? 근데 대체할 용어가 없잖아. 도려 내다, 이것도 좀 이상하고. 적출하다, 이건 어감이 안 살고.”
단어 선택이 망측한 걸 보니 정말로 그쪽 감정이 말라 버린 모양이다.
“이야기가 계속 딴 길로 새네. 그래서 내가 낸 퀴즈 맞혀 봐. 빙의와 환생, 그럼 남은 건 뭐가 있지?”
세인이 대답을 종용했다.
빙의, 환생. 이 둘을 제외하고 남은 요소는 하나. 게임과 장르 소설에 익숙한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적을 터다.
“회귀.”
“맞아, 회귀. 여기서 퀴즈 하나 더. 너와 나 외에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한 인물은?”
이 역시 알고 있다.
“발로르 호아킨.”
“이해가 빨라서 좋네. 맞아. 시조의 영웅이자 700년 전에 인류를 구한 인물. 발로르 호아킨은 회귀자야.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세상을 구할 때까지 죽고 살아나길 반복하는 ‘무한 회귀자’.”
고분고분 연달아 정답을 맞힌 난 일단은 경청했다. 세인의 눈빛이 우묵하기도 했고, 나 자신도 충격을 금치 못해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우리와 다르게 발로르 호아킨은 태생이 이쪽 세계야. 하지만 외신의 선택을 받은 건 우리와 같아. 그렇기에 우리랑 같은 검은 눈과 머리를 한 인간인 거지.”
세인의 설명에 난 불쾌함이 확 치솟는 걸 느꼈다. 나는 차치하고서라도 사장님, 발로르 호아킨은 세계를 구원할 때까지 회귀한다는 소리다. 외신이건 그 할아버지건 제 맘대로 사람을 부려 먹는 게 언짢다. 완전 노예나 다름없잖은가.
사장님은 내 은사이자 의부(義父)다. 그런 사람을 햄스터처럼 쳇바퀴에 넣고 돌렸다는 말을 지금 막 들었다. 기분 나쁘다. 과격한 표현으론 좆같다.
내가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그 외신이란 놈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면 직접 하면 될 거 아니야. 왜 너나 나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거지?”
“네 맘이 어떤지는 아는데 어쩔 수가 없어. 외신이 방만하게 보인다는 건 나도 인정. 근데 결국 그분도 ‘세계선 전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대행자를 내세운 거야. 맘 같아선 제 발로 뛰고 싶으시겠지만 아직은 안 되거든,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해서. 외신의 성녀라고 싸고도는 것처럼 들릴 순 있는데 진실이 그래.”
가시 돋친 어조에도 세인의 태도는 무덤덤했다.
“이 이상은 나도 말 못 해 줘. 더 해 줄 말은 많은데 그만큼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거든.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잖아? 나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사실 방금 한 이야기들도 네가 ‘이 세계선의 운명’을 엄청나게 꼬아 놨기에 가능했던 거야.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세인은 사과를 한 조각 집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서 내게 바싹 밀착했다. 오른쪽 무릎과 손바닥은 이불을 짚고 왼쪽 다리와 팔은 앞뒤로 쭉 뻗은-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자세.
세인이 코앞에서 ‘아’ 하면서 입을 뻥긋거렸다. 그녀는 먹기 좋게 자른 사과로 내 앞니를 쿡쿡 찔러댔다.
“입 벌려 봐. 사흘 동안 공복이어서 체할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먹어야 살지. 배짝 꼴아가지고 남자구실이나 하겠어? 너 두고 다투는 애들 생각해서라도 먹어 둬.”
내가 쭈뼛거리자 세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한참 떠들어 대니 꼼지락거릴 정도의 여력은 생겼다.
그렇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이 눈치 없는 이방인 선배께서 후배에게 너무 가까운 접근한 탓이다.
후배를 대하는 선배의 애정 표현이 투머치하다.
그녀가 진지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턱 움직일 힘도 없어? 되새김질해서 입으로 먹어 줘야 하나…….”
나는 자라처럼 목을 내빼서 사과를 덥석 물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게끔 부러 턱을 열심히 움직였다.
세인은 그제야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던- 고양이(위험한) 자세를 해제했다.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서 흐뭇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잘 먹네.”
세인은 호주머니에서 웬 돌덩이를 꺼내 대뜸 내 가슴께 위에 올려놓았다. 부피는 작지만 가볍지 않은 압박감이다. 그녀는 침대에서 벗어나면서 돌에 관해 설명했다.
“무장 강화 때문에 마석 모으고 다녔다며. 근데 마침 성전 기사단이 얼마 전에 ‘만티코어’ 토벌하러 갔다가 마석을 주웠대서 훔쳐 왔어.”
“그런 걸 함부로 훔쳐도 되나?”
세인은 어깨를 으쓱으쓱했다.
“나 이래 봬도 이쪽 세계에선 유일한 성녀야. 본교 내에선 교황 성하에 준하는 입지. 내가 달라고 하면 뱉어 내야지. 오해는 마. 말하기 귀찮아서 훔쳐 왔을 뿐이니까.”
“…아까 나한텐 고압적이다, 뭐다 했던 게 누구였더라.”
“원래 사람은 앞뒤 다른 법이야. 특히나 너나 나 같은 경우엔 더더욱.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중적이잖아?”
말빨이 세다. 직업이 성녀라서 그런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젠장, 설득됐어.
“주니까 사양은 안 할게.”
“그래, 줄 때 넣어 둬. 사양했으면 암시장에 팔아 버리려 했거든.”
“팔아서 뭐에다 쓰려고.”
“게임에 현질해야지.”
내가 볼 때 얜 파계 성녀가 맞다.
용무를 마친 세인은 나가기 직전 문 앞에서 잠깐 멈칫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고생했어, 그동안.”
많은 게 함축된 한마디다.
무려 십칠 년을 이방인으로 고독하게 지내 왔을 세인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못해도 내 몇 배였을 터.
이방인 선배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기를 바라며 이 후배가 대답한다.
“너도 고생했어.”
그 순간 늘 뚱하기만 했던 세인의 입가에 은은한 호선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