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6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68화(263/300)
268화 성유물 (1)
“이 말을 꼭 전해 두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께 신세 지게 될 이 세계의 인류를 대신해서 감사를 전합니다. 당연히 저 또한 그들에 포함되지요. 제가 보내드린 물품은 그 감사에 대한 자그마한 답례입니다. 훗날 요긴하게 사용하시기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교황과 나는 헤어졌다. 기숙사까지 안내하겠다는 사제 웰터를 만류했다.
누가 누굴 호위하겠다는 거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비실비실한 양반이 말이야.
나는 병원을 빠져나왔다. 대문 앞에서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서 기숙사로 노선을 튼 것이다.
교황이 보내 놨다던 물건이 궁금하긴 했다. 그의 신분을 생각해 보면 기대가 절로 차오른다. 말마따나, 나중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짐짓 평범친 않으리라. 일종의 보상일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뜻하지 않았는데 보상받게 되는구나.’
그렇지만 당장은 그간 쌓인 피로가 호기심을 짓눌렀다.
‘발이 달리지 않고서야 보상이 도망갈 일도 없을 거고.’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부속 병원에서 집무실까지는 쪽길로 들어서면 금방인 거리였다. 반해 기숙사까지는 부지를 반이나 가로질러야 하는 거리다.
행여 수상쩍은 놈이 보이면 바로 붙잡아서 추궁도 해야 한다, 아카데미 분위기는 어떤지 시찰도 겸해서. 피곤한 와중에도 굳이 빙 둘러 돌아가길 택한 건 이 때문이다.
겉옷을 여미고,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난 이후에 슬슬 부지를 걸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뒤통수에 와서 부딪혔다. 등골이 차게 식었다.
“겨울 방학 전날이긴 하구나. 이렇게 추운 걸 보면.”
코트를 끝까지 여미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넓게 둘러보았다.
날씨가 쌀쌀해 꽁꽁 싸매고 있어도 튀지 않았다. 얇게 입었으면 되레 튀어 보일 뻔했다.
이러고 있으니 뒷골목의 정보원이 양지를 걸으며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말하자면 느와르 분위기가 물씬 났다. 아님 말고.
“천검님이… 아니었으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나는 눈동자만 슬쩍 그 방향으로 돌렸다.
벤치에 앉아 있는 여생도 두 명. 공포에 질린 여생도를 다른 한쪽이 어깨를 어루만지며 달래 주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마치 고해성사하듯 읊조렸다.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안 가. 이번뿐만 아니라, …호아킨 참사 때도 그렇고. 나는 그분께… 두 번이나 목숨을 빚졌어.”
사람이 뒤에서 누군가를 칭찬하는 상황은 매우 드물다. 보통은 헐뜯기 마련이다. 일식집에서 일하면서 정말 많이 봐 왔다. 가부간을 떠나서 그렇게 은밀한 친목을 다지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그분을 뒤에서 욕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 그렇다고 인제 와서 죄송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어차피 바쁘신 분이라 나 같은 걸 만나 주실 일도 없겠지만.”
거꾸로 말해서, 그만큼 뒤에서 나온 말은 거짓이 적다. 진솔하고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분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지, 속죄의 의미로라도. 이미 늦었지만, 뒤에서 응원 정돈 보낼 수 있으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코트도 쥐색인 것이 딱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다.
쥐가 된 기분, 썩 나쁘지 않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거부하지 않으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산책이 예정보다 길어질 듯하다.
* * *
다음 날, 각 클래스별로 담당 교관들이 고지하는 식으로 겨울 방학식은 약식으로 치러졌다. 불과 이틀 전에 참변이 일어났기에 인원을 분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생도들은 군소리 없이 아카데미의 결정에 따랐다. 그렇게 조촐한 방학식을 마친 뒤 그들은 조속히 호아킨 아카데미를 떠났다.
사건은 종식됐으나 수습은 아직이었다. 기숙사를 비우는 게 생도들의 안전과 뒷마무리를 진행하기 용이하다.
나는 방학식을 마친 직후 뷜란트를 찾아갔다. 무라사메의 칼잡이 부분이 덜그덕거려 계속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뷜란트는 볼멘 소리를 내었으나 어쨌든 의뢰를 접수했다.
“겨울 휴가 떠나려니까 일을 시키냐?”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 아니면 무라사메를 장정 2개월을 방치해야 하는데…….
아픈 내 새끼를 가만두고 볼 부모가 있을까? 부모로서, 칼잡이로서 그건 용납할 수 없다.
“대신 보수는 낭낭히 넣어 드릴게.”
“어이구, 천검님. 제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암요, 이 야장이 번쩍번쩍하게 탈바꿈시켜 드리겠습니다요.”
“…….”
집무실로 복귀했다. 일과를 마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나는 창문으로 생도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아카데미가 썰렁해지고, 그제야 난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후우… 끝났구나, 이번 해도.”
의자에 털썩 앉자 샤일이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캐모마일 향기가 은은하게 집무실에 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천검님.”
그녀 옆에서 카론이 따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나는 엷게 미소 지으며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긴장으로 굳은 심신이 한결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카론과 샤일은 아카데미에 머물며 나를 보좌키로 이야기가 되었다. 캐슬 시구르드는 당분간 비워 둬도 괜찮단다. 어차피 방학 동안 아벨은, 스위스에서 요양 중인 검제의 곁을 지킨다고.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잔류 의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영웅 협회가 주둔하고, 성전 기사단이 합류했지만 일손은 늘 부족하다
대신 본업이 있는지라 일이 생기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는 조건을 내 쪽에서 내걸었다.
카론과 샤일은 배려에 감사를 전했고, 양측이 전부 만족스레 결의하였다.
‘어쩌다 보니 여름 방학이랑 겨울 방학을 두 사람이랑 보내게 됐네.’
집사와 메이드. 팔자에 없던 귀족 라이프는 내게 다소 어색하다. 그래서 둘을 고용인이라기보다는 상비 병력으로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차 맛이 어떠신가요?”
“캐모마일 향이 좋네요.”
뭐, 그건 이쪽 입장이고 상대방 입장은 또 다르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서로 편하고 좋겠지.
나는 한 모금 더 홀짝이고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집무실 탁상의 귀퉁이로 시선을 넘겼다.
뚜껑이 열린 손바닥 크기의 작은 함. 불그스름한 비단에 싸인 길쭉한 쇠붙이가 그 안에 있었다. 녹물이 잔뜩 낀 말뚝 혹은 못이었다.
‘교황님은 이걸 나한테 왜 주셨을까.’
문제는 정작 쓰임새를 모른다. 생각해 보니 교황에게 물어보질 않았다. 어제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설명서 이런 건 없겠지……?’
무턱대고 손을 대기도 그렇다. 눈앞에 ‘검신의 가호가 발현됩니다.’라는 글귀가 떠오를까 봐.
별의별 걸 검으로 인식하는 융통성 없는 가호다 보니.
인제 와서 하는 말인데, 애초에 사시미부터가 검이 아니다.
사시미는 식칼이다. 도(刀)면 또 모를까. 검과 사시미는 괴리가 크다.
‘혹시 몰라. 이 못도 쇠붙이라고 검으로 인식해 버릴지.’
미간을 좁힌 채 노려보고 있자 샤일도 그쪽을 흘끔했다. 돌연 그녀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거 설마…….”
“뭔지 아세요?”
샤일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서 부연했다.
“생도 시절에 책에서 삽화로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그게 맞나 싶었는데, 보다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아, 확실히 샤일은 여러 서책을 탐독했었다 말했지. 언데드 던전으로 함께했을 적에도 룬어를 해독한 건 그녀였다.
그 격한 반응에 카론도 덩달아 시선을 옮겼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처럼 이 못이 뭔지 모르는 눈치였다.
“가까이서 보세요. 만지면서 보셔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먼저 권유했다. 샤일은 사양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천검님.”
샤일은 학구열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리저리 못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잠시 후 두 손으로 고이 제자리에 그 못을 내려놓았다.
샤일은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서 입을 뗐다.
“이것은 ‘성정(聖釘)’입니다.”
“성정이면 성유물이잖아!”
카론이 화들짝 놀랐다. 똥그래진 눈으로 녹슨 말뚝, 그러니까 성정을 쳐다보았다.
“외신교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종교입니다.”
그런 카론을 뒤로 샤일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현대의 서력은 다른 종교에서 파생된 것이나,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외신교입니다. 그러니 외신교는 현존하는 세 성유물 ‘성배’, ‘성검’, ‘성정’ 중에서 ‘성정’을 보유 중입니다. 이제는 보유 중이지 않게 됐지만요.”
내가 덤덤하게 되물었다.
“성물이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대단하다마다요!”
카론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몹시 흥분한 기색이었다.
“성물은 신살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품들입니다.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신성성을 상징하지요. 성배는…….”
성배, 신을 담는 그릇.
성검, 신이 다루는 검.
성정, 신을 봉하는 못.
이 중 성정을 제외한 두 개는 먼 옛날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하물며 기록 자체도 없다시피 해 성배와 성검은 존재 여부에 대해서조차 회의적인 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유일하게 잔존한 성물. 그것이 신을 봉하는 못, 성정이다.
‘분류가 아티팩트 이상으로 취급된다는 것에서 말 다 했지.’
그나저나 그런 귀물을 교황은 내게 왜 맡긴 걸까. 녹여서 무장 강화에 쓰라고 준 건 아닐 테고 말이다.
“…….”
…무장 강화에 써야 하나? 혹시 모를 일이다.
‘A+급을 SSS급으로 만들어 줄지.’
뷜란트에게 다시 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자, 샤일이 뚱한 눈으로 말했다.
“설마, 혹시, 만에 하나에 말씀드립니다만, 성물은 강화 재료로 쓸 수 없습니다. 그 어떠한 무장이 성물의 신성성을 감당할 수 없거든요. 아티팩트로 무장 강화를 못 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렇군요. 근데 성물을 강화 재료로 쓰려는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미친놈도 아니고.”
빤히.
“…….”
“…….”
빤-히.
“스치듯 한번 그렇게 생각한 부분, 인정합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모르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그것만 인정하시나요?”
“어떤 걸 더?”
“미친… 후, 아닙니다. 제가 실례를 범할 뻔했습니다.”
“벌써 실례하신 거 같은데.”
“옛정을 생각해서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면 이 메이드가 기어이 천검님의 밤 시중을 들어야 넘어가 주실 건가요?”
나는 가만히 샤일과 시선을 교환하고 있다가 끄덕였다.
“넘어가겠습니다.”
“너무 고민도 안 하시니 상처입니다.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다는 거군요.”
“저 미성년자입니다.”
“천검님을 미성년자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생물학적 나이만 열일곱이시지 알맹이는 불혹을 바라보는 아저씨로 보입니다만.”
“…….”
“그리고 제가 성인입니다. 한창일 나이, 이십 대 중반.”
“그래도 안 됩니다. 싫어요.”
“진심 상처…….”
“언제까지 이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칠성영웅께 장난이 심했네요. 죄송합니다.”
“어휴.”
나는 다시 성정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일단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까진 알겠다, 니벨룽가에서 온갖 귀물을 접해 봤을 저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걸 보면. 다만 그 쓰임이 불가지다.
‘교황님께 가서 여쭤볼까. 내일까지는 아카데미에 머문다고 하셨으니.’
직감상 순순히 답해 줄 것 같진 않다만, 골머리 썩이는 것보단 그게 나을 성 싶다. 그래도 그 전에 나름대로 알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했다는 걸 보여 줘야지.
나는 [무통의 가호]를 발현하고 ‘성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파밧!
참지 못한 신음이 새었다. 반사적으로 꾹 감은 눈을 가까스로 떴다.
“……!”
바닥과 하늘이 온통 새하얗게 칠해진 광야. 그 한복판에 형상의 외연만 보이는 사람이 등 돌린 채 있었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꿈에서 보고 거의 일 년 만인가.
높게 올라간 입매, 가지런한 치아만 있는 민둥한 이목구비. 순백의 장소와 일체화된 것처럼 시허연 전신.
“넌…….”
세상을 아래로 두는 듯한 이 초월적인 존재감을, 나는 조우한 적 있다.
-오랜만이야.
검의 신이 나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