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7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71화(266/300)
271화 겨울 (1)
카론이 기억하는 강검마는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소년이었다. 그렇다고 불성실하지도 않은 딱 ‘적당주의’ 성향이었다.
한데 그동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최근 모시게 된 강검마, 지금의 천검께선 밤낮으로 일만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 퍽 낯선 모습에 샤일도 티는 안 내려 하지만, 내심 놀란 듯했다. 신기하단 눈으로 힐끗힐끗 쳐다보거나 하는 걸 보면.
샤일은 그런 그에게 종종 농담을 건네곤 했다. 이는 일에 몰두 중인 천검을 잠깐이라도 한눈팔게 만들려는 의도임을 카론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래서 별말도 하지 않고, 거들지도 않았다. 때때로 선을 넘는, 아벨 아가씨가 싫어하실 만한 농담들만 따로 불러 지적했다. 그에 샤일은 싱글벙글 웃기만 하고 홱 돌아섰다.
카론과 샤일. 두 사람 사이엔 집사와 메이드란 위계질서는 옅었다. 샤일은 카론을 꼬박꼬박 존대하면서도 자기주장이 확실했다. 카론은 그 주장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면 수용하고, 아니다 싶으면 따끔하게 한 소리 했다.
두 사람은 이를테면 아비와 딸 같은 관계였다. 샤일의 성장 과정을 전부 봐 왔기에. 그 일련의 과정은 한때 나찰이라 불렸던 사내가 인간의 마음을 되찾는 것에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
그런 샤일이 댓바람부터 외설스러운 농담을 해 대니…….
그 의도를 안다 해도 장년에 접어든 카론으로선 몹시 창피했다. 간혹 그 야시꾸리한 말들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것까진 차마 묻지 않았다. 행여 진담이라면… 캐슬 시구르드엔 피바람이 몰아치리라.
‘아벨 아가씨와 샤일의 경쟁.’
샤일이 진심이라면 카론은 성심껏 응원해 줄 용의가 있었다. 한평생 메이드 일만 하기엔 샤일은 너무 유능했고, 미모가 출중했다.
속죄의 의미로 집사를 하는 카론과 달리 샤일은 짐을 지고 살 어떠한 의무도 없다. 본인은 오리온 님의 은원에 보답하고자 한다지만.
‘훌륭하게 커 준 것만으로 충분하단다, 샤일.’
카론이 아는 오리온 님께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처럼 샤일은 자유를 갈구할 자격이 충분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 볼 나이도 되었다. 말마따나 이십 대 중반이다. 이성에게 호감을 표하고 한창 연인과 알콩달콩할 나이대다.
다만, 우려스러운 점은 대상이 검마 님이라는 건데.
‘전에 그런 기류는 없었지 않았나.’
그때, 불현듯 샤일이 흘리듯 말했던 자신의 이상형이 뇌리를 스쳤다.
-저는 자기 일에 몰두할 줄 알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좋아요. 오리온 님처럼. 그분도 영웅으로서 소임을 다하다가 목숨을 잃으셨잖아요. 그런데도 그분은 마지막 모습까지 근사하셨어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그 과업을 짊어져서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고서 떠나셨습니다.
“…….”
카론은 그 말을 상기하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겨울 방학도 반납하고 몰두하는 강검마의 모습에서, 오리온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샤일은 그 모습을 곁에 바싹 붙어서 구경 중이었다.
옆얼굴을 두드리는 시선을 느꼈는지 강검마가 대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남녀의 시선이 얽혔다.
“한 잔 더 하시겠어요?”
먼저 말문을 연 건 샤일이었다. 그녀가 찻주전자를 까딱 들어 보였다.
“아, 예.”
강검마는 거의 바닥을 보인 차를 마저 비우고서 잔을 도로 원위치했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고 식었던 찻잔이 다시 데워졌다.
건조한 집무실에 약간의 습기와 향긋한 허브향이 더해졌다. 성에 맺힌 창문, 그 너머로 은은한 햇살이 내려 두 사람 등 뒤로 스몄다. 한겨울의 목가적인 정오다. 새하얀 캔버스에 옅은 색상의 물감을 점점이 푼 것처럼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강검마가 차를 한 모금 머금더니 감탄했다.
“맛있네요. 이 차 이름이 뭡니까?”
샤일이 싱긋 미소 지었다.
“해로드(Harrod)사의 찻잎으로, 검제님과 오리온 님이 즐기시는 홍차입니다. 영국 왕실에만 납품하는 물건인데, 해로드사 측에서 니벨룽가에는 특별히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귀한 차를 이렇게 가져와도 되는 겁니까?”
“이건 제 월봉에서 깎은 겁니다. 검제님의 동의도 얻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드세요.”
“…월봉에서 깎았다니 어째 더 걱정되는데요.”
“어머.”
샤일은 주전자를 들지 않은 손으로 입술을 덮었다. 그녀가 뻔한 연기 톤으로 말했다.
“천검께서 제 통장 걱정까지 해 주시니 감동할 따름입니다. 어쩜 이리 상냥하실 수가.”
“그냥 많이 비싸 보여서 한 말입니다. 큰 의미는 없어요.”
“큰 의미가 없다뇨. 어떻게 여자 마음을 그렇게 마음대로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나요, 힝힝.”
샤일의 눈시울은 잘 말린 빨래처럼 뽀송뽀송했다. 강검마는 그 부분을 꼬집었다.
“우는 척할 거면 눈 주변에 침이라도 발라 놓고 하세요. 무표정으로 힝힝거리니까 기괴합니다.”
“여자한테 기괴란 표현을 쓰시다니. 역시 천검께선 언행에 거침이 없으시군요.”
“같이한 한 달 동안, 샤일 씨가 더 거침없는 언행이었습니다.”
“계급장 떼면 제가 누나입니다.”
“계급장 달면 제가 위네요.”
샤일이 입술을 삐죽였다.
“변하셨습니다, 천검님. 여름방학까지만 하더라도 제 얼굴만 보면 얼굴을 붉히셨으면서. 지금은 속세에 너무 찌드셨어요.”
“얼굴 붉히거나 그런 적 없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샤일 씨의 과속 운전 때문이었을 겁니다.”
샤일이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폈다.
“전 무사고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한국에서 최고 속력은 120km입니다. 차 몰 일 있으시면 유념하세요.”
“120km면… 거북이나 다름없군요. 저는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에서도 발 빠른 토끼를 응원했습니다. 아, 근데 토끼인 남자는 좀 그렇습-.”
“그만.”
강검마의 손이 서랍으로 내려갔다.
“…….”
“…….”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집무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샤일은 심통이 난 듯 흥- 콧소리를 냈다. 이조차도 ‘연기’였기에 강검마는 이내 신경을 껐다. 한 달을 함께하면서 샤일에 대한 눈썰미를 길렀다.
그녀는 장난기가 많았다. 심지어 같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줄어들기는커녕 수위는 한없이 치솟았다.
이 순간만 봐도 그렇다. 어른이 미성년자 상대로 토끼 토끼 거린다. 강검마가 기실 성인이어서 망정이지, 사법과 위법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드는 수위였다.
-천검님, 그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에 좋지 않습니다. 허리는 남자에게 생명이에요.
-바깥 공기를 좀 마셔야 합니다. 저랑 데이트하는 셈치고 같이 나가시렵니까?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잘 먹어야 힘을 씁니다. 기력 보신에 좋은 장어 도시락입니다. 아~ 하세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샤일은 모든 대화를 ‘그’ 드립과 연관 지었다. 빠져나갈 구멍은 상대를 안 해 주는 것. 혹은 내가 싫어하는 계급장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샤일 씨는 그나마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캐슬 시구르드에서의 점잖았던 모습은 아벨과 검제가 보는 앞이라 그랬던 것일 터. 본 성격은 음습한 욕망을 거리낌 없이 입에 담는 거였다.
샤일은 변태였다. 살아 있는 음란의 화신이었다.
‘콧김을 뿜으면서 비탈길에서 과속 운전을 할 적에 성향을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강검마는 침음을 내었다. 정상인을 찾기가 이렇게나 어려울 줄이야. 인간이 5명 모이면 반드시 1명은 이상하다는 대현자의 말씀.
근데 그 주변엔 다섯이 모이면 다섯이 나사가 풀려 있다. 정상이라 생각했던 사람도 어느 순간 맛이 가 있었다. 강검마는 자신의 인간관계를 한탄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유유상종. 으레 비슷한 사람끼리 무리를 이루기 마련이다. 구심점인 그가 미쳐 있으니 그 주변에도 영향을 미쳐 죄다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성전 기사단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가만 말을 아끼고 있던 카론이 입을 열었다. 짙게 묻어 나오는 한숨은 애써 삼켰다.
“게헤나 게이트 정화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소식 전달은 카론의 몫이었다. 강검마는 과중한 업무량 탓에 일일이 보고받을 상황이 못 됐다.
“천검께서 지시하신 협회와 기사단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건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그러니 염려치 마시라 기사단장이 말하더군요.”
강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만에 그 정도 성과라니 대단하네요. 기사단장은 오늘 중으로 시간 될 때 따로 방문해 달라고 연락 넣어 주십쇼. 생각해 보니 말도 제대로 안 나눠 봤네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랜슬롯 컴퍼니 측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랜슬롯 컴퍼니. 올 뮤트가 몸담은 영웅 에이전시.
“비단 랜슬롯만 아니라 다른 영웅 에이전시들에서도, 천검님께 합류하고 싶다는 연락이 물밀듯이 몰려옵니다.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강검마의 동공이 커졌다. 뜻하지 않은 합류 의사에 어안이 벙벙했다.
인류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 언제 마족이 침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형국이었다. 2년 후로 예정된 대전쟁이 바투 가까워졌음을, 강검마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칠성의 이름으로 영웅을 모집했다. 마족과 맞서기 위해, 평화의 시대에 젖어 느슨해졌던 경각심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이번 겨울 방학에 반드시 해야 할 과업. 당연히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영웅 에이전시는 돈이 되지 않으면 안 움직이는 집단 아닙니까. 한데 어째서.”
돈뿐만 아니라, 신분제가 만연한 세상에 평민 출신 칠성의 목소리는 힘이 부족할 거란 우려도 있었다.
하나 기우였던 듯하다.
“‘인류가 멸망하면 돈은 그저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우리의 신념이 돈임은 변치 않고, 그 신념을 관철키 위해선 천검께 힘을 보태는 게 옳다. 에이전시 일동.’”
딱딱했던 카론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완되었다.
“대외적인 명분은 이거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의중은 다를 겁니다. 천검님이 여태껏 해 오신 행보와 앞으로 해 나가실 대의를 함께 도모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강검마가 입술만 달싹이자, 샤일이 선수 치듯 말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사람들은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있답니다. 어떻게 하면 천검님을 도울 수 있을까. 왜냐하면, 천검님의 모든 행보는 전부 인류를 위함임을 모두가 알게 되었거든요.”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샤일이 카론과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짧게 눈을 마주쳤다. 곧이어 낮게 허리를 숙였다.
카론이 말했다.
“저희는 내일부로 스위스로 귀국해야 합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강검마 쪽에서 내 건 조건이었으니까.
“이번 한 달 동안 천검님께서 불철주야로 일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봐 왔습니다.”
샤일이 뒷말을 받았다.
“비록 천검님의 일과는 기밀로 부쳐져 남에게 말할 순 없겠으나, 저희만큼은 꼭 기억하겠습니다. 짧았던 기간, 당신을 모셔서 영광이었습니다.”
그 순간.
주마등처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에 좋지 않습니다.
삐뚜름하게 의자에 기대어 있었을 적에.
-바깥 공기를 좀 마셔야 합니다.
사흘을 집무실에 갇혀 있었을 적에.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낮과 밤이 뒤바뀌었을 적에.
-잘 먹어야 힘을 씁니다.
끼니 챙기는 걸 잊었을 적에.
강검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에 마주 섰다. 그리고 두 팔을 뻗어 그들을 얼싸안았다.
“…저야말로.”
강검마는 뭔가에 꽉 막힌 듯한 성대로 목소리를 짜내었다.
“감사합니다.”
두 쌍의 손이 그 등을 두드려 주었다. 세 사람의 온기가 한겨울에 오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