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7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72화(267/300)
272화 겨울 (2)
하와이 섬.
칠흑보다 더한 어둠의 색을 띤 게헤나 게이트. 그 인근에도 밤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스르륵…….
검은 복면과 암행복으로 몸을 가린 흑의인 무리. 달빛의 사각지대인 야음에서, 그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림자가 스스로 입체적인 형상으로 빚어져 인영(人影)을 취하는 듯했는데, 그림자와의 차이는 섬찟한 진홍색 안광을 흘린다는 점이었다.
저벅, 저벅.
누군가 나무 그늘 아래에 섰다. 그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나무에 기대었다. 복면을 내리자 주름 가득한 얼굴이 드러났다.
노인은, 아디토레의 가주 알’타이르는 먹색 구름 사이에 자리한 초생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유독 밝군.”
가주가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곁으로 호리호리한 흑의인이 복면을 벗어 내려 턱 끝에 걸었다. 녹스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가주님. 이런 날에는 사람들이 가게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데…….”
녹스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가주는 천천히 눈을 내려 그런 손주를 바라보았다.
가주가 주름지게 웃었다.
“가게 일이 재밌나 보구나.”
녹스가 한국 초밥집에서 일을 시작한 지 어언 반년. 신년부로 드디어 회칼을 쥐게 된 그였다.
“재밌다기보단…….”
가주의 흐뭇한 미소에 녹스는 이마를 긁적였다.
“…반년 동안 했더니 습관이 들었을 뿐입니다.”
“말은 그리하면서 몸은 솔직하구나. 입꼬리가 아주 씰룩거려.”
“……!”
녹스는 재빨리 복면을 올려 썼다. 그런데도 얇게 노출된 눈 주변은 확 붉어졌다. 잔잔했던 가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창피해할 게 뭐 있느냐. 이른 나이에 노동의 값짐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나 우리처럼 금전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란 이들에겐 더더욱.”
“예.”
“녹스, 네가 원한다면 이번 일에서 빼 줄 수 있단다.”
“아닙니다.”
녹스는 단호히 고개 저었다. 좌우로 붉게 흔들렸던 안광이 전방에서 멈추었다.
“이번 일은 천검께서 하명하신 임무. 그 어떠한 일도 이보다 중요할 순 없습니다.”
우묵한 시선을 받은 가주는 옅게 웃고는 다시 복면을 썼다. 그 상태로 입을 열어 변조된 음성을 내었다.
“다들 녹스의 말 들었겠지. 이번 ‘마경 게헤나의 조사’는 천검께서 직접 지시하신 임무다. 그러니만큼 평소보다 더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알겠나? 또한, 이번 조사는 닷새짜리다. 다들 마경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훈련은 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지구력 싸움이야. 각자 체력 안배에 신경 쓰도록.”
흑의인 무리는 말없이 작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주는 가문의 면면을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천검께서 추가로 하신 말씀이 있다. 이번 임무보다 더 중요하다면서 덧붙이셨다. 음… 어쩌면 우리에겐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녹스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것이 뭡니까, 가주님?”
가주는 말에 앞서 입꼬리를 올렸다. 복면에 가려졌지만, 모두는 가주의 밝은 미소를 느꼈다.
“전부 살아서 생환해라.”
가주는 그리 말하고서 게이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달을 이렇게 정면에서 본 지가 얼마 만인지.”
나무 그늘에서 벗어난 가주는 월광을 듬뿍듬뿍 쬐었다. 그 발밑으로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났다.
“어쩌면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서 처음일지도 모르겠구나.”
달로 가득 채워진 노인의 눈동자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게 잠시 후 그가 자식들에게 어깨너머로 말했다.
“천검님의 분부대로 전원 무사히 생환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 친히 엄벌을 내리겠다.”
가주가 한 발짝 내디뎠다. 흑의인 무리가 옅은 파도처럼 출렁이는가 싶더니, 곧 가주의 그림자 안으로 스며들었다. 덧대어진 그림자들은 가주 뒤로 큼지막한 세모꼴을 그렸다.
“가자, 나의 아들딸들아.”
게슴츠레한 달빛이 그들의 앞길을 길게 비춰 주었다.
* * *
카론과 샤일이 떠난 뒤, 나흘째.
적막만 가득했던 집무실에 반가운 얼굴 둘이 방문했다.
“우리 검마, 나 없는 동안 잘하고 있었어!?”
학원장 메디아가 활짝 이를 드러내며 인사했다. 살짝 지친 기색의 만력 메아인도 함께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두 분 다 상태가 왜 그럽니까?”
포이즌 자매의 옷차림새가 추레했기 때문이다. 몸 이곳저곳에 먼지를 잔뜩 묻어 있다. 옷도 앞섶이 찢어져 보슬보슬한 맨살이 내비쳤다.
“윽.”
나도 모르게 코를 집었다. 체취가 고약했다. 언니 메아인이 사정을 설명했다.
“한 달 동안 제대로 씻지를 못해서. 씻고, 이것저것 정비 좀 한 다음 오자니까. 메디아, 얘가 네 얼굴 한번 보자고 어찌나 보채던지.”
이야기는 이러했다.
포이즌 자매는 ‘호아킨 테러’가 있던 날, 곧장 그녀들의 아버지인 협회장에게 협조 요청을 했다고 한다. 협회장의 기술력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에 협회장은 당신의 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자신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으로 적들을 추적하는, 료죠를 아득히 웃도는 4차 산업의 끝판왕급 실력을 선보였다.
“놈들은 예의 빌런 연합과 달리,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잔챙이들이라 본거지가 따로 없었어. 근데 문제는 점조직이라 전 세계 사방에 흩어져 있더라고. 근데 어떡해, 잡아야지. 그래서 한 달 동안 세계 일주 하면서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렸어.”
메아인이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몇 놈은 살려서 물어보려 했는데, 다들 말하려다가 머리가 펑 터져 버리더라. 아마 걔네랑 계약한 마족이 마법을 심어 놨겠지.”
나는 소파에 나란히 늘어진 자매에게 차를 대접했다.
“두 분 다, 수고하셨어요. 일단 차 좀 드시면서 여독을 푸십쇼.”
차를 홀짝인 메디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헐,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별 관심을 안 보이던 메아인도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 이렇게 맛있다고? 피곤이 녹는 느낌인데?”
샤일은 떠나기 전, 찻잎을 전부 기증했다. 그와 함께 차 우리는 방법도 가르쳐 줬다.
“아, 맞다.”
메아인이 차를 마시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나를 보았다.
“군대 편성 건은 어떻게 됐어? 간간이 소식은 들었는데 정확한 건 잘 몰라서. 워낙에 빨빨 돌아다니기만 해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는 포이즌 자매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영웅 협회 소속 영웅들을 주축으로, 세계 도처에서 외인 부대를 파견해 주고 있습니다. 거기다 각국의 영웅 에이전시들도 협력 의사를 밝혔고, 무소속 영웅들도 용병으로 많이들 자원하고 있습니다.”
“와, 그럼 엄청나게 모였겠네.”
“예.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스무 배는 훌쩍 넘을 것 같습니다.”
“으이구, 장하다! 우리 검마!”
메디아가 와락 껴안으려 하길래 멀찌감치 거리를 벌렸다. 미안한 말이지만 냄새가 너무 심했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훌렁 흘러내릴 듯한 닳고 해진 옷섶도 그렇고.
“자신의 상태를 좀 봐 가면서 달려들지 그래?”
다행히도 메아인이 동생을 제지하고 나섰다. 메디아는 제지의 손길에 막혀 버둥거리다가 다시 축 처졌다. 그녀의 눈빛은 취객처럼 해롱해롱했다.
메아인은 그런 동생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그러곤 내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 얘 말투랑 행동이 유아처럼 변했지? 사실 얘가 지금 정신이 좀 없어. 그도 그럴 게, 이번 한겨울 내내 너무 많이 죽였거든.”
“아… 그렇군요.”
“아무리 빌런 끄나풀이라 해도 태생은 사람이니까. 살인에 익숙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수십, 수백을 죽여 댔으니……. 팔이 좀 안으로 굽는 소리인데, 그래도 얘가 정신력이 좋아서 이 정도인 거야. 보통이었으면 이 정도로 안 끝나.”
메아인이 쓰게 웃었다. 차 맛은 달달한 데 입안은 쓰다 못해 시큼했다.
“검마, 너 ‘가호의 각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뭔 줄 알아?”
메아인은 소리가 내지 않게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놨다. 동생이 어느새 언니의 어깨에 기댄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여러 조건이 있는데, 가장 확실한 건 생명을 최대한 많이 해하는 거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 보면. 갑자기 머리가 멍해질 때가 있거든. 살인에 무뎌지다 못해 즐기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인간을 포기하게 되는 거야.”
그리 말하면서 메아인은 머리를 젖혔다. 연녹색 머리카락이 소파 뒤로 부드럽게 쏟아졌다.
그녀는 그대로 천장, 그 너머 하늘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이 세상은 참 이상해. 신에게 더 많이 축복받으려면 생명을 계속해서 죽여 나가야 한다는 게.”
메아인은 젖혔던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 수많은 감정이 뒤섞였다.
“…신이란 놈들의 목적은 과연 뭘까. 아니, 신이 맞기는 한 걸까? 하는 짓만 봐선 악마보다 더한 놈들인데.”
메아인은 한때를 회상했다. 동생의 가지런한 숨소리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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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을 종횡무진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피로 점철될수록 이성이 점점 탁해져 갔다.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자신이라면 감당할 수 있으리라. 치기 어린 자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더 흘렀다. 결국 메아인은 ‘가호의 각성’이란 미명하에 폭주했다.
그에 군대가 투입될 뻔했으나 메디아가 반대했다. 그리고 단신으로 언니를 막겠다고 강론했다.
좌중은 회의적이었다.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각성 상태의 메아인은- 시조의 영웅보단 한 단계 낮지만, 칠걸과는 비적하다 여겨졌다.
한데 무슨 수로 막겠는가?
그때만큼은 검제와 창성, 다른 칠성들도 메디아를 만류했을 정도. 그러나 메디아는 끝내 언니의 각성을 억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출혈도 물론 컸다. 그 때문에 메디아는 몇 년 동안 사경을 헤맸다. 정신을 찾은 후에도 제 힘의 절반도 발현하지 못하게 됐다.
단전이 파괴당해도 괜찮다며 천진하게 미소 짓던 동생 메디아.
그때부터였다, 메아인이 세상과 신을 저주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마경 게헤나로 향했다. 게헤나를 배회하며 신의 잔흔을 수색했다. 설혹 그들이 다시 잠에서 깨어날 때를 대비하여,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그날도 겨울이었다.
인계와 달리 마경의 눈발은 검붉은 핏빛이었다.
메아인은 어느 비좁은 토굴을 발견했다. 토굴로 들어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꼬질꼬질한 행색의 소년이 웅크린 채 발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굴 구석에는 낡고 두툼한 고서가 굴러다녔다. 그것은 예언서였다.
예언서를 전부 읽은 메아인은 세상의 진실과 마주했다. 동시에 저 소년이 예언서에 적힌 용사임을 알 수 있었다.
메아인은 용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 있지 말고 나랑 가자.
어쩌면 조금의 연민과.
-네 역할을 해야지.
자신의 이기를 충족고자.
-검의 신을 받아들여, 부활을 노리는 신들을 멸살하게끔 도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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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인이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가만있었다.
‘생명을 해할수록 가호의 각성에 근접한다.’
그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사실이라면 내가 가장 위험군이지 싶다. 더불어 그림자 가문, 아디토레의 일원들도. 그들은 암살이 가업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디토레는 내 명을 받고 게헤나로 잠행 중이었다. 오늘로 나흘째니, 내일이면 복귀할 터였다.
‘잘들 하고 있겠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떨쳐 냈다. 그들의 실력을 불신하면 누굴 믿겠나. 어지간한 변고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콰앙!
집무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메아인은 상념에서 깼고, 졸고 있던 메디아도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용맹한 인상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가 걸을 때마다 판금 갑옷이 절그럭거리고, 망토가 길게 펄럭였다.
“갑작스럽게 찾은 결례를, 용서하소서.”
사내는 외신교 기사단장이었다. 그의 왼쪽 무릎이 털썩 바닥과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아디토레부터 급하게 온 전보입니다.”
기사단장은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경에서, 게헤나에서 용사 레온 반 라인하르트를 목격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