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7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74화(269/300)
274화 개안 (1)
쿠아른의 낯짝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흉신 익살처럼 변하니 훨씬 더 사악해 보였다.
“…드래곤 로드.”
쿠아른은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한 기세와는 달리, 짓씹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인간에 비유하자면 그저 조금 성가신 대상을 만났을 적과 엇비슷한 반응이었다.
드래곤 로드, 발레리온이 힘 빠진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대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겠소? 이들을 살려 줄 거요, 말 거요.”
발레리온의 재촉에 쿠아른은 이내 반색했다.
“지금, 이 제안은 드래곤 로드의 독단입니까, 아니면 드래곤 일족 전체의 의사입니까?”
“대답해야 할 질문이요?”
“제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세요, 로드.”
“대단히 귀찮게 하는군.”
발레리온은 팔짱을 끼고서 쿠아른의 머리 위 방향을 눈짓했다. 드래곤 군체가 하늘에 둥그렇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처럼 원형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다 함께 온 거 보면 알지 않소. 일족 전체가 동의했기에 함께 온 것이오.”
그런 로드의 대답에 알’타이르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총 전력이 군단장 다섯과 비적하다는 드래곤 일족.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군집하는 법이 없었다. 개체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인주의 마인이었다.
‘한데 어떻게 드래곤이 모였단 말인가?’
의문은 거기서 그치진 않는다. 드래곤이 인간을 수호하기 위해 군단장과 대적하는지. 또, ‘손녀’의 부탁이란 무엇인지. 반추할수록 의문이 쌓여만 간다.
이 상황에서 짐작 가능한 한 가지는.
‘이들은 우군이다.’
드래곤 로드는 제 몸으로 쿠아른의 시야에서 가주를 가려 주었다. 그 작은 배려에서 가주는 로드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잠자코 있을 수밖에.
괴물들의 대화에 인간이 끼어들 겨를이 없었다. 아디토레 모두의 명운이 달려 있었다.
“그렇군요.”
쿠아른은 가부좌를 풀고서 허공에 우뚝 섰다.
“좋습니다, 로드.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쿠아른이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그의 발아래 노면이 물결치더니, 짐승이 아가리 벌리듯 좌우로 찢겼다. 이윽고 크게 갈라진 노면은 어디론가 이어지는 통로가 되었다.
쿠아른이 로드를 내려다보았다.
“이번 일의 대가는 다음에 묻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로드뿐 아니라, 드래곤 일족 전체에게.”
“알겠으니까 입 아프니 그만 떠나시오. 아, 그 전에.”
발레리온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이렇게 된 거 말하고 싶은 게 있었소. 우리의 선조 우로보로스 님께서 중립 협정을 맺은 건 진정한 게헤나의 군주 라이칸 님이시오. 2군단장 당신 같은 반푼이가 아니라.”
로드는 본디 쿠아른이 마족이 아닌 천사였다는 점을 비꼰 것이다.
“나 이전의 드래곤 로드들께서는 잠자코 있었소만…….”
발레리온은 새끼손가락에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귓밥이 쿠아른을 향해 흩날렸다.
“작금의 그대는 인류와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라이칸 님의 유지를 무시하고 있소, 천사 양반.”
“하하하.”
쿠아른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동그란 파문을 그리며 일대를 가늘게 뒤흔들었다.
드드드드…….
몸이 날아갈 것만 같다. 아디토레 전원은 침음했다. 그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노면에 심어 몸을 고정했다.
반면 로드는 뚱한 표정으로 여상하게 서 있었다. 쿠아른이 그런 그를 조롱했다.
“둥지에만 수백 년을 틀어박혀 있었다지만 너무 세상 물정이 어둡군요, 로드.”
“…….”
로드는 뭔가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반문하진 않았다. 그는 쓸데없이 말 많이 하는 걸 싫어했다.
“이 전쟁은 라이칸 님께서 먼저 개전하신 전쟁입니다. 여하간 다음에 볼 때까지 모쪼록 무병하세요, 로드. 신체가 건강해야 이쪽도 고문할 맛이 나니까요.”
쿠아른이 가학적인 미소를 입고리에 걸었다. 로드는 시큰둥한 눈으로 말을 받았다.
“덕담 고맙소. 천사 양반, 자네도 깃털 관리 잘하고 있으시오. 전부 뽑은 다음에 잘라 줄 터이니.”
쿠아른은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으로 생성한 문이 용오름 치며 쿠아른과 레온을 한꺼번에 삼켰다. 이어 소화하듯 꿀렁거리는 모습. 찢어졌던 노면이 완전히 봉합된 건 조금 뒤였다.
* * *
같은 시각, 아카데미 특별관.
혼은 눈을 감고서 손끝으로 양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다. 그녀는 현재 드래곤 일족과 교신 중이다.
‘설마 혼이 로드의 피붙이일 줄이야.’
어린 나이에 이무기의 허물을 벗고 드래곤으로 승천했으니 짐짓 비범한 핏줄일 거란 건 예상했다.
하지만 드래곤 로드의 혈통일 줄은 알았겠나? 새삼 혼을 페르티낙스 경매장에서 빼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행여라도 그 일이 드래곤 로드의 귀에 흘러들었다면.’
군단장만으로도 벅찬데, 거기에 중도 성향인 드래곤까지 가세하면 한 줌의 희망마저 사라졌을 터다.
“후우…….”
침묵이 끝났다. 숨을 깊게 토해 낸 혼이 나를 돌아봤다.
“2군단장이 떠난 모양이에요.”
그녀가 눈웃음쳤다. 다만 지쳤는지 얼굴색이 창백했다.
“…일단은 떠난 모양인데.”
혼은 어딘가 찜찜한 기색이었다. 나는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고생했으니까 고기 먹으러 가자.”
대신 그녀의 힘을 북돋아 줄 마법의 말을 꺼냈다.
“SSS급 한우집으로 예약해 놨어.”
혼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그리고 최설아는 쾌재를 내질렀다.
“예이! 주군께서 사신다!”
나는 최설아를 흘겨보다가 한마디 내뱉었다.
“넌 뭘 고생했다고 따라간대.”
“그, 그그, 그치만.”
“넌 혹시 모르니까 여기 특별관에 있어. 혼이랑 계약해서 송신은 안 돼도 답신은 받을 수 있을 거 아니야.”
“너무합니다, 주군! 저에게도 보상을 주세요!”
“보상의 값짐은 노동에서 나온다. 근데 넌 당장 오늘은 한 게 없잖아.”
나는 혼을 부축하며 짧게 답했다.
“그런 애를 뭐가 예쁘다고 1인분에 백만 원 짜리를 먹여.”
“몰라, 몰라! 나도오 데려가 줘요오오오! SSS급 한우……!”
최설아가 벌러덩 드러누워 생떼를 썼다. 기다란 귀곡성이 특별관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앙……!”
* * *
녹스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흐으.”
그를 시작으로 아디토레 전원이 철퍼덕 주저앉았다. 암살자들은 악몽을 꾸다 갓 깨어난 듯 흠뻑 땀에 젖어 있었다.
“괜찮으냐, 다들.”
유일하게 두 다리로 서 있는 알’타이르가 물었다. 다들 작게 고개만 주억였다.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가쁘게 호흡하는 자식은 있지만, 그래도 다들 팔다리 멀쩡하고 무사했다.
“다행이구나, 정말.”
그렇게 말하며 알’타이르도 한숨 돌리며 식은땀을 훔칠 때였다. 발레리온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아데토레의 낯빛이 다시금 파리해졌다. 발레리온이 드래곤이란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것이다.
“마경은 왜 온 거요.”
갑작스러운 질문. 추궁하는 드래곤 로드 앞에 가주가 섰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답 이전에 저와 제 자식들을 구해 주셔서 감사부터 드립니다, 드래곤 로드.”
“인사치레는 됐고. 온 용건이나 말해 보시오.”
알’타이르는 고민에 잠겼다. 천검님의 명을 받아 왔다고. 이것을 곧이곧대로 말해도 되는가? 목숨을 구해 줬다 하나 어쨌든 이들은 마족이다. 중립 성향이 강한 드래곤일지라도 말이다.
인류의 주적이라는 고정관념이 한순간에 뒤바뀌거나 하진 않는다. 가주처럼 나이 든 사람일수록 더더욱.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입을 뗀 것은 녹스였다. 그는 비척거리며 드래곤 로드와 마주 섰다.
-천검님이셨으면 말해 주셨을 겁니다. 그분께선 은원이 확실하신 분이시거든요. 무슨 일이 생긴다면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녹스가 전음으로 가주에게 속삭였다. 가주는 동그란 동공으로 손주를 쳐다보다가 곧 실소했다.
“예끼, 이놈아. 네가 책임질 수 있을 만한 일이더냐.”
가주가 소리 내어 말했다.
“철이 일찍 든 건 좋으나 어른들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법이야.”
“…예.”
가주는 조금 처진 손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도 네 마음만은 고맙구나. 아카데미에서 보낸 2년 동안 정말 많이 성장했어. 일단 지금은 뒤로 가서 쉬고 있거라.”
가주의 말에 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물러나고 가주는 로드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로드. 은원 앞에서 고민한 모습을 보이다니 참으로 부끄럽군요.”
“상관없소. 경위야 어쨌건 나는 사실만 들으면 되오. 적어도 우리 드래곤이 중립을 깨고 2군단장과 척지는 명분은 있어야 하니 말이오.”
“주, 중립을 깨다니요.”
가주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2군단장은 드래곤 일족과 척지기 두려워서 떠난 게 아니었습니까……?”
“쿠아른은 원래 천사였으나 신을 배반하여 타천했소. 그런 놈이 같은 필멸자인 드래곤을 두려워나 하겠소? 퍽이나.”
발레리온은 혀를 찼다. 그러고서 방금까지 쿠아른이 부유하던 허공을 응시했다.
“쿠아른은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오. 700년 전, 마족들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킨 것도 사실상 놈이니.”
“개전을 천명한 건 1군단장이 아니었습니까?”
발레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라이칸께서는 처음엔 반대하셨소. 하지만 끝내 전쟁을 선포하신 건 사실이오. 아마 그분께선 시조의 영웅과 검합을 맞춰 보고 싶으셨던 것 같소. 전쟁은 그 빌미에 불과했을 것이고.”
“아…….”
시조의 영웅과 검을 겨루고자 전쟁을 승인했다니. 알’타이르의 입장에선 라이칸도 만만찮은 미친놈이다. 하나, 가주는 튀어나올 뻔한 그 뒷말을 집어삼켰다. 사서 드래곤 로드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이니.
발레리온이 말했다.
“온 용건을 말하시오. 난 말하는 건 딱 질색이니 듣기만 하겠소.”
알’타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나마 대화해 본 결과 드래곤 로드는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노인의 눈썰미는 이런 부분에서 예리하다.
알’타이르는 마경에 온 이유를 실토했다. 물론 강검마에게 누 끼치지 않게끔 신중을 기했다.
가주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발레리온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뒤,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 천검이란 자를 내가 만나 볼 수 있겠소?”
“……!”
가주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최대한 강검마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건만, 발레리온은 그를 콕 집었다.
안 된다고 시치미 떼기엔 상대는 드래곤이다. 그들은 마안(魔眼)을 지녔다. 변명의 진위쯤은 간단히 꿰뚫어 보겠지.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하기엔 은원을 입었다.’
아무리 마족일지라도 아디토레는 빚지고는 못 사는 가문이다. 그것은 대대로 이어져 온 아디토레의 소신. 받은 만큼 돌려준다, 원수가 됐건 은혜가 됐건. 그것이 아디토레가 추구하는 질서다.
‘…그렇다고 해도.’
가주가 망설이는 듯 보이자, 발레리온이 덧붙였다.
“당신이 걱정하는 상황은 안 나올 것이니, 염려 마시오. 정확히는 감사를 전하러 가는 것이니.”
“감사라면 어떤 것을.”
“인계에서 경매장에 팔릴 뻔한 내 손녀를 구한 것이 그자라고 들었소.”
순간 가주는 헛숨을 들이켰다. 그 뼈만 앙상하던 귀쟁이, 아니 소녀가 로드의 손녀였다고?
“아디토레, 당신들도 내 손녀의 구출을 도왔다는 건 전해 들었소.”
“…설마 그래서 저희를 지키시려 한 것입니까.”
“수백 년 넘게 유지한 중립을 우리가 괜히 깼겠소?”
드래곤 로드는 딱딱했던 표정을 풀었다.
“우리 드래곤은 예로부터 은원에 확실한 일족이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지.”
질서의 가문과 중립의 일족. 두 세력의 신조는 종족을 초월했다.
“목숨을 살려 준 것으로 당신들의 빚은 얼추 타산이 맞아떨어지는 듯하지만, 천검이란 자에겐 베푼 게 없소.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자를 한번 보고 싶긴 하군.”
드래곤 로드가 손가락으로 제 눈 밑을 건드렸다.
“어쩌면 내가 그자의 개안(開眼)을 도울 수도 있을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