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7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76화(271/300)
276화 개안 (3)
발레리온은 내게 너무나도 큰 숙제 두어 개를 던졌다. 비단 로드만 아니라 최근 만나 왔던 인물들(유세인, 교황, 검의 신)도 그렇긴 했지만.
그런데 예의 세 명은 한 가지씩만 말했지. 로드는 한 번에 두 가지 충격을 선사했다. 마안부터 해서 내가 신을 죽이는 검이라는 말까지.
물어볼 게 많았다. 하나, 질문을 취사선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질문이 질문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혹 의심쩍다는 생각이 들면 이곳을 박살 내고 혼만 데리고 마경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아디토레 가주님이 발레리온은 괜찮다며 보증을 서긴 했지만…….’
원래 보증은 그렇게 함부로 서는 게 아니다. 가족 간에도 안 하는 게 보증인데. 이건 가주님이 안이한 감이 있다.
아무튼. 난 당장에 가장 적합하며, 의심을 피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역천의 마안은 대체 뭡니까?”
마안은 몹시 희소한 능력이기에 ‘기적의 가호 M’에서도 밝혀진 정보는 극히 적다. ‘고리의 마안’만 해도 바실리스크를 토벌하러 갔을 적에 처음 알았으니까. 그러니 700년 전의 인물인 라이칸이 소지했던 마안을 내가 알 턱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소지 중이란 말이었지만 어쨌건.
나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로드가 되물었다.
“역천의 마안의 힘이 무엇인지를 묻는 겁니까, 아니면 그 기원이 궁금하신 겁니까?”
당연히 힘이지, 이 양반아. 마안의 기원은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것을 싫어하고, 듣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기원은 머리 좀 굴리다 보면 왠지 생각날 것 같습니다.”
나는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나름의 연기였다.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이게 최선이었다.
“근데 힘이 무엇인지는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네요.”
“설명하는 데에는 재주가 없습니다만, 괜찮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나도 말재주가 별로였으니.
발레리온은 잠깐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면 짧은 문장으로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말문을 열었다.
“단발적인 힘 자체는 고리의 마안이 유사 이래 가장 뛰어납니다. 하지만 능력의 복잡성과 잠재성은 역천의 마안이 그 이상이라고, 우로보로스 님께서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일단 표면적으로 드러난 능력은 ‘왜곡’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변죽을 울린 것치곤 평범하군요.”
왜곡 능력이 평범하다니, 미친 사기 능력인데? 내가 보기엔 단발성인 고리의 마안보다 이쪽이 더 사기적이다.
하지만 발레리온의 부연을 듣고 나서야 고리의 마안 다음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 왜곡 대상은 무기물. 즉 시간, 공간, 차원 같은 추상적인 관념에 한해서 왜곡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천기를 누설하는 것 같다고 하여 저희는 ‘역천의 마안’이라 부르는 것이고요.”
쉽게 말해 물리력을 행사하진 못한다는 뜻이다. 세상의 이치 자체를 비틀어 버리는 ‘고리의 마안’과 다르게, ‘역천의 마안’은 변주를 준다는 것. 어째 말이 더 어려워진 것 같지만 기분 탓이다.
“‘역천의 마안’이 ‘고리의 마안’보다 잠재성이 뛰어나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암만 봐도 ‘고리의 마안’이 압도적인 상위 호환 같은데.”
발레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고리의 마안’은 사용자의 생명을 대가로 발동하는 마안입니다. 그에 반해 ‘역천의 마안’은 사용자의 자질만 충분하면 됩니다.”
이어지는 말로는 그 자질의 충족 조건이 엄청나게 까다롭다고. 마안의 본 소유주도 기실 제대로 사용하질 못했다나.
“그렇다고 대가가 적다는 것만이 ‘고리의 마안’보다 높은 격이 되는 사유가 아닙니다. 가장 분명한 차이, 그것은 세계선입니다. ‘역천의 마안’은 ‘고리의 마안’도 불가한 세계선에 간섭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여기서부턴 나도 이해를 포기했다. 그래도 짐짓 알아들은 척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후로 로드는 ‘역천의 마안’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이 덧붙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로드는 더는 말하기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상은 말해 드리고 싶어도 저도 아는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개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지금요? 여기서?”
“예.”
그가 벌떡 일어났다. 나도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지그시 내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검마 님은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앉은 상태로 눈을 감으십시오. 그럼 제가 마력을 주입해 체내의 혈을 모두 개방할 것입니다.”
“자, 잠깐만요. 제 몸에 마력을 주입한다뇨. 제가 제대로 들은 거 맞습니까?”
“귀의 혈은 안 뚫어도 되겠군요. 정확히 들으셨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제 몸은 지금 완전한 인간 상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기서 강제적으로 마력을 받아들였다간, 역풍을 맞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검마 님과 처음 마주쳤을 때 제 마안으로 확인해 본 결과, 그런 상황이 발생할 확률은 전무합니다. 오히려 그 몸에 마력이 깃든다면 힘의 임계치를 두드릴 겁니다.”
발레리온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변함없이 단단한 눈빛이다. 인간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세월을 살아온 고절함이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싫지만, 쿠아른은 강합니다. 메타트론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한때 하늘을 석권할 뻔한 천사였으니까요. 마법을 받아들인 이후론 그때보다 더 강해졌을 겁니다.”
그가 충고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당신이 약하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뇌격 마법 없이, 인간의 육신으로 그만큼 강해졌다는 게 괄목할 정도입니다. 성장세 자체만으로 놓고 본다면 시조의 영웅보다도 빠르다 할 수 있겠군요. 1년 만에 이 정도니 2년, 3년 후면 쿠아른과 상대해 봄 직합니다.”
대화하면서 심경의 변화라도 있던 걸까. 상남자의 과묵한 인상은 한결 누그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정확히 언제라곤 확정 지을 순 없지만, 놈은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습니다. 당장이라도 쳐들어갈 수 있게끔.”
“…쿠아른이 전쟁을 준비하는 명분이 뭡니까? 로드의 마안으로는 알 수 있을 성싶은데.”
발레리온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놈의 목적은 제 마안으로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 예언의 범위는 이 세계로 한정되는 것이니, 놈의 목적은 이 세상의 바깥과 관련 있다고 어림짐작할 뿐이죠.”
“…….”
“그러나 당신이라면 그자의 계획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역천의 마안’을 개안해야 하고요.”
발레리온은 질문은 더 받지 않겠다는 듯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그가 오른손 엄지로 내 이마 정중앙을 짚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제대로 가부좌를 틀고서 눈을 감았다.
“당신이 살아야 저희가 삽니다. 비록 태생부터가 적이지만, 우리는 이 세계를 이루는 양축입니다. 바꿔 말해 이 세계가 있어야 저희가 존재합니다.”
자신과 일족의 보신과 별개로, 그가 진심으로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답지 않게 말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것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마법을 당신께 넘긴다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말을 하던 와중, 발레리온은 피식 실소했다. 그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우로보로스 님께서도 이런 심정으로 시조의 영웅에게 ‘고리의 마안’을 넘기셨군요.”
어색한 침묵이 자리 잡은 방 안에서 인간과 마인이 서로를 마주했다.
마력을 주입하기 직전, 로드는 내게 마지막으로 속내를 전했다.
“잃은 과거를 회상하는 겁니다, 라이칸. 당신은 악인이라기엔 삿되지 못했고, 선인이라기엔 폭력을 숭배했습니다. 그렇기에 마족의 자랑이었습니다.”
그 순간. 눈을 감았기에 캄캄해야 했을 시야가 백탁으로 물들더니, 전후좌우 뭉클 굽이지게 말려들었다.
“마경의 왕이시여, 부디 눈을 뜨시어 진정한 마(魔)를 보이소서.”
곡률 있게 휘어진 새하얀 공간을 감상할 새도 없이, 발밑 어귀가 쑥 꺼졌다.
탈력감과 추락감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공간의 바닥, 그 아래로 깊게 가라앉았다. 심연으로.
* * *
강검마와 발레리온이 옆방으로 들어간 지 두 시간째.
최설아는 안절부절못했다. 궁금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방문 앞을 서성였다.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아. 그렇다면 사일런트 마법을 시전한 듯한데.’
혼에게 일전에 들은 바론 로드는 말수가 적다고 했다. 그런 로드가 무려 두 시간을 강검마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인 걸 보면 안에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거기까진 좋다 이거야. 근데 여긴 내 집이잖아? 아직 전세 대출도 다 못 갚았는데! 산재 보험에 가입하긴 했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보험은 산 자에게만 적용된다. 죽은 자에겐 무쓸모였다. 그건 집도 마찬가지. 집구석이 송두리째 날아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아.’
최설아에게도 돈이 많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반년 전만 하더라도 통장을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든했다.
문제는 그 무렵의 최설아가 돈을 아낌없이 펑펑 썼다는 데 있었다. 주 소비처는 명품이었다. 명품으로 꾸미면 스스로의 가치가 높아지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수입원이 뚝 끊긴 것도 모자라, 전 재산의 2/3을 주군께 뜯겼다. 명품은 고사하고 다달이 빠져나가는 고정 지출도 불안할 지경이었다.
그때는 몰랐지, 숨 쉬는 데 이렇게 많은 돈이 들 줄은. 그녀는 서민의 애달픔을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올해 들어서 금리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대출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더불어 의도치 않게 입도 늘었다. 그냥 입이면 말을 안 해. 몸은 깡마른 주제에 식사량이 코끼리여라 그렇지.
갑자기 화가 난 최설아는 혼을 흘겨보았다. 혼 또한 조마조마한 기색이었으나 기름칠한 배때기는 형광등 조명을 받아 윤기가 번들거렸다.
‘잘 처먹고 왔구나.’
최설아는 뭐라 한 소리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아디토레의 가주가 있는 자리에서 그랬다간 험한 꼴을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드래곤 로드가 쟤 할아버지였지. 뱃살뿐만 아니라 뒷배도 두둑한 혼이었다.
‘내가 참자, 참아.’
그러다 문득 식탁에 놔둔 검은 봉투로 눈길이 갔다. 주군이 구워서 먹고 있으라던 한우였다. 정신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최설아의 입가에 미소가 활짝 폈다. 그녀는 한번 문을 쳐다보았다가 이내 신경을 껐다. 그래, 될 대로 되라지.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고 사는 게 빌런다운 방식 아닌가.
또,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란 인디언 속담도 있다. 어차피 문 앞에서 기웃거릴 바엔 입이라도 행복한 게 나았다. 최설아는 반쯤 해탈했다.
그녀는 가스 불을 올리고 팬을 달궜다. 지방이 꽃처럼 핀 고기 두 덩이를 그림 보듯 구경하다가 살포시 팬 위로 뉘었다. 치지직, 팬에서 단비가 내렸다.
“아, 이 소리, 이 냄새.”
최설아는 냄새조차 안 놓치려는 듯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동안의 불안과 걱정이 소고기 지방과 함께 싸-악 녹아내렸다. 입매도 덩달아 흐물흐물해졌다.
그렇게 잠시간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콰아아앙!
굉음. 주군과 로드가 들어갔던 옆방 문이 부서지며 나가떨어졌다. 응집된 마력이 가스 터지듯 분출된 것이었다.
“……!”
모두의 시선이 폭심지를 향해 미끄러졌다. 그중 최설아의 낯빛은 유독 파리하게 식었다. 등골이 오싹오싹했다. 아, 어떡해, 내 집.
그러나 이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더 크게 경악했다. 일순 회백색으로 물든 배경. 나무 파편들이 허공에 붕 뜨더니, 직소 퍼즐처럼 조립되기 시작했다. 시간의 역행이었다.
되감기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던 고기는 결국 거무튀튀하게 죽고 말았다. 덕분에 보험비는 굳고, SSS급 한우를 잃었다.
최설아는 울상이 되었다. 삶은 고통의 연속. 졸부에서 서민이 된 그녀에겐 훨씬 더 와닿는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