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7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77화(272/300)
277화 개안 (4)
꿀렁이는 백색의 공간 아래. 그곳은 빛 한 홉 없는 심연 그 자체였다. 빛이 없기에 색채도 없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기에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득한 탈력감을 느끼며 추락했다. 보이지 않는 바닥과 가까워질수록 내면의 악한 충동이 수면 위로 부글거렸다.
‘아.’
황홀하다. 평상시 ‘가호’란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게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다.
나는 온몸에 힘을 뺐다. 원래도 축 늘어졌던 팔다리는 이제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종일, 몇 년을, 평생을 이 어둠에 살라 먹히고 싶다는 가슴 깊은 곳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악의였다.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부로 침투했다.
‘전부 베어라.’
‘전부 잘라라.’
‘전부 죽여라.’
악의는 인간의 기억을 지워 갔다. 어쩌다 이곳으로 왔는지, 방금까지 누구와 대화했는지, 내 이름이 무엇인지. 오색찬란했던 기억들에 새카만 먹물로 얼룩졌다.
기억의 조각은 산란하고, 악의가 그 자리를 시나브로 채워 나갔다. 탄생 직전의 태아처럼 사위의 어둠이 나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때였을 것이다. 깊숙이 침잠하는 나의 손목을 누군가 덥석 붙잡았다.
감고 있던 눈을 게슴츠레 떴다. 이 순간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는데. 화가 치밀었다.
《강검마.》
가늘었던 내 눈이 번쩍 뜨였다. 순간 까무러치게 놀랐지만, 소리는 목 아래에서 잠겼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상대는… 아니, 나 강검마는 옅게 웃었다.
《한 번은 볼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네.》
강검마가 내게 말했다. 그의 전신에는 빛무리가 흘러 심연 속의 야광이었다. 그의 체형은 나와 똑같은 인간 크기인데, 빛의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멀리서 봤다면 밤바다를 아스라이 비추는 등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는 심연과 괴리된 찬란한 광휘였다.
《내 몸을 차지했으면, 그렇게 누워 있지 말고 좀 일어나 있어라. 사람이 게을러 보여.》
강검마가 훅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편히 누워 있던 내 몸이 꼿꼿이 서 기립했다. 그와 동시에 명치를 압박하고 있던 바위가 치워진 것 같은 느낌. 무형의 바위는 뽀글뽀글 기포 줄기를 흘리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 바라보게 되었고, 그제야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는 머리 색과 홍채가 검지 않고 백지장처럼 희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가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그런 그를 멀뚱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 호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건, 때가 진짜 임박했다는 거네.》
그는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길 잠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침묵이 일었다. 사위가 심연이었으므로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이 안 갔다.
《이렇게 된 거, 내 힘의 전부를 개방시켜 보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가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엄지를 내 이마에 갖다 댔다.
파지지직……!
엄지와 이마가 만나기 직전, 피부 사이에서 시퍼런 전류가 튀겼다. 이내 그가 내 이마를 짚자, 맞닿은 지점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꽈르르릉-!
그러자 내 뇌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것은 뇌격이 아닌 깨달음의 벼락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정보의 홍수가 뇌리를 통해 흘러들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막혀 있던 수로가 열린 듯이 혈관 구석구석 마력이 내달렸다.
잠시 후, 그가 씨익 웃으면서 천천히 이마에서 엄지를 떼어 냈다. 나도 감았던 눈을 떴다.
《해 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오른손의 엄지와 중지를 붙였다. 그리고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벼락 다발이 심연에 내리꽂혔다. 한 박자 늦게 벽력음을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콰앙! 꽈릉! 콰과과과광!
연달아 번쩍이는 번갯불. 뇌격은 어둠을 천벌 하듯 사방 곳곳에 번개 자국을 남겼다. 빛과 그림자의 강역을 가르는 듯한 빛다발이었다.
뿌리를 그리는 빛줄기 사이사이로 심해 어류를 닮은 괴물들의 모습이 명멸했다.
심연은, 악의는, 거짓된 존재들은 고통스러운 듯 비명 찬 외침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아……!
쉴 새 없이 퍼부어지는 뇌격은 그마저도 찢었다.
마경 게헤나의 왕. 마왕군 1군단장. 뇌제(雷帝) 라이칸.
그만이 다뤘다는 뇌전 마법. 그 촉매는 마력이나 그 무엇보다도 눈부신 섬광이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네.》
한참을 그 광경을 조망하던 강검마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역천의 마안’과 더불어 이 힘도 이제부턴 이건 네 것이다. 나는 빛의 속도를 넘지 못했지만, 너는 넘을 수 있을 거야.》
벼락 폭풍이 어둠을 저미고, 일대가 격동치는 가운데 그의 눈빛만은 고요했다.
《나의 친우 발로르 호아킨이 너를 어째서 선택했는지, 신을 가장한 저 거만한 놈들에게 보여 줘라.》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촛불이 훅 꺼지듯 암전됐다.
그러는 와중에도 비명이 뒤엉킨 우렛소리는 계속해서 귓가에 맴돌았다.
참으로 듣기 좋은, 단잠에 빠지기 좋은 소리였다. 자장가처럼.
* * *
[【라이칸】의 능력을 흡수 및 개방합니다.] [더불어 ‘검신(劍神)의 가호’의 스텟이 고루 상승했습니다.] [육신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정신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인의 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동화율이 대폭 상승합니다.]지이잉-
[동화율이 100%의 임박이 곧입니다.]* * *
회랑에서 좌선하고 있던 쿠아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그가 느리게 눈을 떴다. 은빛 눈동자에서 광기 한 줄기가 스쳤다.
“드디어 때가 왔군요.”
쿠아른을 호위하고 있던 심복 헤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그녀 곁에는 레온이 있었다. 그는 창자라도 뒤틀린 듯 괴로운 낯을 하고 있었다.
“검마… 너는… 기어코…….”
레온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빨 자국이 선명한 입술로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책망하는 투였다.
“…….”
헤르야는 그런 레온을 한심하다는 듯 흘겼다. 그러다 곧 홱 몸을 돌렸다.
그녀 앞으로 복마전이 펼쳐져 있었다. 군체가 우뚝 솟은 재단을 올려다보며, 광활한 마경의 지평선 너머까지 우글거렸다. 마왕군이었다.
마족들은 살의와 악의로 뭉쳐진 시뻘건 안광을 빛냈다. 목줄이 차인 짐승처럼, 송곳니를 드러내거나 침을 질질 흘렸다. 피를 갈망하는 으르렁거림이 간헐적으로 들려 왔다.
“마경의 왕과 신께서 돌아오셨다.”
헤르야가 입술을 떼었다.
“인계로 진격할 것이다.”
이윽고 선전포고 떨어졌다. 잠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뒤늦게 마인 하나가 턱을 치켜들며 울부짖었다.
아우우우……!
이를 시발탄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달밤의 늑대처럼 길게 울었다. 장엄한 포효성은 검은 태양에 닿을 듯했다.
* * *
그로부터 이주일이 흘렀다.
영웅 협회 본부, 부협회장 창성의 집무실.
콰앙! 집무실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는 성 부장이었다. 의수와 의족을 완벽히 적응했는지 동작에 위화감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힘겨운 기색이었다. 그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숨을 헐떡였다.
“부협회장님!”
호흡을 추스를 새 없이 성 부장이 소리쳤다. 부협회장 창성은 순간 황당했다. 위계와 절차를 목숨같이 여기는 성 부장이 노크도 안 하고 방문한 경우가 처음이어서였다.
“…무슨 일인가?”
당황은 잠시였다. 창성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었다.
성 부장은 4군단장 퍼머쉬의 침공 소식에도 나름 의연했었다. 전투 인원은 아니나 담 하나만큼은 창성이 인정한 사내였다.
그랬던 성 부장이 이런다면 필히 무슨 사건이 터졌다는 방증. 그것도 여간한 일은 아닐 것이었다.
“허윽, 허윽.”
성 부장이 대뜸 흐느꼈다. 그는 완전히 패닉에 빠져서 의수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졌다.
“마, 마마, 마왕군이.”
그가 대문니를 딱딱 떨었다. 자칫하면 혀를 깨물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용케도 말을 내뱉었다. 하도 더듬어서 토막 난 문장이었지만 말이다.
“…마마, 마왕군이 집결했답니다!”
창성의 얼굴에 쩌적- 금이 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동공이 소멸할 듯 작아졌다. 용맹함의 상징인 그마저도 눈꺼풀을 파르르 떨어 버렸다.
“그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성 부장이 헛구역질하며 대답했다. 그의 턱은 타액으로 끈적하고 축축했다.
“…하와이로부터 긴급 전보가 왔습니다. 게헤나 게이트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마경으로 파견조를 보냈더니… 그들이, 마왕군이 군집하고 있었다고…….”
그때 창성이 성 부장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경황없는 성 부장의 어깨를 붙들었다.
“정신 차리게!”
쩌렁쩌렁한 외침에 성 부장이 눈을 끔뻑끔뻑했다. 넋 나갔던 눈빛에 이채가 깃든 건 동시였다.
고개를 들었다. 창성이 지엄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예견했던 일 아닌가.”
창성이 말했다.
“다만, 그 시기가 너무 앞당겨져서 나도 놀랐네만……. 일반 시민이면 몰라도, 우리는 공황에 빠져선 안 돼.”
암석 같은 주먹으로 성 부장의 가슴팍을 툭툭 가볍게 쳤다.
“자네는 비록 영웅은 아니지만, 배짱 하나만큼은 워리어급 못지않네. 그러니 추태는 이쯤하고 정신 차려. 보고를 마저 하게. 그러다 혀 깨물 것 같으니.”
창성도 무서웠다. 그도 사람이다. 남들보다 좋은 핏줄을 지니고 태어났을지언정, 감정에 지배당하는 나약한 생명체다.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용기와 공포는 표리일체. 역설적으로 용기는 절망의 순간에 비로소 피는 꽃. 절망이 클수록 용기의 가치가 빛나는 법이다.
“형님…….”
“자네가 나를 형님이라 부른 건 입사 이래 두 번째구만그래, 만취한 이후로. 그때 상사한테 대판 깨졌다지?”
창성이 호탕하게 웃었다. 성 부장의 떨림이 멎었다. 집무실에 고였던 부정적인 기운이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보고 다시 드리겠습니다.”
“좋아. 이래야 내 아우지.”
성 부장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의수와 의족의 움직임은 절도가 있다.
“마왕군이 인계로 진격하고 있는 건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그들이 인계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이 주는 걸릴 것으로 사료됩니다. 게이트를 파괴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정확히 15일 정도가 남았습니다.”
“음. 현황은 그렇군. 천만다행인 건, 우리도 나름대로 대비해 놨다는 거군. 그럼, 그들이 개전을 선포한 목적은 뭔가?”
“목적은 아직 확인된 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여로를 추적했을 때 행선지를 나름대로 특정했습니다.”
“말해 보게.”
성 부장은 말하기에 앞서 침을 삼켰다. 문득 한 얼굴이 떠올랐다. 거짓말처럼 평정심이 깃들었다.
‘왜 그분을 생각 못 했을까?’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인간은 더 이상 나약하지 않다. 마족의 ‘마’ 자만 들어도 오줌 지리던 시대는 갔다.
‘창성, 검제, 현자, 만력, 절궁, 그리고…….’
구세대의 영웅들. 그리고 새 시대를 책임질 신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인류와 마족의 눈높이는 대등하다. 700년 전에 그랬듯이.
갑자기 어깨에 힘이 실렸다. 아직 남성 갱년기가 올 나이가 아닌데, 감정 변화가 잦다. 괜히 어렸을 적에 울다가 웃으면 털 자란다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맴돌았다. 이러다 털보 되겠네.
성 부장은 웃었다.
“마왕군의 목적지는 호아킨 아카데미.”
그리고 보고를 이었다. 어미는 힘을 주어 강조했다.
“천검님이 계신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