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8화(28/300)
28화 준비 (3)
아카데미의 하루는 힘찬 뜀박질로 시작한다.
이원빈 교관의 생도 전원 대머리 만들기 조례 훈련에도 적응된 지 오래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느새 나는 아카데미에 잘 녹아든 걸 넘어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기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목소리가 작다. 다시!”
““““예!””””
기세 좋은 대답과 구령을 외치는 생도들. 이렇게만 보면 항상 하던 아침 훈련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클로이는 연무장 한편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옆에 철제 목발을 세워 놓고 내 쪽을 향해 손짓한다. 나는 힘없는 맞손짓으로 답한 후, 구보의 후미를 도맡았다.
선두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생도를 이끄는 사내가 속도를 줄이며 내 옆에 달라붙었다.
“발이 느리군. 시험 때 다리도 다친 건가?”
“아닙니다.”
양쪽에 삼선이 그려져 있는 초록색 활동복. 원래라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복장마저 이 사내가 입으니, 고가의 기능성 운동복처럼 멋이 들어있다.
슬쩍 보이는 운동복 안쪽에 부풀어 오른 근섬유들.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네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적으로 균형 잡힌 육체였다.
게다가 흠잡을 데 없는 반듯한 이목구비의 미노년. 소싯적에는 숱한 여심을 뒤흔들었음이 분명하다.
검제 지크프리트 폰 니벨룽.
반세기 전, 4군단장 바스몬 토벌 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사실상 인류 최강의 전력이라 평가받는다.
그나마 무력으로 비견되는 인물이 있다면, 창성(槍星) 리차 드 뮈라 정도이려나.
하지만 창성은 능력치가 힘에만 몰빵된 인물인지라 일신의 완력 하나만큼은 그가 우세할 거라 보는 이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검제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검제는 ‘기적의 가호 M’의 후막인 2차 인마대전에서는 시조의 영웅의 오른팔이자 초대 검성(劍聖)이었던 아론 니벨룽의 고유 명사였던 검성 칭호를 이어받을 사내다.
뿐만 아니라 후일 레온의 검 스승이 되면서, 스토리 중반부부터 급격히 비중이 늘어나는 인물이다.
‘검성(劍聖).’
나중에 가서도 주인공 버프를 둘둘 두른 레온 반 라인하르트조차 검성의 칭호는 끝끝내 사사 받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두 글자를 닉네임 옆에 달기 위한 유저들로 커뮤니티의 온갖 게시글이 달렸더랬지.
하지만 칭호 획득에 성공했다는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한 유저가 게임사에 문의로 넣고 받은 회신을 캡처해서 올렸는데, 문장이 참 가관이었다.
『주인공 레온 반 라인하르트의 그 칭호 획득은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차기 검성 지크프리트.
그가 칼자루를 쥘 때면 모두가 경외에 찬 눈으로 그를 우러러보았다. 사나이의 낭만을 그대로 구현화시켜 놓은 반열에 오른 백전노장의 검사.
…근데.
모두의 선망의 대상인 검제가 일개 아카데미 생도인 나와 발을 맞춰 주며 구보를 뛰고 있다. 그의 목에 걸린 금속 호루라기가 방울처럼 흔들거렸다.
이 상황을 굳이 비유하자면, 국군 참모총장 격인 포스타와 사이좋게 나란히 연병장을 돌고 있는 것, 체감은 그 이상처럼 느껴진다.
군필자라면 뒷덜미가 빳빳해질 만큼 소름 돋는 상황일 것이다.
그걸 피부로 겪고 있는 나는 어떻겠는가? 군대를 안 가 봤으면 몰라도 만기 전역한 나로선 정말 난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부담감에 호흡마저 고르게 잡히지 못한다. 정수리부터 흐르는 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우직한 체격의 이원빈 교관마저 이쪽을 바라보며 노심초사 눈치를 살피고 있다. 생도들이 쏘아 대는 질투 섞인 눈초리는 덤으로. 나는 혀를 짧게 차며 그 시선들을 흘렸다.
“전사의 기본은 체력과 지구력에서 나온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전사라 할지라도 튼튼한 육신과 억센 끈기가 없으면 본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 이런 사소해 보이는 훈련들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것이지. 요령 피우지 말고 제대로 따라오게.”
“…네.”
라떼의 냄새가 물씬 나는 말투. 말꼬리를 흐리자 검제는 표정을 굳히며 일갈했다.
“목소리가 작다. 아직 엄마 젖을 다 못 떼고 온 건가!”
“시정하겠습니다!!”
“좋다.”
검제는 성량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엄청난 속도로 선두로 뛰어나갔다.
일으켜진 흙먼지가 뒤늦게 흩날렸다. 휘리릭 하는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생도들은 쥐 떼처럼 쪼르르 검제의 뒤를 쫓았다.
일흔이 넘었을 텐데 좋은 보약이라도 지어 먹는지 지친 기색 하나 없다. 현자 메디아야 고유 가호를 항시 발현해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지만, 검제는 노쇠를 따돌리기라도 하는 듯 펄펄 날아다녔다.
‘나이를 거꾸로 먹나?’
나는 머리를 흔들어 몰려오는 잡념들을 털었다.
애당초 이 양반은 게임에서도 노출을 극히 꺼리는 신비주의적인 인물이다. 근데 이상하리만치 나와는 만남이 잦았다.
난다 긴다 하는 귀족들조차 말 한번 붙여 보려 고개를 조아릴 정도인데 나한텐 동네 마실 나가는 것처럼 찾아온다.
입학식 때도 그렇고, 며칠 전에도 마찬가지다.
입원할 때마다 꼬박꼬박 문병하러 온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랑(狼) 클래스의 공동 주임 교관 자리를 꿰차고 있다.
이유라도 알면 덜 억울할 텐데, 과묵하기로 유명한 저 양반이 알려 줄 턱이 없다.
첫 시험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일상으로 복귀하나 했더니.
이변도 이런 이변이 없었다.
차츰차츰 틀어지기 시작한 기적의 가호 M의 메인 스토리가 제대로 엇나가 버린 것이다.
“…하.”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가슴에서 울컥거리는 불안함 때문에 흐릿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구보 훈련이 끝난 뒤, 모든 생도는 연무장의 흙바닥에 앉아 검제를 올려다보았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망울들.
뭐가 그리 신났는지 뺨을 씰룩이는 생도도 있고, 침을 꼴깍이며 그의 입술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생도도 있다.
심지어 용과 성 클래스에서도 검제를 구경하려 수업을 땡땡이친 무리까지 보였다.
검제는 팔짱을 끼며 생도들을 쳐다봤다. 굳은 얼굴에는 노건한 인자함이 묻어났다.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그들을 가늠하듯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생도들은 검제가 제발 자신을 봐주길 기도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검제가 이지적인 음성으로 말을 뗐다.
“지식을 이용해 적을 상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현장에선 대개 생각만큼 머리가 따라 주지 않는다. 마수의 공격은 제군들이 생각할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 말이다.”
검제는 이원빈 교관을 향해 작게 고갯짓했다. 이어서 이원빈 교관은 갖가지의 철제 무기들을 가져와 바닥에 깔았다.
기본적인 양날 검부터, 창과 손도끼, 활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어째서인지 다이쏘 사시미도 무기의 틈바구니에 껴 있었다.
“현장 실습을 제외한 훈련에선 앞으로 개인의 무장 사용을 엄금한다. 대신 이 앞에서 손에 맞는 무기를 집고 길들여라.”
듣고 있던 면면에 경악이 번졌다.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무장은 그들의 분신과도 같은 것.
그런 무장 사용을 금지하겠다는 검제의 엄포는 팔 한 짝씩을 내놓으란 말이나 다름없게 느껴질 터다.
검제의 말에 잠시 생도들은 웅성거리더니 피어싱한 남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질문했다.
“검제님, 질문이 있습니다. 어째서 무장 사용을 금하는지 이유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가문으로부터 물려받는 무장을 손에 길들이는 편이 훗날을 도모한다면 맞다 생각합니다.”
남학생의 맹랑한 질문에도 검제의 얼굴에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 따윈 없었다. 오히려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잡혔던 미간 주름을 펴며 말했다.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기본이 중요하다. 높은 등급의 무장에 의지할수록 사용자는 기본을 소홀히 하고 단련을 게을리하게 된다. 그리고 무장의 성능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럴수록 무장의 사용법을 익혀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남학생은 이때다 싶은지, 겸양이 다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검제의 눈에 들어 보고 싶은 노란 심보가 훤히 보였다.
“아무리 좋은 무장을 소지하고 있다고 해도 사용자의 능력이 부족한 경우엔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인 법. 그리고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 이상.”
나는 기시감을 느껴 흠칫했다. 괜히 뿌듯한 마음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질문한 남학생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검제의 기운에 압도됐는지 추가적인 질문은 없었다.
“기본기를 숙달할 시, 무장 역시 자연히 손에 익는다. 일반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는 생도는 연말에 있을 클래스 승급 심사에서 고평가받을 가능성이 크다.”
“정, 정말입니까!?”
“장담하지.”
검제가 그리 말하자 생도들의 얼굴엔 상기된 기색이 만연했다. 그들이 속한 클래스는 랑(狼).
승급에 목말라 있을 이들에게 인류 최강인 검제가 친히 호언장담해 준 것이다.
생도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무장이 아닌 쇠로 만들어진 도구를 집어 들었다.
아직은 다소 낯선 감각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생도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키득키득 웃으며 요령껏 무기를 시험 삼아 휘둘러 보고 있었다.
뒤늦게 나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한바탕 휩쓸고 가고 남은 것들 이래 봐야 농기구 비슷하게 생긴 삼지창과 사시미 두 자루뿐.
나는 검지로 눈썹 어림을 긁적거리며 사시미 두 자루를 집어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그 모습을 검제가 곁눈질로 흘깃했다.
‘역시 저 양반이…….’
검제는 생도 전원의 손에 무기가 들린 것을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무기를 손에 익히기 위해 오늘은 생도 간의 페어링을 시행하겠다.”
단번에 생도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아무리 실전을 지향한다지만, 아공간도 아니고 싸늘한 날붙이로 대련을 한다는 건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대들은 시조 영웅, 발로르 호아킨 님의 유지를 이어 어엿한 군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위험 요소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전사로 성장할 수 없다.”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검제는 팔짱을 낀 채로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서로에게 칼을 겨눴다간 사이좋게 목이 날아갈 것이다. 그러니 페어링에 앞서 직접 대련 시범을 보이겠다.”
“헐, 검제님의 검을 볼 수 있는 거야?”
“미친, 너튜브로 밖에 못 봤는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제엔장, 검제님! 믿고 있었다구요-!”
남학생들이 휘파람을 휙휙 불며 환호했다. 웅성거림이 연무장 밖까지 들릴 정도로 컸다.
“조용, 조용! 다들 착석!”
이원빈 교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남학생들을 정숙시켰다. 하지만 가열된 청춘의 열기를 누그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원빈은 손으로 이마인지 정수리인지를 감싸며 한숨을 흘렸다.
나는 그에게 위로 한마디 정도 건네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검제와 같이 수업을 이끄는 것도 힘들 텐데, 지금은 시범이라지만 검제의 맞상대 역할까지.
유독 오늘따라 이원빈의 머리가 휑하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안쓰러웠다.
이원빈이 쭈뼛쭈뼛하게 양날 도끼를 잡았다. 그러자 검제는 손짓으로 그를 뒤로 물렸다.
이원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어서 검제는 고개를 생도 쪽으로 옮겼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내게 멈췄다.
“생도 강검마, 앞으로.”
검제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곧바로 다중의 눈길이 내게 집중됐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