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8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82화(277/300)
282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각지에서 이름난 영웅들이 몰려들었다. 집결지는 호아킨 아카데미. 마왕군의 최종 목적지로 확실시되는 장소였다.
비상 대책 회의로부터 고작 일주일 지난 시점. 하지만 영웅 대부분이 소집령에 흔쾌히 응낙했다.
징집에서 난관에 봉착할 줄 알았던 성 (부장 ▶)전무는 얼굴 주름이 펴졌다. 아무리 인류의 존속 위기가 달린 대전쟁일지라도, 귀족 출신 영웅들은 제 살길만 찾을 줄 알았다. 애초에 그런 족속이었다.
한데 그들은 자진해서 호아킨 아카데미를 찾았다. 그러고는 성 부장에게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하는 말의 얼개는 거의 비슷했다.
“천검께서 부르신 게 아닌가. 당연히 와야지.”
“협회나 국가 주도하였으면 안 왔을 걸세. 다만, 천검께서 부르시면 이야기가 또 다르지.”
“제 동생이 4군단장 퍼머쉬 침공 때의 생존자 중 하나입니다. 동생이 말하더군요. 천검님이 아니었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든 이들이 절멸했을 거라고. 동생은 비록 이번 전쟁에 참전할 몸 상태는 아니지만, 제가 대신해서 싸우겠습니다. 제가 대신 천검께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들은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이 아니다. 감정적인 호소로는 귀족은 권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덤덤히 멸족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귀족들이 이문을 중시하긴 해도, 그 이상으로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자긍심, 그리고 품위를 높게 친다.
이번 전쟁은 귀족이 최우선시하는 세 가지 전부를 충족시키는 상황이었다. 천검과 함께. 그 하나를 위해 그 오만방자한 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집결했다.
더불어 싸움터가 호아킨 아카데미라는 점 또한 그들이 뭉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청춘을 보냈던 장소가 잿더미가 되기 직전이었으므로.
강검마를 달갑지 않게 보는 영웅들은 ‘호아킨 아카데미의 보호’라는 명분 아래 모였다. 대의명분이야 어찌 되었건, 성 부장은 그들이 집합했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그리하여 널찍한 면적을 자랑하는 호아킨 아카데미는 드물게도 인원이 미어터지고 있었다. 인산인해의 구성원들은 생도는 하나 없이 전원 베테랑들. 하나같이 관록이 짙게 묻어나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겨울방학의 아카데미는 뜻하지 않게 북적거렸다. 그들 가운데 강검마와 면식이 있는 이들도 몇몇 있었다. 올 뮤트 칸 엘리자베스와 철각 마오 랑도 그중 하나였다.
“아, 철왕가에서 와 주셨군요! 랜슬롯컴퍼니에서도 오셨군요. 양측 다 응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성 전무가 그녀들을 반겼다. 올 뮤트는 꾸벅 허리를, 마오 랑은 포권을 취하는 등 각자의 방식으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성 부장. 아니, 이젠 전무님이군요. 승진 축하드립니다.”
“그러게요. 얼마 전까지는 과장직이라 들었는데 벌써 전무를 다셨네요. 일 년 만에 서너 계단을 훌쩍훌쩍 뛰는 승진이라니. 이거 저희 철왕가도 성 전무님께 잘 보여야겠어요.”
“어우- 두 분 다 그런 말씀 마십쇼.”
성 전무는 겸연쩍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제 능력에 비해 너무 막중한 역을 맡게 돼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세상에, 제가 전무라니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극구 사양했는데 이번엔 협회장님이 직접 임명하셔서 거절 의사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전무직만 맡았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성 전무는 이번 소집령의 총괄자였다. 전투 인력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일이 이리되었다. 어쩌면 전투 인력이 아니었기에 총괄 역할로 적임자였다.
실무자와 실력자가 확실하게 구분되었기에 다들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볼멘소리를 냈다간 도리어 속 좁은 사람 취급할 분위기였다. 덕분에 성 전무는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선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제가 귀한 분들 앞에 두고서 투정이나 부리고 있었군요. 가시죠. 최전선에서 싸우시는 영웅분들은 따로 회동을 준비했습니다.”
성 전무는 두 사람을 별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이들이 있었는데, 모두 쟁쟁했다.
‘검제, 창성, 폭군, 절궁, 만력…….’
올 뮤트는 입술을 축이며 면면을 눈에 새겼다. 그러는 사이 제 할 일을 마친 성 전무는 스리슬쩍 퇴장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가?’
구세대의 전설들이 한데 모였다. 올 뮤트는 생각했다. 이들에 비해선 자신은 한참 함량 미달이라고. 그런 그녀를 보며 마오 랑은 엷게 웃더니 귀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벌써 쫄면 마왕군 앞에선 어떡하려고. 그리고 아직 주인공은 등장도 전인데.”
듣고 보니. 그녀들 자리를 제외하고서 한 자리가 빈다. 저곳은 필시 그자의 자리일 터.
‘아직 안 오셨나.’
올 뮤트가 고개를 갸웃하자, 메디아가 어서 앉으라는 듯 손짓을 보내왔다.
“검마는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조금 늦는대. 두 사람 다 일단 와서 앉아.”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상석이 아닌 자리에 앉았다. 잠시 흐르는 정적. 과장 안 보태고 공기가 묵직하고 두꺼웠다. 이들이 풍기는 기백 탓도 있거니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음울한 분위기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일주일 후, 못해도 여기서 절반은 건사하기 힘들리라. 그게 누구인지는 특정할 수 없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메디아는 분위기 환기 겸 짝 손뼉을 쳤다.
“그건 그렇고, 살다 살다 이런 일이 다 있네. 내 제자들이랑 전쟁을 다 치르고.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예, 저희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대답은 마오 랑이 했다.
“학원장님과 다른 칠성 영웅분들과 함께한다 생각하니, 이번 일은 철왕가 대대손손 기억될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해야지 대대손손을 이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노곤한 인상의 여인, 메아인이 대화의 산통을 깼다. 메디아가 버럭 기함했다.
“언니!”
“내가 틀린 말 했어?”
“가부 간을 떠나서, 말을 할 땐 분위기를 파악하라고 몇 번을 말해. 설마 천 클래스 애들 가르칠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해? 안 되겠다. 이번 일 끝나면 언니의 해고를 진지하게 검토해야겠어.”
“쳇, 치사 빤쓰.”
“…….”
유치 뽕짝한 자매간의 대화에 마오 랑과 올 뮤트는 그만 입을 닫았다. 이건 뭐,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는 느낌이다. 그녀들뿐만 아니라 다른 칠성들도 창피한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끼이익.
포이즌 쌍둥이가 옥신각신하는 와중, 회동에 그토록 기다리던 얼굴이 들어섰다. 다름 아닌 강검마였다.
“다 모여 계셨군요.”
그의 출현과 동시에 쌍둥이는 낯빛을 굳히고, 늘어놓던 잡담을 주워 담았다. 올 뮤트와 마오 랑 또한 나오려던 인사말을 도로 집어삼켰다. 강검마의 기세가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원래가 검은 물질을 풀풀 풍기는 것 같았는데, 거기에 왠지 모를 마력이 더해진 느낌. 아는 얼굴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마인이라 오해했을 만한 흉흉한 기백이었다.
털썩.
강검마는 시선을 느끼며 아무렇지 않게 상석에 앉았다. 저 눈초리들이 뭘 묻고 싶은지 그도 잘 알았다.
‘왜 몸에서 마력이 묻어 나오는지 궁금한 건 알겠는데.’
하지만 당장엔 말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사태가 긴박하다. 하잘것없는 설명에 낭비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전쟁 중에 들통날 테니까.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
비밀이 많은 남자는 신비한 매력이 있는 법.
“죄송합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괜찮네. 가장 어깨가 무거워 좀 더 쉬어도 모자랄 판에, 노인네들 상대하게 해서 미안허이.”
창성이 사람 좋게 웃었다. 강검마가 오자마자 그의 입가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 마침 잘 왔네.”
검제도 한마디 거들었다. 당연히 포이즌 쌍둥이도 야단법석을 떨려 했지만, 바로 곁에 앉은 검제가 제지했다. 그녀들은 그 제지에 순응하여 말간 미소만 입꼬리에 걸었다. 절궁은 강검마를 흘겨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말은 없어도 뭐라 타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광경에 올 뮤트와 마오 랑은 순간 벙쪘다. 구세대의 전설들이 강검마를 띄워 주다 못해 비행기를 태우고 있으니. 그들은 권력에 굽실거린다기보단, 강검마를 정말로 경외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가 여태껏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그랬을 터다.
다만 칠성의 지엄한 모습만 봐 왔던 두 사람으로선 놀랄 만도 했다. 더불어 이들의 서열 관계를 시사하는 광경이기도 했다.
천검이 위, 다른 이들은 아래다.
그제야 강검마는 올 뮤트와 마오 랑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가 작게 눈인사했다. 두 사람도 엉겁결에 앉은 채로 고개를 조아렸다.
‘…천검을 전에 봤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머리를 다시 들기가 힘들다, 끈적한 위압감이 후두부를 지그시 누르기에. 강검마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압박감이 어마어마했다.
마오 랑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과연 그녀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얼마 안 있어 강검마란 존재는 쳐다도 못 볼 존재가 되어 있을 거란 그 예상 말이다.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이건 변수다. 상상을 훨씬 웃돈다. 나날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성장 운운할 수준이 아니다. 진화다.
그렇다. 강검마는 인간의 의태를 벗어던지고 그 너머의 무엇으로 진화했다. 이를테면 신인류. 그것이 이 인외의 존재를 부르는 적합한 단어일 것이다.
마오 랑이 전율과 공포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릴 즈음이었다. 시야가 잡히자 솜털과 닭살이 삐죽삐죽 일어선 것이 보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상태.
강검마의 존재감 때문? 조금 달랐다. 이 오싹함의 근원지는 맞은편이 아닌 후방이었다. 실제로 방금까진 분명히 없었던 기척이 등 뒤로 느껴졌다.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왔다. 낯이 차게 식은 탓에 땀이 평소보다 뜨끈뜨끈했다.
마오 랑은 눈동자만 굴렸다. 다들 경악이 차오른 눈빛으로 자신을, 정확히는 그녀의 너머를 쳐다보고 있다. 강검마만이 짜증 난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뭐지? 인사를 건네는 찰나의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마오 랑은 시선만 어깨 너머로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싸늘한 침묵의 원인이 자신의 등 뒤로 있었다.
백설기처럼 새하얀 피부의 미인. 하나, 그 미모는 도자기 인형처럼 인위적인지라 기묘하기 그지없다.
모두 그녀를 본 적 없기에 당황한 눈치였지만, 강검마는 예외였다.
쿠아른의 심복, 헤르야였다. 호아킨 테러 때와 마찬가지로 분신으로서 현현한 것.
‘저 새끼는 아카데미를 뭔 화장실처럼 들락거리냐.’
인과가 어떻든 이는 저 희멀건 놈의 고유 능력이겠지.
뭐가 됐건, 놈이 두 차례나 강검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암만 분신체라도 어지간히 간이 붓지 않은 이상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담력이었다.
이쯤 되니 강검마도 궁금했다. 오늘은 또 뭔 일로 유령처럼 묘연히 나타났는지가.
“전할 말 있으면 전해라.”
그래서 앞뒤 다 자르고 말했다. 막 무장을 뽑으려던 이들의 손이 멈칫했다. 그들은 대신 무장에 손을 얹은 채로 헤르야를 찐득하게 노려보았다.
헤르야는 무기질적인 표정 그대로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인사했다. 그럭저럭 흉내는 냈다. 근데 딱 거기까지. 인간 행세해 본들 결여된 자의는 채울 수 없다.
“쿠아른 님으로부터 전언을 전하러 왔습니다.”
강검마는 삐딱하게 턱을 괴고서 대충 까딱였다. 예로부터 불구대천지원수의 사절이라도 융숭히 대하는 게 예의였다. 일단 들어나 보자.
“이번 전쟁에서 인류를 완전히 멸족시킬 테니 그리 알…….”
입술이 떼어지기 무섭게 검광이 번뜩였다. 사시미 칼날이 하얀빛을 그렸다. 검로는 공기와 마찰해 퀴퀴한 타는 냄새를 풍겼다.
스겅.
백지장처럼 허연 머리통이 마오 랑의 등 위로 툭 굴러떨어지더니 노면과 충돌함과 동시, 우자작 으스러졌다. 머리와 생이별한 몸뚱어리가 먼지로 화한 건 한 박자 뒤였다.
“이런.”
모두의 동공이 커진 가운데, 강검마는 짤막한 탄식을 흘렸다. 사시미를 툭툭 무성의하게 털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