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8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83화(278/300)
283화 격려
누가 뭔 말을 꺼내기도 전, 회동의 구석. 조명의 사각지대인 그림자 속에서 시허연 신형이 불쑥 돋아났다. 표홀히 나타났다가 금방 목이 잘렸던 그 귀신이었다.
“뭔…….”
회동이 소리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구성원 모두가 백전노장이었지만, 사람인 이상 깜짝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을 제외하면 평균 나이가 70에 가까웠기에 별거 아닌 일에도 심장이 철렁였다. 세월의 무정함이었다.
“…사람 하는 말은 끝까지 들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헤르야가 구석진 응달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살짝 삐졌는지 말투가 뾰로통했다. 이 역시 ‘인간 흉내’였다.
“…….”
강검마는 그런 헤르야를 별 놀라는 기색 없이 흘겼다.
‘저거 마인이 아니라 진짜 귀신인 것 같은데.’
베는 맛이 심심했다. 해서 완전히 사라졌을 거라 생각은 안 했다. 설마 곧바로 재등장할 줄은 몰랐지만.
물론 그 정도로 심장이 철렁이거나 하진 않는다. 그는 아직 십 대. 팔팔한 청춘이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강검마는 툭툭 털던 사시미를 도로 검집에 꽂고서 일갈했다. 분신엔 칼질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넌 인간도 아니잖아. 왜 아까부터 자꾸 인간 행세야, 기분 나쁘게.”
흠칫. 모두로부터 스무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헤르야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 그중에서 가장 인간미 없는 눈빛이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기분 나쁘시다는 게 무슨 의미이신지…….”
“불쾌하다고. 단어 뜻까지 설명해 줘야 해? 하여간 이래서 공감 능력 모자란 놈들이란, 쯧. 이 사이코패스 새끼.”
흠칫. ‘사이코패스’란 단어에 일동은 약속한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살살 강검마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공감 능력 결여에, 사이코패스가 정녕 누구일… 여기까지.
“전서구면 전서구 역할이나 하고 꺼져. 그 못난 낯짝 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에라이, 이 쌍화차야.”
모욕 한 사발을 들은 헤르야의 표정에 미묘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포착도 못 할 변화가 일었다. 그녀의 눈썹이 씰룩인 것. 특히나 뒷말이 유독 세게 꽂혔다. …쌍화차.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혐언일 터.
헤르야가 이따금 암행차 인계에 흘러들었을 적마다 수많은 남정네가 치근덕거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의 미모가 빼어나서였다. 그런 그녀였다.
‘저자는 눈이 없는 건가?’
대관절 이토록 신랄하게 욕을 처먹었다. 이 상황과 감정이 몹시 낯설었다. 속에서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듯하고, 이마부터 정수리가 살짝 지끈거린다. 그녀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어슴푸레 느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티 내진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고 복귀하면 된다. 어차피 쿠아른 님께서 저자를 단죄하실 테니까.
헤르야는 화를 삭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인류를 완전히 멸족시키거나 그러진 않을 것이다.”
쿠아른의 전언 내지 통첩.
“인人과 마魔는 공생관계. 저울처럼 균형을 맞춰 살아가야 하는 관계다. 하나, 인류의 인구는 너무 큰 폭으로 불어났으며, 아름다운 푸른 별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반면 우리 마왕군은 어떤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마경에서 수백, 수천 년을 버텨 왔다. 하여 나 쿠아른은 마족 전체를 대변하여 말하는 바이다. 마족과 인간의 보금자리를 서로 바꿀 것이다. 더불어 60억 인구에서 우리와 같은 5천만으로 줄이리라. 후자에 관해선 걱정하지 말라. 내 친히 그 수를 줄여, 수고를 덜어 줄 터이니.”
워낙에 가구가 없고 넓은 회동인지라, 헤르야의 음성은 벽면에 튕겨 공허한 메아리를 남겼다. 마치 여러 번 곱씹듯 들으며 뇌리에 각인하라는 것처럼.
듣는 이의 반응은 당연히 좋을 리가 없었다.
“그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린가!”
검제가 벌떡 일어나 검을 뽑았다. 질세라, 창성도 벽에 기대 놨던 창을 집어 들었다.
“인류의 인구를 10분의 1로 줄이고, 우리를 마경으로 내몰아? 같잖은 소리를 하는구나!”
창성은 창날로 헤르야를 겨누었다. 뿌득뿌득 어금니 가는 소리가 거칠었다.
“잘 들어라, 귀신 계집. 쿠아른에게 가서 내 말을 똑똑이 전해라. 나, 리차 드 뮈라. 내 창에 맹세컨대 쿠아른의 멱을 딸 것이니 목 닦고 기다리고 있으라. 내 귀한 창에 천한 마족의 땟국물 묻는 건 사양이니.”
저 귀신 놈에게 물리적 공격은 무용하다는 걸 안다. 이것은 이를테면 조건 반사였다. 그들은 7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당신의 힘으론 어림도 없습니다.”
헤르야가 비죽 웃었다. 인간들은 타인을 조롱할 때 이리 웃는다지.
“사절입니다만, 주제넘게 한 말씀 드리죠.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쿠아른 님과 대치라는 게 성사되는 이들은 딱 둘입니다. 각성 상태의 만력, 그리고 천검. 이 둘 외엔 쿠아른 님의 옷자락도 건들지 못할 겁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침음을 냈다. 자존심은 상하나, 저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자존심 차릴 때가 아니다. 치기와 분노 대신 합리와 이성을 차려야 할 시점.
검제와 창성이 택한 건 침묵이었다. 그냥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고, 도끼눈을 뜨고서 헤르야를 노려보았다.
정작 헤르야는 그 살기등등한 눈총을 무시했다. 그녀의 관심은 오롯이 강검마에게 묶여 있었다.
아까부터 쭉 견지하는 저 표정, 무미건조하고 매사에 무관심한 듯한 저 눈빛, 삼라만상을 초탈한 것 같은 저 무색무취한 얼굴은, 내면 깊숙한 곳 헤르야의 호기심을 촉발했다.
공기의 농도가 진하다. 분노, 모멸, 원독 부정적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모는 가운데.
강검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네 얼굴.”
동시에 소용돌이가 뚝 그쳤다. 모두가 제 귀를 의심했으며, 경악에 잠겨 강검마를 쳐다보았다. 헤르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입을 벙긋거렸다. 네 얼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이 분위기에서 나올 말이긴 한 건가? 인간들과 조우하면서 여러 경험을 해 왔다. 처한 상황에 맞춰, 인간들의 태도나 반응 등을 어깨 너머로 훔쳐 배웠다. 덕분에 다른 마족들을 제치고 사절로서 파견된 것이었다.
헤르야는 자신 있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유연하게 대처하리라 자부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치욕으로 변하여 그녀의 뺨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녀가 진정으로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강검마가 한 번 더 말했다.
“네 얼굴.”
헤르야는 어쩐지 분했다. 여기 오기 전까진 그녀에게 저 말은 칭찬에 가까웠을진대,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모욕적이었다. 원래라면 소임을 끝내고 곧장 돌아가려 했지만 이대로는 속이 비비 꼬일 것만 같았다.
헤르야는 두뇌를 빠르게 굴려 적절한 대답을 찾아냈고, 바로 응수했다.
“반사.”
유치기 짝에 없는 단답.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아직 ‘유치하다’란 개념 감각이 없었다.
헤르야는 그 말을 끝으로 뒷걸음질로 그림자 안에 발을 담갔다. 그녀의 몸이 밑동부터 부서지기 시작했다.
몸의 무너짐이 턱까지 올라왔을 무렵, 강검마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덕담 건네듯 말했다.
“착한 전서구네. 적군한테 잘생겼다는 말도 해 주고.”
헤르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반대로 강검마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제야 헤르야는 알아차렸다, 강검마는 물리적 공격이 안 통한다는 걸 알고서 자신을 흠씬 욕보일 심산이었다는 것을.
마주한 적 없는 군상. 광인과의 첫 만남은 그녀에게 형언키 힘든 감상을 심어 주었다.
헤르야는 뭐라 반문하려 했다. 다만 제정신을 차리는 것보다, 몸의 붕괴가 훨씬 빨랐다.
그렇게 헤르야가 완전히 사라진 후로도, 그녀의 원통함이 그 자리에서 맴돌았다.
* * *
회동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즈음에서 성 전무가 타이밍 좋게 들어왔다. 다음 일정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한 방문이었다.
입장 직후 성 전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잠시 자리를 떠나 있던 사이 장내에 묘한 기류가 감돈다.
그가 당황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다들 얼굴색이 좋지 못하십니다만…….”
“별일 아닐세.”
절궁이 상황을 수습했다. 그나마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뭣하면 다음 일정을 내일로 미루셔도 됩니다.”
성 전무가 걱정스러운 듯 제안했다. 창성 쪽에서 머리를 탈탈 흔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일정을 유예하는 건 안 좋아. 불안감을 일으킬 수 있으니 말일세. 게다가 드론으로 촬영해서 전 세계로 송출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 적시에 하는 게 맞아.”
말은 그리하면서도 창성은 피곤한 기색을 여실 없이 드러냈다. 조금의 충격이 미처 가시기 전이라 그랬다.
‘네 얼굴이라니.’
그 어떤 저속한 욕설보다 상대가 기분 더러울 말이었다.
“…다만, 내 연설을 물려 줬으면 하군. 지금 했다간, 네 얼굴. 아니, 이상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말이야.”
“나도.”
“나도 오늘은 좀.”
“저도…….”
여기저기서 손을 올렸다. 결국 가만있던 나만이 손을 내리고 있는 상황. 흐름에 맞춰 손을 들려 하자, 모두가 나를 뜯어말렸다.
“자네는 해야지.”
“응, 검마 너는 해.”
“천검님은 하셔야죠.”
표정들이 왜 저래? 나는 묘한 시선들을 한 몸에 받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째 나한테 덤터기 씌우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나와 일곱 영웅 – 검제, 창성, 현자, 절궁, 만력, 철각, 올 뮤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 *
연무장은 만석이었다. 만석이다 못해 인파가 연무장 바깥을 테두리처럼 빙 에워쌌다.
그럴 만했다. 수용 가능 인원은 몇만인데 수십만이 총집결했으니. 무너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깨가 부딪치고, 서로 밀치고 밀쳐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옥신각신하는 이는 없었다.
지상뿐 아니라, 하늘도 바빠 보였다. 드론들이 벌 떼처럼 진을 이뤄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영웅 외에 인원은 입장을 통제한 탓에 매체는 드론을 이용해 연설 장면을 전 세계로 송출했다.
그 수많은 시선의 중심에 한 소년이 마이크 앞에 섰다. 오색찬란한 머리 색이 즐비한 가운데 흑안과 흑발은 더욱 눈에 띄었다.
크흠.
소년은 기침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세계 방방곡곡 모두가 집중했다. 철새 무리도 눈치 있게 푸드덕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정적이 배경처럼 깔렸다. 수백만이 함께한다고는 믿기 힘든 적막이었다.
“‘강검마, 너는 우리 가문의 자랑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소년의 목소리가 겨울의 찬바람을 갈랐다.
“아마 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자리해 준 모두가 들은 말일 겁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이 호아킨 아카데미는 단순한 학교가 아닙니다.”
그 순간 모두가 기이한 착시에 사로잡혔다. 세상이 오직 소년을 조명하듯 그 주변은 부드럽게, 그의 모습만은 선명히 보였다. 연무장을 그득 채운 고요가 그의 음성을 소리가 닿기 어려운 곳까지 구석구석 퍼뜨리게끔 도왔다.
“시조의 영웅과 칠걸은 어째서 이 아카데미를 세웠을까요. 전쟁을 대비키 위해선 후학 양성보다 게이트를 견고히 축조하는 게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소년의 스승이 제자를 위해 남긴 유산.
“그들은 알았던 겁니다. 틀어막아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후대를, 미래를, 저희를 믿기로 한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 집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꼭 지키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소년은 확고한 목소리로 말한다.
“함께합시다.”
모두가 무장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성 대신 서늘하게 벼려진 무장으로 그 뜻에 찬동했다.
마침 함박눈이 내렸다. 비죽비죽 솟아난 창칼에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때가 때인 만큼 하늘이 그들을 조용히 축복하는 듯한 정경이었다.
소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항시 맴돌던 그 말은 스승이 그에게 전하는 격려가 아닐까 하는.
“우리에게.”
그래서 같은 문장으로 이들을 격려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모름지기 자식은 부모의 거울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