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85)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85화(280/300)
285화 결전 (1)
하이 엘프. 나이, 200 이후로는 세어 보지 않음. 그녀는 일족의 젊은이 중 단연 으뜸이라 여겨지는 마법사다.
찻.
그녀는 착지한 직후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시취의 비린내가 진동했다.
‘많이도 죽었군.’
이기어검에 일족의 미래를 책임질 마법사 다수가 절멸했다. 마법으로 방어하려 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강검마의 검은 마법 자체를 베어 버리는 신박한 검술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만 목숨을 부지한다면 하이 엘프 일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죽었는데도 아직 많이 살아 있어.’
하이 엘프의 생명력은 질기다. 불로불사 중 ‘불사’는 아니나, ‘불로’는 맞다. 200살 즈음인 그녀도 일족 내에선 갓 성인식을 마친 풋내기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오래 살아온 만큼 어느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오랜 옛날 하이 엘프 내 마찰로 인해 떨어져 나간 패배자들. 속칭 다크 엘프들도 보란 듯이 무럭무럭 세를 불렸다.
‘우리 하이 엘프는 인계에서 더 큰 영달을 누릴 거야.’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활약이 두드러진다면 쿠아른 님께서 봉토를 하사해 주실 터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죽여라, 죽여!”
“진용을 짜서 움직여라! 마법은 차폐물에 숨어 피하고, 시전이 끝나고 1초 후에 전진해라!”
사방팔방에서 금속성과 마법이 사납게 맞물린다. 대체로 마족의 마법이 작렬하고, 인간이 죽자 살자 막아 내는 형세였다.
다만 영웅들의 수세가 생각 이상으로 튼튼했다. 팔다리가 붕붕 허공을 날아도 목숨이 다하는 찰나까지 방패를 내리지 않는다. 죽더라도 무장을 그러쥔 채 서서 죽는 놈도 있었다. 숨이 끊기기 직전 옆 사람에게 마지막 숨과 함께 유언을 토해 냈다.
“날… 기억해 줘……!”
“젠장, 빠른 발의 조세프. 내가 너를 기억할게!”
그 용맹함을 직접 본 영웅들은 사기를 충전하며, 항전을 계속했다.
죽고 죽는다. 허무의 반복 및 연속성.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구분이 희미하다.
하이 엘프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오래전부터 소원하던 현장이 목전에 있다. 몸이 달아올랐다.
‘그래. 발악할수록 재밌지. 가만히 목 빼 놓고 기다리면 사냥할 맛이 준다고. 더더, 발버둥 치거라, 천한 인간들아.’
순간 길쭉한 귀가 곤충의 더듬이처럼 깔짝였다. 인기척을 느낀 것. 하이 엘프는 고개를 돌렸다.
저벅.
옆으로 웬 늙고 쇠약해 보이는 엘프가 붙었다. 하이 엘프는 머릿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서로 얼굴이 익었다. 한데 이 엘프는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다.
‘아. 설마!’
그녀는 부랴부랴 예를 갖췄다.
“장로님이십니까.”
이분은 ‘한낱’ 마을 사람이 아니다. 못해도 장로급. 그들은 평시 네피림 신전에 기거하므로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
노부는 그녀를 일별하고는 전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생각보다 잘 싸우는군.’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마법을 시전하는 마인, 악을 바락바락 써 가며 응전하는 인간.
인간의 피는 붉고, 마족의 피는 푸르다. 색다른 피가 섞인 자줏빛 혼합액이 지면에 스며 내렸다.
‘피는 저리 잘도 섞이건만.’
정작 피의 주인들은 섞이지 못하고 상잔하고 있다.
“…하아.”
착잡한 심정에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 젊은 하이 엘프가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그녀는 노부를 장로라 확신했다. 살이 저만큼 토실토실 올라왔다는 것은 그 지위의 방증. 투명한 피부에는 기름이 좔좔 흘렀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장로님?”
“죽일까, 말까. 그것이 고민이네.”
노부가 곱씹듯 말했다. 하이 엘프가 웃으며 아양을 떨었다.
“신전에서 지내시느라 피에 목이 마르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침, 쿠아른 님께서 은혜롭게도 기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서 피를 취하시여 갈증을 해소하소서.”
“은혜로운 쿠아른이라…….”
노부는 슬쩍 하늘을 보았다. 쿠아른이 가부좌를 튼 채로 관망 중이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저놈의 본 목적은 전쟁이 아니야. 저 눈빛은, 그 너머의 것을 보는 눈.’
노부는 다시 시선을 내려 하이 엘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재차 물었다.
“은혜로운 쿠아른. 정녕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희 마족을 해방코자 인계와의 통로를 뚫어 주셨으니까요. 그뿐만인가요? 이번 전쟁이 끝나면 공적에 맞게 봉토를 분배하신다는 공명정대함까지. 아, 물론 마족 내의 배신자 척결도 잊지 않으시겠죠. 이를테면, 드래곤 놈들이나 다크 엘프 놈들 같은 경우요.”
하이 엘프가 뿌득뿌득 이를 갈았다.
‘다크 엘프.’
하이 엘프에겐 특히나 민감한 주제였다.
다른 마족은 같은 ‘엘프’라는 이유로 싸잡아서 비난했다. 때문에 하이 엘프들은 칼을 갈았다. 이번 전쟁에서 천검 강검마의 멱을 따 그 오명을 씻어 내리라.
“아무튼. 장로님 저는 이만 형제들과 합류하겠습니다. 장로님께도 쿠아른 님의 은혜가 있기를.”
노부가 고개를 낮게 끄덕였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나도 확신이 섰어.”
대답을 들은 즉시 그녀는 자리를 박찼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서 저 뻘건 피로 목욕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사활을 거는 싸움터일지라도 그녀에겐 소풍이나 다름없다.
화르륵!
그녀는 명치 주변의 감각이 뻐근함을 느꼈다. 목구멍에서 피가 왈칵 치밀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동자를 내렸다.
가슴에 바람구멍이 뚫려 있다. 화염이 느글느글 끓으며 둥그런 테두리를 그렸다. 그 너머로 동그랗게 오려진 풍경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늙수그레한 엘프가 설렁설렁 다가왔다.
“자네와 대화하기 전까지 어느 쪽에 붙을지 계속 고민했네. 솔직히 말해서 마족 측에 붙으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
하이 엘프의 무릎이 무너졌다. 늙은 엘프는 덤덤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근데 자네가 내게 확신을 줬어. 마족 측에 붙어도 어차피 쿠아른 손에 척살당한다고 쐐기를 박아 주었지. 그럼, 어찌하나. 반대와 편 먹을 수밖에.”
“너, 너 이새끼. 누구야…….”
하이 엘프가 목소리를 짜냈다. 마치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늙은 엘프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지어졌다.
“로그. 그대가 그토록 경멸하는 다크 엘프의 수장된 자.”
로그의 다음 손짓이 떨어졌고, 그것이 하이 엘프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녀는 분홍빛 내장을 쏟으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동공에서 생기가 꺼지고, 숨결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생생한 비명과 고함이 길쭉한 귀를 타고 흘러들었다.
“후. 결국 일이 이렇게 됐구먼.”
로그는 숨을 고르며 어딘가로 턱짓했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하이 엘프의 틈바구니에 숨어 있던 다크 엘프들이 마족을 공격했다. 기습에 특화된 그들은 진용의 허점을 영리하게 노렸다.
“캬악!”
영양 만점 콩고기를 섭취했기에 그들의 피부 빛은 우유처럼 뽀얬다. 겉으로 보기엔 하이 엘프와 똑 닮아 있었다. 유심히 보아야 미세한 차이를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 한가롭게 남의 상판 구경할 겨를 따위는 없다.
살육에 취해 신이 나 있던 마족들은 당황했다. 적아가 뒤얽힌 상황. 같이 잘만 싸우던 하이 엘프가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뒤통수를 쳤다.
앞에서는 영웅들이 노도와 같이 전진한다. 마족들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세가 분산됐다. 전방과 후방을 동시에 살펴야 했다.
“이, 얍삽한 귀쟁이들. 결국은 배신했구나!”
그리 외치며 오크가 몽둥이로 애먼 하이 엘프의 머리를 깨부쉈다. 입술 바깥으로 튀어나온 오크의 엄니로 핏물이 튀었다.
으직!
인정사정없는 손속. 오크와 엘프는 본디 사이가 좋지 않다. 이번만 아슬한 일시적 동맹일 뿐.
“자, 잠깐! 우리는 배신자가 아니라……!”
오크는 두 번째 머리도 격파했다. 새빨갛게 변한 눈동자. 그가 콧김을 푹푹 뿜으며 포효하듯 일갈했다.
“으갸아아아아! 귀쟁이. 죽인다!”
그 오크를 시작으로, 오크 무리는 두더지 잡듯이 길쭉한 귀를 찾아 되는 대로 머리통을 으깼다.
“빌어먹을, 이 머저리 놈들!”
어쩔 수 없이 하이 엘프들도 반격했다. 이대로면 저 멍청한 돼지 새끼들한테 다 죽는다.
‘어떤 놈들이…….’
하이 엘프 장로(진)가 눈에 불을 켜고서 이 사단의 원인을 찾았다. 그러던 중, 천 쪼가리로 귀를 가린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놈들이다!’
다크 엘프들이었다. 그들은 협회로부터 제공받은 귀마개로 귀를 숨겨 몽둥이찜질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장로(진)가 무어라 외치려 했다. 우악스러운 몽둥이가 그의 머리를 주저앉혔다. 강냉이가 튀고, 압력이 눈알을 밀어냈다. 즉사였다.
장로(진)의 눈알이 도로로 굴러 로그의 발치에서 멈췄다. 시신경이 끊겼기에 정보 전달은 못 하지만, 로그의 입가에 흐르는 조소는 확실하게 응시했다.
“그러니까 줄을 잘 서야지.”
다크 엘프. 배신을 일삼는 자들. 그들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 * *
다크 엘프 섭외는 내 나름의 도박 수였다. 그들의 배신의 역사는 유구하다. 알기론 엘프 사이에서 쫓겨난 까닭도 그 때문이었던가.
해서 성 전무는 전쟁 전날까지 나를 설득하려 애썼다. 다크 엘프는 믿을 수 없다. 변수다. 그러니 뇌옥에 처박아 둬야 한다. 설득의 골자는 이러했다.
나는 내 결정을 밀어붙였다. 영웅들이 총집결했다 한들 전황은 불리하다. 그럴 바엔 도박이라고 하는 게 낫다. 그것이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
다소 무책임해 보일 수 있는 결정이었다. 그래도 뭐 어때.
당초부터 마족들은 결속력이 탄탄하지 않다. 그 점을 이용했고 어찌 되었든 내 도박은 먹혀들었다. 결과로 증명했다. 내 선택은 옳았다.
놈들의 관계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심지에 불만 붙이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조마조마한 관계다. 목적이 일치했기에 힘을 합쳤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심지에 자그마한 불씨가 붙었다.
다그닥, 다그닥.
바닥을 헤집는 말발굽 소리가 났다. 인마人馬 켄타우로스 무리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히 돌진해 오는 것이다.
“으랴!”
놈들은 요컨대 마족 측의 기병이다. 경이로운 기동력이 놈들의 자랑이다. 저 말발굽에 짓밟히면 떡갈비처럼 다져지겠지.
근데 속도전이면 상대가 좋지 않다.
나는 밀어내듯 땅을 박찼다. 가속했다. 일직선으로 쭉 나아갔다. 켄타우로스 무리가 순간 주춤했다. 맞부딪쳐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놈들은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내 뜻에 응하겠다는 듯이 더 거칠게 투레질하며 두 쌍의 다리를 움직였다.
충돌 직전. 나는 눕듯이 몸을 젖혀 바닥에 미끄러졌다. 자세를 한도까지 낮췄기에 수많은 말발굽만이 시야에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수백 쌍의 말발굽이 헛돌았다.
자욱한 흙먼지 탓에 시야가 흐리다. 물론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심상의 영역’을 활용해 오감을 한없이 확장했기 때문이다.
쭉 미끄러진 난 이내 놈들의 한복판에 다다랐다. 놈들은 내 접근을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속력의 관성을 주체하지 못했다.
나는 아랫배를 튕기듯 일어서며, 동시에 무라사메의 노끈을 길게 붙잡았다. 그러며 하단에 만월의 검로를 그렸다. 칼날이 독사처럼 말 뒤꿈치로 콱콱 짓쳐 들었다. 절규와 피 분수가 산개했다.
히힝! 높이 추켜 드는 앞발. 뒷발이 끊겼기에 그들은 무게중심을 잃고 낙마했다. 무너진 개체 수는 어림잡아 서른. 병진을 엉키게 하기엔 충분한 수였다. 앞 발목이 잘린 놈들은 앞발로 날뛰며 자신의 진영을 헤집었다. 불침 맞은 생마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장면이다.
“찔, 찔러!”
놈들도 허겁지겁 맞서려 했다. 하지만 서로 경로가 꼬여 몸을 부딪치기 일쑤였다. 실타래처럼 어지럽게 성긴 진영은 정비하는 데 한참 걸리다. 그것이 기마병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허리춤에서 만년서리를 꺼내 쥐었다. 숨을 짧게 들이켰다. 곧장 벌러덩 누운 망아지들을 향해 호랑이처럼 달려들었다. 칼날이 햇빛을 직격으로 맞은 송곳니처럼 번뜩였다.
서걱!
이어지는 도륙. 온몸이 피로 젖었다. 인마는 잘못 쪼개진 쌍쌍바처럼 인人/마馬로 비대칭으로 갈려 나갔다.
도축이 이어질수록 살아 있다는 충만함이 차오른다. 가슴이 뛴다. 피가 끓는다. 오늘따라 사시미의 무게감이 좋다. 피를 먹을수록 칼날이 싱그러운 생명력을 내뿜는다.
아, 역시 사시미는 고기 잡는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