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9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91화(286/300)
291화 시조의 영웅 (2)
사장님은 축 늘어진 내 팔을 잡아당겨 몸을 바로 세웠다.
“얼른 일어나서 이거나 마시고 정신 좀 차려.”
사장님은 식탁 위에 있던 물컵을 내 쪽으로 밀었다. 그 손은 여전히 사시미를 꾹 쥐고 있었다.
‘여전하네.’
이 양반은 뭐를 하건 간에 칼을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지.
나는 사장님이 건넨 물로 죄지은 사람처럼 살금살금 목을 축였다.
“…으윽.”
그러자 절로 신음이 삐져나왔다. 물에 독이 들어서라기보다는…….
“왜. 빈속이라 물만 마셔도 부대끼냐?”
귀신같은 양반, 눈썰미도 여전하네.
“…예.”
나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사장님은 성난 불소 같은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가, 낮게 한숨을 흘렸다.
“잠깐 기다려. 간단히 뭐라도 좀 갖고 오마.”
사장님은 그 말만 남기고서 휙 몸을 돌려 주방을 향했다.
“이건 뭔.”
덩그러니 남은 난 일단 물부터 마저 벌컥벌컥 마셨다. 빈속을 냉수 마찰하니 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몽롱함이 싹 가셨다.
‘여기는 내가 사장님 밑에서 일을 배웠던 가게야.’
유심히 내부를 둘러보고 내린 결론이다. 나는 십 년 가까이 머물렀던 장소를 까먹을 만큼 늙지 않았다.
“이래 봬도 아직 앞길 창창한 열여덟 살…….”
나는 중얼거리다 말고 헐레벌떡 화장실로 달려갔다. 짧은 복도를 지나 어귀를 꺾으면 화장실이다. 복도 양옆에 쌓아 놓은 소주 바구니가 발가락에 치였다.
“윽.”
아프다. 와중에 속으론 감탄했다. 소품 하나하나가 너무 생생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프다는 발가락 찧기의 고통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순간, 내 눈이 대번에 커졌다.
“세상에.”
나는 긁듯이 내 뺨을 더듬어 보았다. 과거로 돌아갔냐고? 그랬으면 ‘아, 전부 내 망상이겠거니.’ 했을 것이다.
내가 이토록 기겁하는 까닭은 얼굴이 강검마 그대로여서였다. ‘기적의 가호 M’ 속 인물의 얼굴을 하고, 지구에서 일했던 가게로 돌아온 것이다.
혼란스럽다. 이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나를 평소처럼 대하는 사장님 때문에 더더욱.
“뭐 하냐?”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엄마 지갑에서 돈 훔친 자식처럼 퍼뜩 뒤돌았다. 사장님이 한심하단 눈빛으로 혀를 찼다.
“뭔 큰 볼일을 보시길래 화장실 문도 안 닫나 했더니, 한다는 게 얼굴 더듬기냐? 달라진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들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면 뭐.”
“…그냥 좀 정신이 없어서요.”
“정신은 뭔 놈의 정신.”
“…….”
이상하게 이곳에 온 후로 언행을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하게 된다. 본관이 서리 강씨라 그런가.
“적당히 해, 적당히. 그러다 뼈 삭는다.”
“아, 아니. 무슨!”
“밥 차려 놨으니까 와서 먹어.”
이번에도 내게 발언권은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거울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후에 화장실을 나섰다.
쿵, 딸깍.
문도 닫고, 불도 껐다. 엄한 일로 칼침 맞기는 싫었다. 진짜 맞아 봤단 소리는 아니고.
“오.”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오니 한 상 거나하게 차려져 있었다. 3첩에 – 사장님 기준에선 굉장히 후한 대접이다 – 된장찌개와 쌀밥.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상차림이다. 차리면서 그새 바닥까지 쓸었는지 유리 파편 하나 없이 깔끔했다.
“와서 앉아 먹어라.”
식탁에 먼저 앉은 사장님이 맞은편을 까딱 턱짓했다. 쭈뼛거리길 잠시 결국 시키는 대로 했다.
조심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다음 순간 숨 막히는 침묵이 일었다.
“…….”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밥알 개수를 세며 상황을 반추했다. 슬쩍슬쩍 사장님 눈치도 봤다.
“고사 지내냐?”
역시나 불호령이 떨어졌다. 사장님은 밥상머리 예절을 끔찍이 중시한다. 그거 때문에 여러 번 호되게 혼나 본 나이기에 잘 안다.
‘사장님 맞네.’
기적의 가호 M 세계가 내게 너무 가혹했던 걸까. 혹시나 하는 의심병이 기본값이다. 아무리 사장님이라도 ‘만약의 경우’를 염두에 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사장님이다. 나를 거둬 주고, 키워 주고, 재워 준. 눈 밑이 찌르르하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말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다른 감정이 튀어나오기 전 입막음을 한 것이다.
‘젠장. 그냥 쌀밥인데 더럽게 맛있네.’
공복이라 그런가, 아니면 그동안 실력이 느신 건가.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나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사장님은 그런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세상에 달관한 사람처럼 항상 눈빛이 식어 있다.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양반은 늘 저러니까.
‘하기사, 그 대단하신 시조의 영웅이신데.’
세상사 초탈했단 말이 썩 틀린 표현은 아니긴 하지.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
가만히 있던 사장님이 드디어 운을 뗐다. 젓가락이 어묵조림에 닿기 직전 정지했다.
“다 알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대뜸 나타나서는 알긴 뭘 알아. 아무것도 몰라.”
“아, 아니. 잠깐만요.”
탁,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잖아요.”
“여전히 상대방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 이기적인 말솜씨로군. 칼만 잘 쓰면 뭐 하나. 서비스 정신이 형편없는데.”
“그런 뜻이 아니라……. 사장님.”
“왜.”
“제 얼굴 어때요.”
사장님이 눈을 와락 구겼다.
“광증 도졌냐?”
“뭐요.”
“사내 새끼가 제 얼굴 어떠냐고 묻기나 하고. 달라진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사장님 눈에도 제가 이 얼굴로 보인다, 그 말이죠?”
“그치.”
“근데 왜 안 놀라요.”
“뭐에 놀라 줘야 하는데.”
“아니, 진짜.”
나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잊고 있었다. 그 무렵 손님들도 보통 이 무성의한 화술에 적응을 못 했었다.
‘그래도 나중에 가선 장인 정신이 깃든 얼굴이라면서 다들 그러려니 했었지.’
말하자면 사장님은 나한테 서비스 정신 운운할 처지가 안 된다, 이 말이다.
그 나물에 그 밥. 사장님도 나 못지않다.
그와 나의 차이점은 말이 적다 많다 정도다. 사장님이 전자, 내가 후자다.
‘어쩌면 내 성질머리 더러운 것도, 이 양반한테 내내 시달리면서 배운 것일 수도.’
아까 거울을 봤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 자신을 마주하는 기분이 든다.
이게 거울 치료 그런 건가? 기운이 쭉쭉 빨린다.
“넌 예전부터 겉은 어른인 척하지만, 알맹이는 늘 누군가한테 기대고 싶어 했어.”
사장님이 침중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봐라. 내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확신하잖아. 대화란 모름지기, 말뿐만 아니라 정서가 오고 가는 거야. 한쪽이 일방적으로 하는 건 통보고.”
아, 인제야 알았다. 이 양반은.
“나는 네가 처한 상황을 몰라. 그냥 어림짐작하고 있을 뿐이지.”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먹으면서 이야기해 봐.”
사장님의 입꼬리는 일 자(一) 그대로다. 그러나 나만큼은 설핏 번진 인자한 미소를 느꼈다.
“나의 고향,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세운 아카데미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 * *
사장님은 내 이야기를 눈을 감고 경청했다. 호아킨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일 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전부 털어놨다.
대충 정리하면, 한 해 동안 난 한 달에 한 번 꼴로 죽을 뻔했다. 과장 안 보태고 정말 그랬다. 중간고사, 버펄로 던전, 아발론 섬, 호아킨 참사, 게헤나 게이트 사수 작전…….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지 싶은 사건·사고들이다. 천운인지 악운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하늘이 도왔다고 할 수밖에.
그뿐이랴. 종국엔 심지어 레온에게 얻어맞고 우주로 날아갔다. 그것도 모자라 달에 처박히기까지.
거기서 기억이 끊겼고, 이곳에서 사장님과 마주 앉아 식사 중이다. 말하고 보니 인과 관계가 기괴하긴 하다.
‘근데 뭐, 지구에 있다가 기적의 가호 M 세계로 날아갔을 때도 인과 관계가 없다시피 하긴 했지.’
어느 날 눈 떠 보니 남의 몸뚱이 속으로 빙의했다. 트럭에 치였다든지, 옥상에서 떨어졌다든지 하는 촉발점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일 년 반 전에도 그랬으며, 지금도 엇비슷하다.
그리고 이 앞뒤 잘라먹은 인과의 원인이 눈앞에 있다.
시조의 영웅, 발로르 호아킨. 지구식 이름은 제법 구수한 호악현.
“…일이 그렇게 됐군.”
사장님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의미심장한 말과는 달리 어조는 심히 고저가 적었다.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요?”
“응.”
“저도 좀 압시다. 제가 왜 그 세계로 갔는지. 그리고 레온과 드X곤볼을 찍다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질문이야, 채근이야.”
사장님은 턱을 괴며 반문했다.
“질문이요.”
“말하는 싸가지는 채근인데.”
사장님은 허, 하고 탄식을 뱉은 다음에 말했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 답해 줄 수 없는 부분이야. 내 의지가 개입된 일이 아니거든. 내가 한 건, 그저 네게 내 고향의 형태를 띤 게임을 추천해 줬을 뿐이다.”
사장님은 소주로 혀를 적시곤 이야기를 계속했다.
“솔직히 나도 그땐 놀랐어. 정확히 내가 건립한 아카데미가 게임의 형태로 나왔을 줄이야. 아마 그것도 외신의 뜻이겠지.”
“…그럼, 저를 기적의 가호 M에 떨어뜨린 원흉은 사장님이 아니라 외신이다, 이거군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저 없는 동안 신선이라도 됐어요? 화법이 뭐 그리 두루뭉술해졌습니까. 듣는 사람 답답하게.”
“외신의 뜻엔 ‘확정’이라는 건 없다. 그분은 그저 관조자야. 개입을 극도로 꺼리시지. 다만, 그분이 개입할 정도면 세계선 전체가 위태롭다는 방증이야.”
말을 하다 말고 사장님은 소주잔을 손바닥 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래도 그걸 막기 위해 너를 그곳에 떨어뜨린 것 같은데…….”
안색이 얼큰한 것이 여전히 소주 한 잔에 취할 수 있는, 가성비가 극도로 좋은 몸이다.
“…세계가 망한 것 같군.”
사장님이 웬 종말론자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세계가 망해? 감이 안 잡힌 난 곧장 물었다.
“그게 뭔 소립니까, 세계가 망하다니.”
“말 그대로야. 세계는, 아니 세계선 전체가 멸망할 거다.”
“용사… 레온 반 라인하르트에 의해서 망한 겁니까?”
“아니.”
사장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검지를 세워 정확히 나를 콕 집었다.
“너.”
내 검지도 나 자신을 가리켰다.
“저?”
“응. 네가 멸망시켰다고.”
이해를 못 했다. 이상하게 변한 내 표정에 사장님은 소주잔을 치우고 맥주잔을 소주로 가득 채웠다.
“네 몸에 깃든 힘은 세계 하나쯤은 우습게 소멸시킬 정도란 건 알 테고.”
“예.”
사장님이 맥주잔을 입술에 갖다 대며 말한다.
“또한, 네 육신이 라이칸의 것이란 것도 알 테고.”
“예.”
벌겋게 취한 상태로 풍류를 즐기듯이 읊조린다.
“그 두 개를 조율, 내지 지탱하는 것이 네 인간성이었어. 근데 마지막에 가서 네가 그것을 포기한 거지. 거짓된 신들을 베고 싶다는 충동에 휘말려 결국 검에 취해 버린 거야.”
사장님은 맥주잔에 절반 남은 소주를 단번에 마셨다. 어, 저거 저 양반한테 치사량인데.
“넌 검의 신과 같은 최후를 맞이할 예정이다. 아니, 더 못하다 할 수 있겠군. 검의 신은 세계를 멸망시키기 전에 자결했지만, 결국 넌 세계를 베고 자를 테니까. 그나마 실낱같이 남은 인간성이 ‘역천의 마안’을 통해 이곳으로 온 듯한데. 어차피 세상이 망하는 건 시간 문제야.”
내가 기억하는 사장님은 늘 그늘 없는 얼굴이었다. 하나, 지금만큼은 입맛이 세상 써 보였다. 그가 들이켜고 있는 저 술잔은 여러 의미로 고배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런 스승을 보며 괴롭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사장님은 눈을 뻥긋거렸다. 술을 한도까지 마셔서 그런지 눈덩이 퉁퉁 부어 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넌 최선을 다했다.”
사장님은 수더분하게 실소했다.
“네 이야기만 듣고 판단한 게 아니라, 누구보다 너를 잘 아니까 하는 소리야. 넌 할 만큼 했어. 외신의 뜻을 헤아릴 순 없지만, 그분의 기대 이상으로 해 주었을 거다.”
나는 침음을 내었다. 사장님은 나를 치하하지만 듣는 것이 괴로웠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
사장님은 입을 다문 채로 맥주잔만 빤히 응시했다. 유리면에 반사된 가게의 정취에 아스라한 조명등이 양념처럼 버무려졌다.
그는 나를 보지 않고 입을 떼었다.
“하나 있지. 하지만 내 새끼한테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야.”
“알려 주세요.”
내가 상반신을 앞으로 당겨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장님은 한쪽 눈만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래도 괜찮나?”
즉답했다.
“예.”
“애당초 그 세계는 네 고향도 아니잖아. 그렇게까지 네가 희생할 필요도 없어. 근데 왜.”
“사장님 고향이잖아요.”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사장님이 제 양아버지인데, 그럼, 제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아닙니까.”
사장님은 잠깐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통상 기가 찰 때 저 얼굴이므로 호통이 날아오는 게 정상이다.
“못난 놈.”
그러나 사장님은 웃었다. 그는 맥주잔을 어깨 너머로 던지고서 대뜸 병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저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싶어 말리려는 즈음, 그가 소주병을 내리치며 입가를 닦았다.
“시작과 끝은 같다.”
이때. 지진이라도 난 듯 탁자와 조명, 각종 장식이 거세게 들썩였다. 벽과 바닥은 갈라지고 그 틈을 비집고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시작 이전인 신화시대로 돌아가. 그리하면 예정된 종말을 막을 수 있을 거야.”
시야를 쪼개는 섬광 너머로 반만 보이는 사장님의 입꼬리.
“빛보다 빠르게 달려서 시간을 역행해. 되돌리는 거다, 모든 것을.”
“……!”
의식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영웅의 시조는 내가 아니야.”
사장님이 하나 있는 손으로 내 머리를 장난스레 쓰다듬었다.
“네가 될 거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