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9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92화(287/300)
292화 시조의 영웅 (3)
발로르 호아킨의 시선은 강검마가 떠난 자리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자식은 눈 깜짝할 새에 큰다더니.”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혀가 꼬이고 몸이 휘청거렸다.
‘아, 너무 마신 모양이로군.’
그는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가다가 결국 발이 꼬였다. 벽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팔이 없는 쪽으로 몸이 기울었다. 그렇게 한때 시조의 영웅이라 불리던 사내가 주책맞게 나동그라지려던 차였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야?”
앳된 목소리. 누군가 뒤에서 그의 남은 팔을 붙잡아 주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임에도 구 발로르 호아킨, 현 호악현은 순간 흠칫할 뿐.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오랜만에 아들 녀석을 보니 기분이 좋아서 그만.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되려 입술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같이 마셨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정도 시간은 됐을 텐데. 아, 아직 미성년자여서 안 됐나.”
“겉모습만 민짜면 뭐 합니까. 알맹이는 불혹. 그리고 그 녀석은 소문난 주당이었습니다. 겸상했으면 제가 죽을 수도 있어 자작했던 거죠.”
“참 재밌어. 시조의 영웅이라 불리던 사내가 술만 마시면 이렇게 무방비해진다는 게. 700년 전에 마족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대를 이겼을 텐데 말이야. 술을 물로 가장해서 인사불성으로 만들면 끝이니까.”
“농이 짓궂으십니다.”
호악현의 작게 투덜거렸다. 상대의 은은한 웃음이 등에 닿았다.
“…이번 일도 당신의 뜻입니까?”
“네 입으로 아까 말했잖아. 나는 개인의 의지나 뜻과는 무관한 존재라고.”
얼굴을 보지 못한, 등 뒤의 상대가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서 관찰만 하는 무능력한 사람이라고도 덧붙였었나.”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습니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상대가 미소하며 호악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와중에도 호악현은 뒤돌지 않았다. 망부석처럼 시선 처리는 정면을 고집했다.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봐. 모르는 것 빼고 말해 줄게.”
흔쾌한 대답. 호악현은 속으로 낮게 웃음을 흘렸다.
‘과연 이분이 삼라만상에서 모르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강검마가 뜬금없이 나타나기 전, 이분의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더불어 사건의 실태와 해결책을 넌지시 언질 줬었다.
‘이분은 전부를 아는 자.’
어느 것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전부를 알기에 모든 것에 흥미가 없다. 개입과 간섭, 영향력을 뽐내고 싶은 것은 신성이 낮은 치들이다.
그들과 비교하면 이분은 아득히 높은 위치에서 그저 관망할 뿐이다.
‘사람에 따라선 방만이라 할 수도 있겠지.’
호악현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말을 꺼냈다. 이 전능한 방조자의 작은 변덕을 바라며.
“이 끝은,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강검마 앞에선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켜켜이 쌓이는 불안감은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이분의 말을 전하는 것까지는 했다.’
이후는 알지 못한다. 오직 신만이 알 따름.
“말에 뼈가 있네. 호아킨,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니잖아. ‘강검마 좀 챙겨 줘라.’ 이 말을 하고 싶은 거 아니야?”
“허허. 이거 참, 제가 아둔했군요. 감히 당신을 속이려 들었군요.”
호악현은 시원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예. 맞습니다. 모쪼록 저 녀석 좀 봐주십사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신이 맛이 가 있고, 성미가 불같긴 하나 근간이 뒤틀린 녀석은 아닙니다. 그저 환경이 가혹해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거죠.”
“조금 수준이 아닌 것 같긴 하다만. 하긴, 나 같아도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면 머리가 맛이 가긴 하겠네. 가정 폭력은 다반사에, 아빠 쪽은 상습범에 엄마는 약물 중독자였지 아마. 쓰레기도 그런 쓰레기가 없어.”
끌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호악현은 볼멘소리를 내었다.
“그들도 당신의 피조물입니다.”
“어허, 이 사람아.”
“압니다. 그저 관찰할 뿐, 이잖습니까.”
“나한테 쌓인 게 많나 보네. 그래도 강검마의 부모는 그대 나름대로 응징해 주지 않았나?”
“예.”
“어떻게 했지?”
다 알면서도 묻다니, 악취미다. 호악현은 뜸 들이지 않고 대꾸했다.
“죽였습니다.”
“재밌네. 한때 시조의 영웅이라 불리던 남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다 죽이고.”
“영웅은 불의를 참지 않는 자이지, 의로움을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세계에선 죽을 놈은 죽습니다. 반면 이쪽은 법체계가 느슨하더군요. 죽어 마땅한 놈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호악현의 눈빛은 확고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제 기준에서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으니까요. 사적 제재라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 후로 감정에 쓸려 사람을 죽인 적은 없습니다. 이 하나는 당신의 이름에 대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맹세는 무슨. 이해해. 강검마가 저쪽 세계의 상식에서 괴리감을 느낀 것처럼, 그대도 이쪽의 도덕과 질서가 아직도 낯설었던 거지.”
“그런 셈입니다.”
“여튼, 오케이.”
상대는 호악현을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은 채 터벅터벅 걷는 뒷모습. 호악현도 그의 편린은 처음 봤다. 계시도 꿈에서 목소리로 고지한 것이었다.
“궁금한 게 있어. 이거에 답해 주면 내가 강검마 뒤를 좀 봐줄게. 이를테면 촌지 봉투? 그런 느낌이지.”
그가 문고리를 돌리기 직전에 말했다.
“그대가 이쪽 세계에 와서 굳이 사시미를 택한 이유가 뭐야? 그 때문에 강검마도 저편에서 사시미만 쓰게 됐던데.”
“…별 이유는 아닙니다.”
호악현은 엄지로 이마를 긁적였다.
“이 세계에 처음 떨어지고 허기에 지쳐 쓰러질 적에, 한 끼 얻어먹었던 게 이곳입니다. 그렇게 어찌어찌 일하게 되었고, 뼈를 묻게 된… 그런 서사입니다.”
“가만, 듣고 보니 당신도 강검마랑 똑같았던 거네. 그래서 그를 거두었던 거야?”
“그 영향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군요.”
“인간다운 면이 있네.”
“애초에 인간입니다.”
“강검마가 누굴 보고 컸는지도 알겠고.”
호악현은 낮게 헛기침을 했다.
“그건 좀.”
“하하, 어째 말투도 똑같아. 아무튼 오랜 궁금증이었는데 덕분에 대답이 됐어.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야.”
“…….”
“할 말 더 있어? 그런 표정인 것 같은데.”
“설마 해서 여쭙건대, 당신에게 이름이란 게 있습니까?”
“있지, 당연히.”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끔뻑거리던 호악현의 눈동자가 둥그러졌다. 항상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는 지금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이었다.
“G.M.”
상대, 외신外神이 뺨을 당겨 웃었다.
“다른 이름으론 검마.”
“……?!”
호악현이 팔을 뻗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붙어 있는 팔임에도 헛손질했다. 뒤늦게 술기운이 올라온 탓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정신이 아래로 침잠하는 가운데, 나긋한 목소리가 귀에서 맴돈다.
“당신이 세운 아카데미 덕분에 방금의 강검마는 ‘내’가 아닌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 됐어. 모든 세계 선을 통틀어 유일한 경우야. 당신의 작품이지. 자랑스러워해도 돼, 시조의 영웅.”
드르륵.
가게 바깥의 풍경이 드러났다. 호수. 무한한 사시미들이 위령비처럼 수면에 꽂혀 있다. 그가 기거하는 신역, 검의 호수다.
“그거 알아? 우주의 형태는 도넛처럼 생겼어. 그걸 사람들은 ‘루프’라고 부르더라.”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대충 그런 거로 생각하면 돼.”
마지막 한마디.
“고마워요, 아버지.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어.”
그는 발로르 호아킨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갔다.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시조의 영웅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 풍경은 더 이상 우주가 아니었다. 우주였던 ‘것’이었다.
반으로 쪼개져 흐르는 천체와 은하들. 우주에 중구난방으로 새겨진 칼자국. 싸움의 흔적이라기엔 너무나 광오해 선뜻 실감이 안 간다.
으레 쓰이는, ‘천문학적’이란 표현. 그 규모가 좀처럼 감이 안 잡힐 때 쓰는 말인데, 눈에 비치는 광경이 딱 그러했다.
인간의 인지 내에서 무한을 의미하는 공간은 걸레짝처럼 엉망이었다. 내가 사장님과 해후하는 동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이걸 이렇게 만든 건…….’
나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꽉 움켜쥔 사시미 두 자루. 날이 잔뜩 상한 무라사메와 만년서리가 처연히 울고 있었다.
‘내가 이런 건가.’
어이가 없었다. 사시미로 우주를 이렇게 난도질해 놨다니, 말이 되나. 더구나 웃긴 건 호흡이 가능했다. 과학에 무지몽매한 나일지언정 우주에서 숨을 못 쉰다는 것 정도는 안다.
‘더 이상 인간도 아니라는 거구나.’
현 상황이 시사하는 바다. 물론, 나만 그렇진 않았다. 저기 이 우주만큼이나 넝마가 된 용사,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하아…….”
숨소리가 불규칙적이다. 레온은 오른팔의 관절은 뒤로 꺾여 있었고, 발뭉을 쥔 왼팔이 그나마 온전했다. 배에는 구멍이 몇 개 뚫려 있었는데, 피 대신 별 가루를 뿌린 검은 액체가 철철 흘러넘쳤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용해 보이는 상태였다.
“끝을… 끝을… 봐라.”
레온이 헐떡거리며 뭐라 중얼거렸다.
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레온을 응시했다. 녀석은 비척비척 발뭉을 들었다. 검은 기운이 검날에 스며들어 혈관처럼 꿈틀거렸다.
“검마, 너는 나를 죽여야만 해.”
레온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래야 이 모든 것이 끝난다.”
도발이 아니다. 정말로 자신을 끝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주 전 범위에 감응하는 직감이 전하는 말이다. 열여덟 소년의 저의쯤은 간단히 꿰뚫어 본다.
나는 깊게 탄식했다.
그렇다. 레온은 자신의 몸에 거짓된 신을 한데 모았다. 힘을 취하고자 함이 아닌 그들을 가두기 위함이었다. 육신을 그들을 억류하는 감옥으로 만든 것이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하나.
“…너는 그들과 함께 죽으려는 건가.”
그걸 위해 레온은 쿠아른의 편에 붙었으며, 인류를 배신했다. 이 세상의 악과 죄를 저 혼자 감당코자…….
레온은 말이 없었다. 검게 물든 왼눈에 깊은 어둠이 일렁였다. 오른눈도 이미 절반쯤 탁하게 염색됐다. 아마 거짓된 신들의 사념이 그를 잠식하려는 것이리라.
문득 경외감이 들었다. 소년의 몸으로 저 상태가 될 때까지 제정신을 유지한 게 기적이다. 어쩌면 그의 ‘기적의 가호’ 덕택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레온이 했던 행위들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녀석은 영웅들에게 검기를 난사했고, 결국엔 절궁 사키 코지마를 죽였다.
대의명분이 어떻든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죄다. 죗값을 받아야 한다. 단, 그 죗값이 목숨은 아니다.
그건 교환비가 맞지 않는다. 녀석을 처벌하는 게 칼이어선 안 된다. 인류여야 한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시간을 잘게 쪼개 레온의 공격을 대비했다. 이후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자 또 다른 나, 라이칸이 반응했다.
-어이없는 발상이군, 신화시대로 간다니.
내가 물었다.
‘할 수 있나?’
-해 본 적은 없지만, 이참에 해 보마.
라이칸의 영체가 나와 나란히 섰다.
-빛보다 빠르게.
뇌광의 번쩍임이 묵색 우주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