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9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93화(288/300)
293화 신살신 (1)
‘검의 신이시여…….’
쿠아른의 눈은 회한으로 젖어 들었다. 그 발밑 어귀에는 시체가 둔덕처럼 쌓여 있었다. 인간의 육편도 물론 있었지만, 마족의 것도 못지않게 많았다.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쿠아른은 시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대기층이 사라진 지구의 하늘은 더 이상 연푸른색이 아니다. 공허한 색감, 암흑이 지구의 지붕이다.
“아, 아.”
곳곳에 칼자국이 수두룩했다. 전부라 생각한 우주가 상처받고 있었다.
쿠아른은 아주 먼 옛적부터 이 장면만을 상상해 왔다. 꿈을 꿀 적에도 이 광경이 자주 나왔다.
“당신은… 정말 최고입니다.”
쿠아른은 그만 눈가를 덮으며 감격했다. 이 우주는 종말을 맞이하므로 끝이 머지않은 장면이다. 하지만 찰나이기에 아름다운 것. 늘 푸른 나무보다 한시적으로 피는 꽃에 사람들은 아련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쿠아른의 심리도 그와 같았다.
“고작 이따위 것이 네가 바랐던 전부이자 끝인 거야?”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쿠아른은 고개를 돌렸다. 사막의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한 눈총이 만력 메아인 포이즌을 향했다.
“…산소가 희박할 터인데, 아직 움직임이 가능하군요. 여자.”
메아인은 두 다리로 서 있는 유일한 영웅이었다. 다른 이들은 눈자위를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인간은 아니거든.”
쿠아른의 말마따나 대기권이 얇아진 탓에 정상적인 호흡이 불가했다. 인간뿐 아니라 마족도. 이 행성에서 나고 자란 생물은 모두가 산소를 마시며 자란다. 한데 그 당연한 권리를 탈취당했다.
끄어어어어…….
비명이 뒤엉켰다. 인간 마족,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죽어 간다. 비단 그들만 억울해할 건 없다. 어딘가 생명이 살고 있을 외계 행성도 상황은 매한가지일 터. ‘종말’은 온 우주에 평등하게 진행 중이다.
메아인은 우주의 죽음을 휘둘러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하나 남은 대화 상대 쿠아른에게.
“네 목적은 고작 우주와 같이 죽는 거? 하잘것없는 목적인데 반해, 너무 계획이 거창하단 생각은 안 들어?”
“음.”
쿠아른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마법 서너 번 시전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저 여자를 죽일까, 살릴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저 여자도 얼마 후 알아서 뒤질 것이다. ‘그분’께서 칼을 붓 삼아 우주에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데, 자신 따위가 무엄히 피칠을 덧댈 순 없는 노릇.
‘그렇다고 굳이 말동무해 줄 이유는 없지만.’
쿠아른은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 감정은 표정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눈빛의 이채는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했다.
“그분을 뵙기 이전의 저는 권태감에 시달렸습니다. 거짓된 신들의 복음을 진리라 여기며 행사하던 것에 회의를 느꼈더랬죠.”
쿠아른은 추억을 떠올렸다. 그의 눈시울은 아련함으로 촉촉했다.
“근데 어느 날, 그분이 저희 앞에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얼굴은… 글쎄요. 제 미력한 두뇌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남자였던 듯합니다. 목소리는 조금 앳되었던 것도 같군요. 그런데 성별 따위 아무렴 어떻습니까. 저는 그분이 어떤 모습을 하고 계셨더라도 사랑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
메아인은 잠자코 쿠아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귀를 기울이는 한편, 예언서 아카식 레코드와 이야기의 내용을 대질했다. 그가 하는 말에 이 상황을 타개할 실마리가 있을 수 있기에.
“처음 봤을 적에 저와 그분은 적이었습니다……. 미련했습니다. 아무리 당시 주인의 명령이었다 할지라도 감히 그분께 맞서려 하다니요. 역모라도 했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지 말아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저는 지금처럼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친절히 칼로써 저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쿠아른은 피부 아래로 벌레라도 기어 다니는 것처럼 뺨을 벅벅 긁었다. 피가 나고, 살가죽이 벗겨져도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그걸 깨달았을 적에는 늦었었습니다. 과업을 마치신 그분께서는 이미 영면에 드신 후였으니까요. 아아, 이 몸을, 이 우주를 기꺼이 바칠 마음이 되었건만… 그분은 더 이상 이 세계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셨던 탓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던 겁니다.”
쿠아른의 눈이 칙칙하게 죽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분은 분명 돌아오실 것이다. 이 세상이 오물로 가득할 때, 재림하여 모든 것을 청소하시리라. 그 검은 죽음마저 베는 검이니, 그러니 그분이 재림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
쿠아른은 상사병을 앓았다. 그분께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셨을 적에, 쿠아른의 삶도 같이 끝났다. 실의는 그를 깊은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수만 년의 세월 동안 절해의 바닥을 허우적거렸다. 전부를 잃은 상실감은 그를 오염시켰다. 가장 아름다웠던 천사는 광기에 사로잡혀 타천堕天하였다.
“그래서 곧장 그레고리를 결성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성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 형 메타트론의 존재 때문이죠. 그는 천사 중 으뜸이었으니까요. 상관없었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요한 것이지 그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밑으로 늘어져 있던 쿠아른의 입꼬리가 돌연 비죽비죽 솟았다.
“그다음으론 마족 틈에 스며들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당시까지 세상은 비교적 깨끗했으니까요. 700년 전까지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당신네가 1차 인마전쟁으로 명명한 그것입니다.”
쿠아른은 이를 갈았다. 문득 그 얼굴이 스치니 시샘과 분노가 차올랐다.
“발로르 호아킨… 그 같잖은 녀석이 그분의 힘을 ‘일부’ 사용하더군요. 혼란스러웠습니다. 분명 그분이 아닐진대, 왜 그 힘을 쓰는지. 그래서 저는 관찰키로 했죠. 멀리서 1군단장 라이칸과 검의 신의 전투를 관조했고,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그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쿠아른이 다시 웃었다. 그의 감정 기복은 변덕스러웠다.
“그분은 바깥에서 온 존재. 고로 시조의 영웅, 발로르 호아킨은 그분을 이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교두보였던 셈이죠. 그러니 진정한 그분께서 훗날 재림하시리라. 그리고 그 적기는.”
“용사가 나타날 때.”
메아인이 뒷말을 받았다. 쿠아른은 놀랍다는 듯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맥락만 듣고 알아차리시다니, 인간치고는 머리가 그럭저럭 쓸 만하군요.”
“그런 편이지. 네가 개박살을 내 놓은 이 아카데미의 전대 학원장이었으니까. 이래 봬도 인류 최고 지성 중 한 명이야.”
그 말에 쿠아른이 피식 비웃었다. 그는 잿더미로 변한 아카데미를 넓게 훑어보았다.
“제가 이곳을 습격한 까닭. 이곳이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신성을 방해하고 삿된 인간성을 북돋는 감옥. 또한 당신들은 만용을 저질렀습니다. 인간 따위가 신을 가르치려 들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소리입니까? 해서 철저하게 파괴해 드렸습니다.”
“하하하!”
메아인이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쿠아른의 눈썹이 곱게 휘었다. 죽기 직전 실성하여 광소하는 인간은 더러 보았다.
‘저 웃음은 다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초록 머리 여자의 웃음은 발작이 아니다. 오래된 의문을 해소한 인간이 터뜨리는 후련함이 어려 있었다.
“아카데미는 이 널따란 건물이 아니야.”
메아인은 발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 잔해를 툭툭 차며 말했다.
“그따위 건물? 다시 지으면 돼. 700년의 역사? 마족들에게는 별로 길지도 않은 시간이지? 인간한테도 마찬가지야. 단 한 개체가 그만큼 못 살 뿐, 시대 정신은 영원히 이어져.”
메아인은 호흡을 추슬렀다. 기분 탓일까. 불과 몇 분 전까지 뻑뻑하기만 했던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은.
‘기분 탓이… 아니구나.’
그녀는 하늘을 힐긋 올려 봄으로써,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쿠아른의 주절주절 넋두리와 아카식 레코드의 대질도 끝난 참이다.
‘검의 신은 남자, 앳된 목소리, 시조의 영웅은 인도자, 재림, 용사…….’
메아인은 파편화된 단서를 퍼즐처럼 짜맞추기 시작했다. 틀은 갖춰져 있는 터라, 시간 소모는 길지 않았다.
“강검마.”
메아인이 그 이름을 불렀다. 쿠아른이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분의 이름은 더 이상 강검마가 아니다. 그건 그분의 그릇에나 붙던 더러운 이름. 그분의 진명은 헤레브. 검 그 자체다.”
“아니.”
메아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튄 땀방울이 바닥에 점을 찍었다.
“걔는 강검마야.”
메아인은 검지를 치켜세워 위를 가리켰다. 쿠아른은 그녀를 곧 죽일 듯이 쏘아보다가, 아껴 두었던 하늘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쿠아른은 아연실색했다. 안 그래도 하얀 그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전이의 가호 진眞이 발현됩니다.] [‘역천의 마안’과 병용되어 반경을 세계선 전체로 확장합니다.]온 우주에 퍼져 나가는 황금색 빛무리.
[재생의 가호 진眞이 발현됩니다.] [세계선 전체의 검흔을 봉합하고 우주의 자체 수복을 돕습니다.]상처 나고, 망가져, 고장 났던 우주의 시계가 다시금 맞물린다.
[차력의 가호 신神이 발현됩니다.] [시전자의 속도가 광속을 웃도므로 시간 선을 역행합니다.]귓가에서 맴도는 여성의 목소리. 그것은 누군가에겐 낭보, 어느 누구에겐 비보이리라.
[소통의 가호 진眞이 발현됩니다.] [이 가호로 하여금, 이 말은 모든 언어로 번안되어 모두에게 전달됩니다.]그러는 사이, 미동도 없던 영웅과 마족들이 바닥에서 꿈지럭거렸다. 반면 쿠아른은 초점이 흐릿했다. 동공이 텅 빈 듯했다.
“아…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단 말이다!”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검신劍神의 가호가 발현됩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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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빛 타래가 보인다. 내가 손을 뻗는다. 그것은 손에 붙잡힐 듯하면서도 손끝에서 비단처럼 미끄러진다.
‘한 걸음만 더.’
몇 발짝을 내디뎠을까. 수 단위가 ‘조’를 넘었을 시점에서 세는 것을 관두었다.
그저 발을 굴렸다. 쉬지 않았다. 저 멀리 있는 쪽빛을 등대 삼아 나방처럼 몸을 날렸다. 육신이 우주에 녹아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아니, 착각이 아닌가.’
수십억 년 동안 우주를 서성였으니 어쩌면 우주와 한 몸이 되어 버렸을 수도.
별의 탄생과 죽음을 보았다. 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은하를 꾸리는 것도 보았다. 그들을 지나쳐 우주의 여백에 이른 지도 어언 수억 년. 공허와 허무 속에서 쪽빛만을 쫓아 헤엄친 지도 한참 되었다.
정신은 고목처럼 비쩍 말라비틀어졌지만, 신체적인 노화는 없다.
적어도 내 외모는, 그때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시절과 같을 것이다. 세계의 법칙을 뒤틀어 버렸기 때문이다.
시간을 되감았다. 어느덧 인과를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단 하나의 목적성만 지닌 채 무한히 질주했다.
-정신 차려라, 강검마.
라이칸이 내 정신을 부축한다.
-이제 곧이야. 여기서 놔 버리면 시간의 굴레에서 내쳐져 현실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그의 조언이 없었다면, 나는 고작 수만 년을 역행했을 즈음에 멈춰 섰을 터다.
-그곳엔 너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떠올려라, 그들을.
악마의 속삭임.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희망의 불씨를 되살린다.
“그래.”
내가 말했다. 내 의식은 명경지수처럼 잠잠하므로, 대답한 건 무의식이었다.
“돌아가야지.”
망막에 빛이 드리웠다. 나를 인도하며, 이끄는 한 홉의 빛.
그것은 세계 질서의 빛 타래가 아닌 그리운 얼굴들의 형상화. 인간의 마음이다.
그 찰나였다.
끈끈한 감촉이 뺨을 핥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동공에 광채가 맺혔다. 눈자위에선 하얀 귀화가 늑대의 숨결처럼 길게 흘러나왔다.
사위를 선명하게 인식했다. 심연의 장막이 뭉그러지더니 부드럽게 찢어졌다.
모습을 드러낸 이들. 도열은 무질서했고 크기도 제멋대로라 들쑥날쑥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목은 정확히 한 지점을 향했다.
〈실로 다시 보고 싶었다.〉
구시대의 지배자들이 인과를 초월한 현실의 존재와 마주했다.
〈검의 신.〉
그들은 신이다. 모름지기 신이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존재한다. 인과 또한 그들이 만든 틀에 불과하다.
스르릉.
사시미가 단칼에 그들의 말을 잘라냈다. 심연의 한복판에서 검명이 파문처럼 겹겹이 퍼졌다.
-네 몸과 세계선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선 전투를 길게 끌면 안 된다.
라이칸이 덧붙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하루에 단 1분.
“여태까지 그랬어.”
나는 검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