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9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94화(289/300)
294화 신살신 (2)
료죠가 눈을 번쩍 떴다. 방을 뛰쳐나온 그녀는 거실을 가로질러 다급히 베란다로 향했다.
후다닥.
신시아는 그런 딸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신음을 앓으면서도 베란다 난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웅웅 울렸다.
“…갑자기 왜 저런대.”
불과 조금 전까지 두 모녀는 기절해 있던 상태였다. 대기질과 오존층이 손상되어 산소가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는 골든타임인 1분 내로 안정을 되찾았다. 시들시들했던 생명력이 다시금 쿵쿵 약동했다.
“…….”
료죠는 아슬하게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빛 한 점 없이 새카맣던 하늘에 연청빛 커튼이 드리우듯. 하늘의 색이 변하는 황홀경이 하늘색 눈동자에 담긴다.
“검마야.”
료죠는 슬픈 눈으로 중얼거렸다. 멸망 직전의 인류를 구세한 이는, 그 누구도 아닌 강검마다.
‘그 꿈.’
잠에 취한 동안 꿈을 꿨다. 어둠보다 더 깊은 심연. 시간이 의미를 잊은 공간. 그곳에서 강검마가 미지의 세력과 끝없이 상잔하는 꿈이었다. 처절하고 외롭게.
종식되지 못하는 영원한 사투.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현실 그리고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뒤틀린 인과율이 즉각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것.
그저 개꿈일 수도 있다. 료죠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가슴 깊이 바랐다.
‘제발.’
꿈속의 강검마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차갑게 철렁였다. 합리와 이성은 단순 개꿈일 것이란 가능성을 옅게 흐트러뜨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만 해도 가설의 근거로선 충분했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굵직한 얼음덩어리가 목 아래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와-!”
심란해하는 료죠 옆으로 신시아가 섰다. 그녀는 난간에 팔꿈치를 턱턱 걸치곤 손은 바깥으로 축 늘어뜨렸다. 아슬아슬한 자세. 신시아는 료죠 못지않게 터프한 여성이었다.
“하늘 엄청 예쁘네.”
신시아가 바닷바람을 쐬며 말했다. 여명처럼 검푸른 색상과 석조처럼 심홍색 색상이 반반씩 하늘을 차지했다. 빛과 어둠, 새벽과 저녁, 지난날과 지금이 공존한다. 우주의 여정을 캔버스에 그린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신시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딸에게 미소 지었다. 검청색과 심홍색이 모녀의 옆얼굴을 각각 적셨다.
“요 며칠 전에 천검이 우리 집에 들렀잖아. 그날 그 친구가 나한테 약속했어. 꼭 돌아오겠다고. 내가 보기에 천검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 같던데. 료죠, 네가 보기엔 어때?”
료죠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낮게 끄덕였다.
“…걔는 한 번 한 말은 지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치?”
싱긋. 신시아가 더 환히 웃어 보였다. 한 손으론 딸의 머리카락을 빗질하며.
“그럼 믿어 보자. 정 불안하면 기도라도 해 보는 게 어때? 혼자서 뭣하면 엄마가 같이해 줄게.”
“빈다면 누구한테 빌어야 하지…….”
료죠는 망설였다. 원체 신앙과 거리가 먼 그녀였다. 한데 방금의 개꿈 때문일까. 신을 향한 불신이 더욱 커졌다.
‘어쩌면 강검마와 싸우는 자들이 그들이 아닐까?’
그런 불경한 의문이 맴돌았다. 그래서인지 료죠는 그들에게 빌고 싶지 않았다.
“누구한테 빌기는, 천검한테 빌어야지.”
“검마는 사람이잖아. 인간이 인간한테 기도한다는 건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
“기도의 대상은 원래 신에만 국한되지 않는단다, 딸.”
이때, 하늘에서 별 하나가 아른거렸다. 대기권이 얇아진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반짝였다.
수가 늘어 간다. 수백, 수천. 단위는 순식간에 껑충껑충 빠르게 증식했다.
금세 하늘이 꽉 찼다. 그 총량은 어림컨대 30억. 전 세계 인구의 과반에 달하는 수다.
잠시 시선을 빼앗긴 두 모녀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신시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별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소망이라면, 그들은 과연 누구한테 빌고 있는 걸까?”
대답이 정해진 질문이다. 작금에 이르러 사람들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이는 하나였다.
“강검마.”
어느덧 인류는 망연한 존재보다는 실재하는 것에 집중했다.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의탁하지 않았다. 일이 마음처럼 안 풀리면 신부터 찾던 이전과는 달랐다.
많은 이가 강검마의 독립적인 성정에 영향을 받았다. 신을 향한 믿음보단 개인의 의지를 중시하는 사회가 도래했다.
료죠는 다시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맞잡았다. 신시아도 딸을 따라서 합장했다.
두 사람은 조용히, 하지만 간절히 ‘그’에게 말을 전했다.
‘검마야.’
그러자 그녀의 머리칼 끝이 붕 뜨는가 싶더니, 피부 위로 빛이 얇게 번졌다. 그 빛은 빛살이 되어 높게 솟구쳤다.
소망. 또 하나의 별이 하늘을 장식했다.
* * *
싸움은 지리멸렬했다. 빛이 없기에 시야는 완전한 암전막. 오감이 먹먹했다. 흐릿한 감각을 돋워 간신히 공격하고 반격했다.
적이 안 보인다. 핏물이 튀는지조차 모른다. 물속에서 칼질하는 것처럼 사시미의 이동이 굼떴다.
나는 호흡을 짧게 쟀다. 허공을 박찼다. 사시미를 휘둘렀다. 라이칸이 간헐적으로 뇌광을 터뜨려 앞을 밝혔다. 그 시야의 편린을 쫓아 발을 굴렀다.
쿠구구구궁.
〈그만 포기하라.〉
신 중 하나가 인간 형상을 취하며 말했다. 멋들어진 수염과 머리를 한 잘생긴 중년인. 으레 신의 조각상이라 하면 딱 저런 모습이리라.
〈그대도 알지 않나. 자네의 힘은 분명 대단해. 한 번 우리를 멸절했던 힘이니 잘 알아. 그대는 모르겠지만, 벌써 우리의 십만 분의 1이 자네의 칼에 죽었네.〉
염병. 거의 광속으로 칼 판을 벌였는데 고작 십만 분의 1밖에 못 죽였다고? 그럼 적어도 수억은 넘는단 소리잖아. 신이란 새끼들이 지랄맞게 많았구먼.
〈하지만 현재의 자네는 신성을 포기하고 인간이길 택했네. 그 상태로는 우리를 이기지 못해.〉
중년인의 뒤편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향한 조롱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다. 아닌 게 아니라 [소통의 가호]는 신들의 언어를 즉각 해석해 내게 전달했다.
〈미련하긴. 불멸을 버리고 필멸을 택하다니.〉
〈인간은 잠시간의 유흥. 유흥거리를 위해 그 고생한다니. 참으로 어리석어요, 검의 신.〉
〈이게 우리를 죽인 그자라니. 심연의 어둠에 가려져 제 꼴도 몰라보질 않나. 참으로 나약해졌어.〉
선봉에 서 있던 중년인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잡음이 잦아들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저 새끼들의 우두머리 격에 해당하는 듯 보였다.
〈미안하지만 이게 지금의 그대야. 상황을 직시하게. 그대는 강해. 과거의 자네보다도 말이야. 하나, 그대로는 불완전한 신일 뿐이야.〉
중년인이 손을 내밀었다. 입꼬리가 인자한 호선을 그리자, 턱수염이 금가루처럼 번쩍거렸다.
〈내 이름은 유피테르. 신들의 정상으로서 자네에게 제안하지. 나를 대신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게.〉
갑작스러운 제의. 나는 중년인, 유피테르와 그 너머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잡소리가 들리질 않는 걸 보니 저희끼리는 이야기가 얼추 된 모양인데.’
-그런 듯하군.
내 배후령. 그러니까 라이칸이 내 상념에 대꾸했다. 그는 잿빛 영령으로 내 주변을 지켰다.
‘저거 순 거짓말 아니야?’
-신은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아. 비록 그들이 우리에게 해악인 존재일지라도 그거 하나는 분명해. 어찌 보면 그들의 정체성이니까 당연하지. 뭐… 겉모습은 조금 속인 것 같긴 하다만.
라이칸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의 눈총은 정전기처럼 따끔따끔했다.
〈검의 신, 그대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야. 자네에게 깃든 그 미물에게도 내 한자리 내어 주도록 하지. 이름이 라이칸이었던가? 어때, 솔깃한 제안 아닌가? 필멸의 존재가 불멸자가 된다니, 전례가 없던 일이야.〉
나를 대하는 것보단 다소 까칠한 태도. 모멸 섞인 말투와 시선이었다.
‘말만 저러지 너 존나 무시하는데.’
-그럴 만도 하지. 저들 관점에서 난 벌레만도 못한 피조물이다. 그런 피조물에게 억지로 신의 자리를 제안하는 거니 속이 배배 꼬이겠지. 나는 이를테면 덤이다. 검마, 너를 자신들의 편으로 꾀어내기 위한.
라이칸은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와중에도 눈빛은 침착했다. 과연 한때나마 마경의 군주였던 이는 어느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한다.
‘그래서 할 거야, 신?’
-혹하긴 하는군. 신성을 얻는다는 건, 진리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거다. 새로운 육신을 얻어 부활하는 것도 가능하단 소리지. 지금의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니까.
라이칸은 픽 히죽였다. 그 말을 들었는지 유피테르가 슬며시 입꼬리를 말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 라이칸이 입매를 비틀며 일갈했다.
-하나, 거절한다.
〈피조물이 반론을 내다니 참으로 오만방자하구나. 그래, 소멸하기 전에 이유라도 말해 보거라.〉
유피테르가 안광을 위험하게 빛냈다. 라이칸이 입매를 비틀며 일갈했다.
-네놈들의 농간 때문에 희생된 수가 몇인 줄 아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게 이유다, 병신아.
라이칸이 가래침처럼 욕설을 내뱉었다. 나랑 오래 붙어먹은 영향인가. 발음이 입에 착 달라붙는다. 나, 강검마는 마왕군 1군단장 라이칸을 한국인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통탄스럽구나.〉
유피테르가 이마를 덮고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감정 없는 눈으로 탄식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기어오르다니. 이 또한 우리의 부덕함이군. 어쩌면 이 때문에 과거의 우리가 검의 신에게 멸절했는지도 모르겠어.〉
유피테르는 힐끗 내게 시선을 던졌다. 동공에 애써 꾹꾹 눌러 담았던 살의가 차오르는 듯했다. 그의 황금 수염은 일순 싯누런 촉수처럼 미끄럽게 꾸물거렸다.
〈그대는 그릇된 판단을 하질 않길 바라네.〉
유피테르가 경고하듯 말했다. 안광은 붉고, 피부색은 녹빛으로 천천히 염색된다. 보름달 아래 늑대인간처럼 야성이 폭주하기 직전이었다.
그르르릉.
유피테르 뒤에 있는 신들도 마찬가지. 절대자들이 뿌린 어두운 빛은 심연을 왜곡했다.
〈내가 이런 제안을 이렇게 하는 건 자네를 기껍게 생각해서가 아니네. 우리는 자네에게 패퇴하고 깨달았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어쩌면 무한하다는 것을.〉
유피테르의 목소리에선 천장 없는 탐욕이 뚝뚝 묻어났다.
〈우리는 그 전부를 원하네.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없어. 한없이 이 세계에 갇혀 있는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자네에게 몸이 찢기고서 깨달았네.〉
유피테르가 서늘하게 이를 드러냈다. 손가락을 까딱여 나를 유혹했다.
〈자네는 모든 것을 베고 자르는 검. 그러니 자네의 칼로 세계의 경계를 찢어 주게나. 그리하면 이 세계 전부를 자네에게 맡기겠네.〉
그들은 세상의 전부를 가졌는데도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본질이자 저주에 가까운 숙명이다.
신들은 이 세계에 흥미를 잃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외부 세계로 발을 뻗치는 동안에 이 세계는 평화로울 터다. 게다가 그들이 온 세계 선을 누비는 데에도 천문학적인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계선은?’
이 세계만 신경 쓴다고 될 일인가? 적어도 나는 알고 있지 않나. 이 탐욕의 괴물들이 다른 세계로 마각을 뻗칠 미래를 말이다.
그곳에서도 파괴를 일삼으며 세계 하나를 황폐하게 만들겠지. 설혹 거기에 신들이 존재한다 해도 악영향을 끼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세계만을 위한 일이라면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아.
라이칸이 조언했다.
-대신 나처럼 거절한다면 저들을 전부 죽이는 것보다, 네 인간성이 깎이는 시간이 빠를 거다. 난 네 선택을 존중하겠다만, 일단은…….
라이칸이 하던 말을 멈췄다. 복마전, 칠흑의 배경에 빛 알갱이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유피테르와 다른 신들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신들의 전용 공간인 심연에 이변이 생겼다.
그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따스한 온기를 품은 빛방울들은 우리를 중심으로 거대한 구를 그렸다. 다음 순간, 빛들이 일제히 같은 형태로 빚어졌다.
-이건…….
라이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휘둘러보았다. 빛들이 나와 그에게 후광처럼 드리웠다.
심연의 맨살이 드러났다. 어둠에 몸을 숨긴 면면이 노출됐다. 그런 그들을 빛의 칼들이 에워싸며 일거에 겨누었다.
하나하나는 미력하다. 그러나 그 수가 여럿이라면, 하물며 수십억이라면. 옹기종기 뭉친 반딧불일지라도 태양처럼 밝게 타오른다.
내 눈동자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세다가, 곧 신들에게 미끄러졌다.
‘이제 상판이 잘들 보이는군.’
문어 같은 심해 해양 생물과 인간을 섞어 놓은 것 같은 모습.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나는 생선들이랑 협상 안 한다, 칼잡이거든.”
나는 무라사메를 적진을 향해 뻗었다. 빛줄기가, 인류의 소망이 어둠을 찢으며 쇄도했다.
“이기어검.”
심연이 비명을 내질렀다. 성긴 빛 그물 사이사이로 죽음의 소리가 솟구쳤다.
“여기서 전부 베어 주마.”
신을 베는 검은 인간의 정신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