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29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299화(294/300)
299화 호아킨 아카데미 (3)
“후회하지 않겠어?”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별 고민 없이 정하자, 또 다른 내가 한 말이다.
“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하고 자시고 간에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알고 있었잖아. 내가 당연히 그것을 택할 거라는 거.”
‘또 다른 나’는 이를 잘 알면서도 물어본 거다.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입으로 내뱉기 전까지는 확정된 것이 아니니까.”
또 다른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근데 너 외신이잖아. 이렇게 속세의 일에 개입해도 되는 거야? 교황한테 듣기론 외신은 그저 관조하는 자라던데.”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보통은 그렇지. 근데 이 세계에 절대 불변의 법칙 같은 건 없어. 세상은 유연해, 변수투성이지. 지금만 해도 그래. 솔직히 말할까? 나는 네가 1번 선택지를 택할 줄 알았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나는 잠깐 의아했지만, 일단은 그의 말을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1번을 택했었으니까. 이유는 묻지 마. 일일이 설명해 주기엔 내 나름대로 사정이 길거든. 너한테 저 세계에 빙의되고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말해 달라는 것과 같은 느낌이거든.”
“아.”
“단번에 이해되지? 네 1년간의 여정을 압축해서 쓴다 해도 일단 장편 소설 하나는 나올 테니까. 나는 그 이상이라 보면 돼. 내 세계선 같은 경우엔 정사대로 호아킨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 2차 인마대전이 발발했거든. 듣고 싶어? 말만 해. 나야 넘쳐 나는 게 시간이니까.”
또 다른 내가 떠보듯 말했다. 나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시간의 소중함을 안다. 초광속으로 수억 년을 거슬러 올라가 봐라. 1초가 금쪽처럼 느껴질 거다.
‘아마 이 녀석도 서운해하거나 크게 개의친 않겠지.’
나니까. 더구나 녀석도 나라면 말주변이 없어 원활한 의사 전달이 이뤄지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검의 신도 나였지.’
그럼, 그 기묘한 소통법도 일견 이해된다. 거기에 말동무까지 없으니…….
그때 조금 차갑게 대한 것이 뒤늦게 후회가 된다. 지나간 일이니 인제 와서 어쩔 수도 없지만.
“자, 이야기는 얼추 끝나는 거 같으니까. 슬슬 마무리를 지어 볼까.”
또 다른 내가 무릎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나는 조금 황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 보았다.
‘분명 나와 같은 키일 텐데, 눈높이가 이다지도 차이 날 줄이야.’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이 또 다른 나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
세계선 전부를 갖겠다는 ‘그 새끼’들의 야욕이 새삼 치기 어린 만용이었다.
‘세계선에 일일이 개입하지 않는 것도, 이 녀석의 관점에선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겠지.’
단언한다. 녀석들이 기를 써도 이 자를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뛰어 봤자 결국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번 일로 외신이 개입했으니 녀석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어쨌든 세계선 전체가 한차례 들썩였던 것이니.
“올 때처럼 시간선을 뛰어넘을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미 나, 그러니까 너는 그 자리에 있거든. 어렵게 말하면 너와 나의 존재를 ‘치환’하는 거야.”
앉아 있는 내게 외신이 손을 내밀었다.
“쉽게 말해서 교대하자는 거고. 한 일은 별거 없으니까 걱정 마. 끽해야 달에서 질질 짜던 레온을 지구로 보내 준 정도니까.”
…그게 별일 아닌가? 스리슬쩍 넘어가려는 속마음이 빤히 보인다.
“손잡아. 그럼 집일 거야.”
또 다른 내가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건넨 손을 잡으려다가 잠깐 머뭇거렸다.
“졸업 축하한다. 너는 그래도 고졸이네.”
나름대로의 작별 인사였다. 그 말을 들은 외신은 순간 벙찌더니 입꼬리를 높게 올렸다.
“너도 미리 졸업 축하해. 십 대에게 2년은 긴 것 같으면서도 금방이야.”
“알아. 나도 전생에 마흔이었잖아.”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내 몸이 말단 부위부터 낱알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카데미에서 남은 하루하루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려고. 스승님이 맨날 강조했거든.”
“일기 쓰는 습관.”
뒷말은 외신이 받았다.
“일기 좋지. 혹시 몰라, 어디선가에서 누군가가 네 이야기를 보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나 이상의 존재가 말이야.”
“외신 위에 있는 존재가 있다고?”
“말했잖아. 이 세상에 절대 불변의 법칙은 없어. 나 또한 세계선을 유지하는 톱니바퀴일 뿐, 전부가 아니야. 아무튼, 시간 다 됐네.”
다음이 외신의 마지막 인사말이었다.
“행복해라. 너는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
나는 의식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완전히 화했다.
* * *
[마지막 편린, ‘호아킨 아카데미’를 획득했습니다.]―파앗!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
[편린을 전부 획득하여 잠재된 신성을 완전히 해방합니다.] […….] […….] [수고하셨습니다.]* * *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거뭇한 신형에 쿠아른은 아연실색했다.
그는 경련하듯 몸을 발발 떨었다. 염소 턱이 후들거리고 직사각형 동공이 한껏 작아졌다.
‘저분은 지금 무슨 상태인가.’
강검마가 진정한 신으로 격상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격분에 차 칼침을 박아도 웃으며 반겼을 것이다.
쿠아른의 염원은 스스로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강검마로 가득차 있었다. 거기에 자신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매일 밤 꿈을 꿨다. 저분께서 이 세계의 주인이 되시고, 그 아래에서 복종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만 해도 짜릿하고 등허리가 오싹오싹했다. 한데 쿠아른은 현재 다른 의미로 오한이 들었다. 과거 신들의 하수인이었기에 한눈에 분별할 수 있었다.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존재, 강검마. 그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그 관점에서 강검마의 분위기는 기묘하기 그지없었다. 인간임에도 내재한 힘은 신 이상이었다. 실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쿠아른이 바락바락 소리쳤다. 어떻게든 목소리를 짜냈다.
“어떻게……! 한낱 인간의 몸뚱어리에 신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언어도단도 이런 언어도단이 있을 수 없단 말입니다!”
발악이었다. 수십만 년 동안 바라온 비원이 와르르 무너졌다. 광기의 급물살이 이성을 완전히 익사시켰다. 안 그래도 흉측한 표정이 훨씬 험하게 일그러졌다.
강검마는 대꾸하지 않았다. 공고히 호아킨 아카데미를 굽어보았다.
폐허나 다름없었다. 번쩍번쩍 빛이 나던 건물은 피 칠이 안 된 곳이 없었으며, 아카데미의 자랑 본관은 뚝 부러진 채였다. 성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그곳에서.
영웅들은 먼지 더미를 뒤집어쓴 채로 강검마를 우러러본다. 서로를 부축하며 기쁨에 젖어 든다.
‘아, 그런가.’
아카데미는 영웅의 총본산지요, 요람이다. 건물은 건물일 뿐이다. 다시 세우면 그만이다.
아직 영웅들이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아카데미는 굳건하다. 그들의 지식과 지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대답하십시오, 강검마!”
쿠아른이 사납게 채근했다. 악마는 전부를 잃었다. 그가 가장 천시하던 목숨만 달랑 남았다.
강검마가 사시미 한 자루를 들었다. 칼날에 빛 타래가 얽혀 들었다. 태양이 직접 서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없이 시린 빛이었다.
스르륵.
산들바람이 분다. 낮게 자란 풀들이 구붓하게 휘었다. 영웅들의 땀을 식혔다. 마족들도 바람에서 자애를 느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기류다.
“나는! 당신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어. 당신은 찬란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왜! 더러운 인간의 길을 택한 것인가! 어째서! 어떻게! 세상의 전부를 포기할 수 있냐는 말인가!”
쿠아른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저지하는 레온과 메타트론을 거칠게 뿌리쳤다. 뜯겨 나간 검은 팔들이 한 점을 향해 우악스럽게 치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강검마는 그리 말했다. 귀를 닫은 쿠아른에겐 씨알도 안 먹힐 말이었다. 어차피 대꾸를 바라고 한 말도 아니긴 했다. 곧 죽을 놈이랑 오붓하게 잡담하는 취미는 없다.
“너랑은 다르게.”
그래서 짧게 일갈했다.
쿠아른이 사정거리까지 접근했다. 그의 등 뒤로 만트라 형으로 치솟은 검은 팔들이 일거에 손가락을 튕겼다.
검은 팔의 수는 5천 쌍. 그러므로 1만 개의 마법이 동시에 캐스팅됐다. 떼어 놓고 봐도 충분히 위력적인 마법들이 강검마에게 작렬했다.
중천을 화려하게 수놓는 마법들.
공간이 뒤틀리고 헤집어지는 광경을 보며, 강검마는 사시미를 내리그었다.
일검이 떨어졌다. 모든 검리가 녹아내린 종 베기. 시야가 백탁으로 물든 건 직후였다.
강검마의 코앞에서 멈칫한 마법과 검은 팔들. 격돌까지의 거리는 고작 한 치.
하얗게 표백된 세상에서 그것들은 십자(十) 섬광으로 명멸하더니, 이내 작은 태양이 폭사하듯이 붉은 구체로 변해 연달아 폭발했다.
콰과과과과광!
잔잔했던 바람은 사나운 열풍이 되어 역류했으며, 훈기가 지상에 낮게 깔렸다.
영웅과 마족들은 납작 엎드렸다. 돌풍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흙바닥을 세게 그러쥐었다.
쩌렁쩌렁한 폭음 천지 속에서 누군가 슬며시 고개를 젖혔다. 그 두 눈이 부릅떠졌다.
“……!”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자, 곁에 있던 영웅들도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같은 반응을 보였다. 최고의 경탄은 침묵이다.
하늘과 땅을 이분하면 지평선, 바다를 이분하면 수평선이다. 이렇듯 천지는 위와 아래, 횡으로 구분 짓는 것이 삼라만상의 법칙이다.
하지만 여기 그 법칙과 상식을 부정하는 황홀경이 있다.
열린 하늘이 천체와 은하를 품은 우주를 사이한다.
구름이 쪼개지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천상을 이분한 것이었다.
그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은 모두를 압도했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영웅들의 망막에 별빛이 맺혔다. 그 중심에는 강검마가 구름을 밟은 채 서 있다.
아득하다. 지고하다. 광대한 별들은 티끌이다. 은하와 천체마저도 그를 치장하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아아, 하늘이시여. 저분이 신이 아니라면 누가 신을 자칭하겠나이까.
영웅들은 눈물을 흘렸다. 이마를 노면에 묻어 뒤통수로 하늘을 경배했다.
그들을 장려하던 신의 축복이 장면으로 구성되어 그곳에 있다.
절망과 비탄이 말끔히 씻겨 내렸다. 경배의 물결은 삽시간에 전역으로 퍼졌다.
마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참배했다.
깊은 고요가 내려앉은 가운데, 쿠아른만이 신음성을 내었다.
“…아.”
쿠아른은 시선을 툭 떨궜다. 앙상한 손톱으로 가슴께를 더듬더듬 긁었다.
명치를 양분하는 혈선. 그 작은 유격을 시작으로 사슬처럼 금이 가더니, 이내 전신에 붉은 거미줄이 그려졌다.
틈과 틈의 여백이 점점 촘촘해진다. 그렇게 맨살이 남아나지 않았을 즈음에서.
쿠아른은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다. 혈선이 빼곡한 피부 위로 눈물이 흘렀다.
“당신은 정말, 제게서 모든 것을 앗아 가시는군요…….”
그 말이 끝이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쿠아른의 신형이 꺼졌다. 그 무엇도 남기지 못한 채 증발했다.
저벅.
발이 지면을 밟는다. 물속을 걷는 듯 머리카락이 너울거렸다.
시선은 한참을 발끝에 머물렀다. 땅을 밟아 본 게 얼마 만인가. 생경한 감각이다.
숨을 깊게 들이쉰다. 공기의 질감이 콧속에 스민다. 이어 바닥에서 시선을 떼어 내 주위를 넓게 본다.
수두룩한 시체의 밭, 얼룩덜룩한 피 웅덩이에서 주검과 뒤엉켜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들. 숨죽인 침묵이 도처에 깔려 있다.
쓴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내가 말하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
“고개를 드세요.”
나는 입을 떼었다.
“우리의 승리입니다.”
선언이 조용한 세상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