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300)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300화(295/300)
300화 에필로그 (完)
서류 가득한 책상 위로 착 펼쳐진 하늘색 머리칼. 쥐 죽은 듯한 침묵이 흐르는 집무실에는 새근새근 숨소리만 작게 퍼졌다.
달그락.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료죠를 단잠에서 깨웠다. 퍼뜩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새하얀 시야.
“……?”
뭔가 싶은 의아함도 잠시, 료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마에 붙은 종이에 숨결이 부딪혀 팔랑팔랑 흔들렸다. 종이를 떼어내자 보이는 건 김이 오르는 따뜻한 커피, 그리고 희고 고운 손이다.
“학원장님…….”
“어머, 내가 깨웠니?”
메디아는 입가에 천진한 미소를 걸었다. 료죠는 새침하게 흘기다가, 곧 커피잔을 입에 갖다 댔다.
“저 깨우시려고 커피까지 들고 오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하, 미안. 근데 상황이 상황이잖아. 조금만 이해해 줘. ‘차기’ 학원장, 사키 료죠.”
료죠는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엄지로 립스틱이 묻은 컵만 괜히 문질렀다.
“나도 내 제자를 이렇게 혹사하고 싶진 않은데, 인수인계까지만 참아 줘. 학원장 승계식까지 이제 곧이잖아?”
“예, 뭐…….”
“그래도 료죠, 너니까 한 달 만에 전부 숙지한 거지. 나 같은 경우엔 인수인계에만 반년은 걸렸었거든.”
“…학원장님이 반년 걸리신 걸 어째서 저는 한 달 만에 받는 거죠?”
료죠가 억울한 듯 말했다.
“똑똑할수록 몸이 고생하는 법!”
“그 반대 아닌가요.”
“내 맘~”
메디아는 싱긋 웃고는 소파에 깊게 등을 묻었다. 때 타고 가죽이 벗겨졌지만, 쿠션감은 아직 살아 있다.
‘이제 이 소파에 앉아 볼 날도 일주밖에 안 남았네.’
메디아는 고즈넉한 천장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날로부터 7년.’
인류와 마족이 존폐를 내걸고 싸웠던, 어쩌면 이 세계가 송두리째 사라졌을 수도 있었던 그날로부터 7년이 지났다.
‘그때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
과거의 기억이 눈꺼풀 아래에서 아른거린다.
그날.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참전했던 영웅들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 피해도 막심했다. 메디아는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직접 사상자 명단을 추산, 작성했었다. 한 자씩 적어 내려갈 때마다 눈물과 구토기가 차올랐지만, 꾸역꾸역 이름들을 기재했었다.
‘사상자뿐만이 아니야. 호아킨 아카데미도 붕괴하기 직전이었어.’
전쟁 직후의 아카데미는 사방이 잿더미였다. 부지가 어지간한 소도시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2/3가량이 그야말로 ‘삭제’됐었다. 남은 건물들도 상태가 좋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정말…….’
떠올리기만 해도 목이 멨다. 그녀는 학원장이다. 그리고 자신의 재임 기간에 아카데미가 함몰될 뻔했다. 가책이 어깨를 짓눌렀다.
‘모든 것이 절망이었지.’
메디아가 쓰게 웃었다. 그러다 달그락- 하는 소리에 엷게 눈을 떴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커피 마셔야 할 건, 제가 아니라 학원장님 같은데요.”
어느새 맞은편에 앉은 료죠가 커피를 우리고 있었다. 각설탕을 세 조각 퐁당퐁당 떨구고서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학원장님은 달게 드시죠?”
료죠가 티스푼을 입안에 굴리며 간을 보더니, 잔을 들이밀었다. 메디아에게 인수인계를 받기 시작한 지 어언 한 달. 생도 시절까지 따지면 서로를 안 지 벌써 8년이다. 입맛은 물론이요 내밀한 가정사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메디아는 머그잔과 료죠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애티가 뚝뚝 묻어났건만, 이젠 어엿한 숙녀로 장성했다. 동년배 중에서도 료죠는 유달리 어른스러웠다.
‘코지마, 걔가 죽고 사실상 사키가(家)의 행정을 본 게 얘니까.’
절궁은 제 죽음을 예지했는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해 두었었고, 거기에 적시된 차기 가주는 장녀 사키 히나였다.
그러나 사키 가문을 계승한다는 것은 일개 귀족가를 물려받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의미다. 일본이란 한 국가를 떠안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히나 혼자서는 벅찼을 터였다.
그래서 료죠가 언니를 도왔다. 료죠가 실질적인 행정을 도맡아 처리, 검토했다. 무슨 심정 변화인진 모른다. 절궁의 죽음이 그 변화에 기여했으리라. 메디아는 짐짓 그리 짐작만할 뿐 묻지는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대단한 아이야.’
료죠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재였으며, 사키 가문 더 나아가 모국의 영달을 존속했다. 이후 일을 끝내고 미련 없이 사키 히나에게 전권을 양도했다. 마음만 먹었으면 가문을 삼킬 수 있었음에도 월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 점을 높게 샀던 메디아는 료죠에게 다음 학원장직을 제안했다. 아카데미를 재건함과 더불어 쇄신의 물결을 가져올 새로운 학원장으로 료죠를 점 찍은 것이다.
료죠는 그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더는 그런 일에 관여하기 싫었다. 결혼 준비로 바빴다.
‘엄청나게 졸랐었지.’
메디아는 끈질겼다. 이주 밤낮으로 석고대죄(정작 본인은 잊었지만)를 박은 끝에 료죠의 승낙을 얻어 냈다. 사람들도 료죠의 유능함을 알았으므로, 반론을 제기하는 이는 적었다. 물론 일각에선 스물다섯은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내었지만, ‘그 누구’가 지지하니 불만의 목소리는 눈 녹듯 사라졌다.
‘‘걔’가 나서서 지지하면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눈이라도 마주치면 실금부터 지릴 텐데.’
메디아는 커피잔을 내려다보는 시선 그대로 웃었다. 계피색 물에 미소가 비쳤다.
“아, 맞다. 아벨이랑 사이는 어때?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살잖아.”
짓궂은 질문에 료죠의 눈썹이 살짝 휘었다. 그녀는 헛기침하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조금 낯설긴 한데, 그냥저냥 지낼 만해요”
5년 전, 동방예의지국 한국은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바로 이중 혼인이었다. 인마대전으로 인한 인구 감소의 타개책 중 하나였다.
“오~ 이것이 선배 부인의 품격?!”
메디아는 커피잔을 입술에 붙인 채 키득키득 웃었다.
“놀리실 거면 저 학원장 안 할래요.”
“죄송합니다.”
메디아가 고개를 숙였다. 한 달 동안 도게자를 박아 봤기에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이마는 딱딱하고 번들거렸다.
“저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료죠 님?”
메디아의 성미상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료죠의 시선에선 저 병적인 호기심은 암만 봐도 노욕이었다.
…그래도 별수 있나.
“물어보세요. 대답 안 해 주면 퇴근 안 시켜 주실 거잖아요.”
료죠는 검지를 들어 경고하듯 말했다.
“대신 하나만이에요. 약속 안 지키시면 그때는 진짜, 확.”
“여부가 있겠습니까, 헤헤.”
메디아는 호로록, 잔을 전부 비웠다. 혀로 입술에 묻은 커피까지 핥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그 뭐야……. 부인이 두 명이면 방은 어떻게 써……?”
료죠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식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같았다.
“홀숫날엔 저, 짝숫날엔 아벨. 됐죠?”
료죠는 벌떡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우렁찼다.
“으음.”
메디아는 다리를 꼬며 생각했다. 홀숫날과 짝숫날 중 어느 쪽이 더 많은지를 계산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 료죠와 아벨은 반반씩이지만, 걔한테는 매일이잖아.’
섬찟 오한이 들었다. 그녀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스스로를 껴안았다. 계절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땅거미 지는 시간대가 뒤로 미뤄져 초목들이 늦게까지 영양분을 섭취하는 그런 시기였다.
* * *
또각, 또각.
료죠의 잰걸음이 포장된 거리를 다졌다. 새로 깐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도블록. 사이사이 틈새로 자라난 잡초조차 없다.
부우웅, 주머니가 진동했다. 료죠는 휴대폰을 꺼냈다. 간만에 여행 동아리 단톡방이 시끌시끌했다.
[웨폰 : 료죠, 퇴근함? 언제 와. 너 때문에 회 상하면 책임질 거?]단톡방의 포문을 여는 건 언제나 스피드 웨폰이었다. 그는 협회에서 일하고 있다. 빅터 포이즌이 은퇴하고 협회장이 된 창성의 휘하에서 부단히 구르는 중이었다. 그래도 머리는 어디 안 가는지, 협회 내에선 전도유망한 젊은이로 통한단다. 성 부협회장(前 성 부장)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레이첼 : (맥주 마시는 사진.)]정작 창성의 조카는 올 뮤트가 있는 ‘랜슬롯 컴퍼니’에 입사했다. 레이첼의 직업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컴퍼니의 자유로운 기풍은 활기찬 그녀의 성격과 잘 맞았다.
[산하나 :에고, 나만 오늘 참석 못 하네…… (ㅜ△ㅜ). 내 몫까지 맛있게들 먹어~]이십 대를 흉내 내어 보지만 나이는 속이기 힘들다. 메아인 포이즌. 조만간 전전대 학원장이 되는 그녀는 현재 마경 게헤나의 총괄을 맡고 있다. 그녀만큼 그곳에 빠삭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더해서 메아인은 레온과 메타트론의 은거를 남몰래 돕고 있었다. 원래라면 레온은 뇌옥에 갇혔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인 활약이 정상 참작되어 게헤나 귀양살이 정도로 타협했다. 여기서도 ‘그이’의 입김이 한몫했다.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기밀 사항이다.
[혼테일 : 저, 저…….]인류와 마족은 종전을 선포했다. 휴전이 아닌 종전이다. 이 이상 유혈사태를 벌였다간 공멸할 게 뻔했으니까. 다만, 두 세력의 갈등은 골이 깊다. 가능했더라면 진즉에 완만한 관계였을 터다.
[혼테일 :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웨폰 : (혼테일이 회를 흡입하는 사진.)] [웨폰 : 오늘 호수 하나 사라질 듯.]둘 사이엔 교두보가 필요했고, 드래곤 일족이 그 역을 자진했다. 그들은 뿌리 깊은 중립 세력이었으며, 인마대전에도 참가치 않았기에 대의명분도 충분했다. 혼테일은 그들을 대표하는 사절로서 인세, 정확히는 최설아네에서 여전히 얹혀살고 있다.
“빨리들도 모였네.”
료죠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도로 넣었다. 우뚝 솟은 본관과 이웃한 석조의 태양이 아카데미에 담홍색 물감을 풀었다.
문득 옆을 돌아봤다. 전쟁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진 추모비. 료죠의 눈길이 한 지점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절궁, 사키 코지마 1973. 02. 23. ~ 2035. 01. 27.」
료죠는 비치된 국화 대신, 잔디밭의 들국화를 꺾어 추모비 앞에 툭 던졌다. 그러곤 덤덤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마저 갔다.
한국 초밥은 왁자지껄했다. 반가운 면면으로 꽉 차 있었다. 검제, 창성, 철각, 올 뮤트, 성 부협회장. 일 때문에 못 오는 사람을 빼고는 다 모였다.
“어, 왔어?”
료죠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아벨이었다. 그녀는 쟁반을 끌어안은 채 손님들을 접객했다.
“왔구먼, 차기 학원장!”
뒤이어 다른 이들도 료죠를 발견하곤 한마디씩 건넸다. 이미 다들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다.
녹스와 클로이가 그런 그들과 카운터 하나를 두고서 열심히 생선의 배를 딴다. 두 사람 뒤로는 각종 상패와 트로피가 진열되어 있었다. 아디토레 남매는 요리계에서 알아주는 칼잡이였다. ‘좋은 사장’ 밑에서 배운 덕분이었다.
“애들은?”
료죠가 옷걸이에 겉옷을 걸며 물었다. 아벨이 턱짓했다.
“방에.”
“얼마나 먹었어?”
“아마 2백만 원어치? 대부분은 혼 입으로 들어갔지, 뭐.”
“얼씨구, 장부에 달아 둬. 2백만 원은 선 넘지.”
“당연하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비싼 술까지 들여서 덤터기 씌울까?”
“콜.”
한국 초밥 안주인들끼리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서로 말투가 부드럽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날이 서 있지도 않았다. 어색하긴 해도 두 사람은 같은 지아비를 둔 여인들이다. 서로를 미워해 봤자 상처만 남는다.
뚜벅, 뚜벅.
누군가 계단을 내려온다. 소리가 멎고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방 안에서 진탕 술을 퍼마시던 동창들도 문을 열고 같은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잘 잤어?”
료죠가 웃었다. 강검마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주억였다.
“왔으면 깨우지. 위층 방음이 너무 잘돼서 다들 온 지도 몰랐어.”
“너무 곤히 자서,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더라. 그러니까 밤낮 좀 바꿔. 모처럼 휴가인데 몸 상하면 어쩌려고.”
아벨이 잔소리했다. 강검마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였다.
삐리리!
성 부협회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기라성같은 영웅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뭐?!”
성 부협회장의 낯빛이 사색이 된 건 순식간이었다. 다급한 시선이 강검마를 향해 미끄러졌다.
“뭔 일입니까?”
“그게… 게이트 인근의 상비군과 숙영 중인 마족 간에 마찰이 일어난 듯합니다. 아직까진 고성이 오가는 정도라는데, 이래도 뒀다간 사태가 심화될 수도 있는지라…….”
성 부협회장의 의수는 휴대폰 액정을 덮고 있었다. 이 신중한 성미가 그가 그 자리에 앉는 이유였다.
강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서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성 부협회장은 뭐라 반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분이 나서 준다면 상황은 완벽하게 해결된다. 인류, 마족을 아우르는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강검마는 모두를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아차 하는 표정으로 휙 뒤를 돌았다.
“이거 까먹었지?”
료죠가 사시미 두 자루를 내밀었다. 남편의 분신들이다.
“오늘 7월 7일, 당신 생일이야.”
“그래서 다 모인 거잖아.”
“홀숫날이기도 하지.”
강검마는 료죠의 손과 칼자루를 같이 감싸 잡았다.
“다녀올게.”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