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31)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31화(31/300)
31화 준비 (6)
호아킨 아카데미의 학원장 집무실.
메디아는 가늘게 좁혀진 눈으로 검제 지크프리트를 쳐다봤다. 그는 턱을 쓸어 만지며 깊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성성한 새치는 노을빛에 비쳐 백사장의 모래처럼 반짝였다.
메디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지크프리트를 불렀다.
“뭔 일인데 그래?”
“아, 미안하군. 아닐세.”
“하!”
말문이 막힌 메디아는 비탄을 터뜨렸다. 50년이 넘는 세월을 같이하면서 들어 본 적 없었던 검제의 사과를 하루 만에 두 번을 들은 것이다.
정말 치매인가 싶을 정도로 평시와는 상반된 태도. 메디아는 팔짱을 끼며 다리를 꼬았다.
“그래서 아까는 왜 그랬는데? 교관 중 한 명이 나한테 너랑 검마가 대련한다고 보고해 줬기 망정이지. 나 아니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어? 게다가 생도 상대로 검령의 가호를 발현하지 않나. 말을 좀 해, 이 노친네야!”
메디아는 빠르면서도 날카롭게 요목조목 따졌다. 검제는 삐딱한 미소를 걸고 찻잔을 홀짝이면서 입을 뗐다.
“가호를 발현하지 않았다면 우위를 점할 수 없었을 테니까.”
“…뭐?”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한 메디아는 귀를 탁탁 터는 시늉을 한 후, 검제를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어투에는 거짓 따위는 없었다.
방금 내가 뭐라고 들은 거지? 그 자존심 드센 지크프리트 입에서 나올 말인가? 그리고 애초에 ‘졌을 거다.’라는 가정 자체가 메디아에게는 너무 생경하게 다가왔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닥가닥 잡혔지만, 지크프리트의 강함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알고 있었다.
그 꼬장꼬장한 성격 때문에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노구에 어울리지 않게 검제의 검은 나날이 정교해지고 날카로워져 갔다.
강검마의 천부적인 재능이야 당연히 잘 알고 있지만, 아무리 재능이 천부적이라 할지라도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있을 터다.
“그 녀석은 벌써부터 심상(心想)의 경지에 달했더군.”
“뭐, 벌써?! 네가 서른 가까이 됐을 때 다루기 시작한 거잖아. 창성도 불혹이 돼서야 도달한 경지고. 근데 열일곱 살이 다룬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메디아는 더듬더듬 입을 열어 반문했다. 검제는 찻잔을 한번 홀짝이더니 탁상에 올려놓았다.
“나도 모르네. 다만, 경험을 상쇄시킬 만큼의 무언가가 있다면 말이 다르겠지만.”
“세상에…….”
메디아가 탄성을 흘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대련 중이던 강검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느덧 애티가 지워진 얼굴. 칠흑빛 이채를 띈 동공에서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때문에 당시의 메디아는 순간적으로 흠칫했었다.
생도들 앞이었기에 내색은 안 했었지만, 소름이 일순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반세기 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 메디아 속 무언가를 자극했다. 학원장직을 맡은 이후 전선을 이탈한 그녀였지만, 그 감정만큼은 잊을 리 없으니.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절감했던 순간에 몸을 지배했던 것.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이며 가장 강력한 감정. 공포였다.
그것도 폐부를 관통당한 듯한 공포.
6군단장 바스몬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섬뜩한 기분을 생도에 불과할 강검마에게서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승냥이 앞에 선 토끼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이름에 ‘마(魔)’가 껴서 그런 건가.
메디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교육자가 돼서 생도에게 느꼈다는 게 공포라니…….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참 말이 안 나왔다. 강검마가 특출 난 생도라는 건 입학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저변의 깊이가 얼마나 될지 이제 와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메디아는 괜스레 코를 찡그렸다.
잠시 고요한 적막만이 일었다. 검제는 말없이 찻잔을 홀짝이며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메디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그래서 누가 이겼어?”
검제의 오른쪽 눈썹이 씰룩이더니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찻잔의 밑동이 신경질적으로 탁상에 부딪치는 소음이 났다.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러나? 허, 참.”
“애매하게 대답해 놓고 결과는 왜 안 알려 줘? 설마… 지크 너, 졌니? 검령의 가호랑 오라까지 피워 놓고서?”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강검마의 재능이 천부적이라 해도 아직 나한테는 못 미친다. 하물며 나는 그때 무장이 만전도 아니었단 말이다!”
“뭐야, 왜 급발진이야. 그리고 평상시에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얘가 무장 핑계 대는 건 너무 추하지 않냐? 그렇게 따지면 우리 검마는 할인 매장 회칼이었는데?”
“저, 저……!”
검제가 노색이 서린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디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새끼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후볐다. 그 반응에 검제는 팔짱을 낀 채로 다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졌어, 이겼어. 결과만 딱 말해 봐.”
“당연히 내가 이겼네.”
메디아는 눈꺼풀을 가늘게 좁히며 미묘한 눈동자로 검제를 바라봤다. 검제는 진땀을 빼며 그녀의 시선을 피해 다녔다. 그러자 메디아는 한쪽 입꼬리를 삐쭉 올리며 말했다.
“구라.”
“이… 요망한 빗치가……! 사람 말을 못 믿는구나!”
성난 목소리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섞인 실랑이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잦아들었다.
* * *
멍하니 기숙사 천장을 바라보며 치렀던 싸움을 복기하는 것이 어느덧 습관으로 자리 잡아 버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낯설게만 다가 왔던 천장은 이제는 가장 포근한 지붕이 되어 있었다.
나는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낮에 있었던 신통했던 일을 곱씹기 위해서.
검제의 도발에 대련을 승낙하여 사시미를 뽑아 들었다. 거기까지는 평소에 있던 일들과 큰 차이는 없다.
“심상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기숙사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심상의 영역.
기적의 가호 M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파란이 일기 전에 검제는 레온에게 여러 가르침을 주었다.
자세와 발도술 같은 기본적인 부분부터, 검의 묘리와 가호의 효율적인 운용까지. 개중에는 심상의 영역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감응력이 뛰어난 절정급 고수들이어야지만 발을 들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지고의 영역.
자신의 무장에 대한 숙련도와 이해도가 일정 수준을 넘을 시 발동되는 액티브 공간.
세계관 내에서도 심상의 영역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영웅들은 두 손에 꼽히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레온도 검제와의 일대일 개인 교습 끝에 3년 후에는 심상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내가 딱 그 시점에 접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 있다.
심상의 영역은 한 무기를 일평생 갈고닦은 이들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장인의 경지인데, 3년 만에 마스터해 버렸으니 가르친 당사자인 검제나 주변 인물들이 혀를 내둘렀더랬지.
그런데 주인공 버프를 둘둘 두른 레온조차 소년기의 2년을 갈아 넣어 겨우 습득한 심상의 영역이, 어째서 내겐 바로 가능했는가?
잠시 생각해 보니 그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전생 포함 칼 밥만 20년 먹게 먹었다. 그것도 그냥 날로 먹은 게 아닌, 전국 제일의 칼잡이라 불리던 회칼의 장인이었다.
사시미 한정으로는 이해도나 숙련도가 끝판왕인 건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검신의 가호를 발현할 때마다, 인지를 초월한 집중력이 발휘되기도 하니까…….
얼기설기 꼬여 있는 이곳에서의 생활과 전생의 삶이 여러모로 조화롭게 맞물려 상황들을 타파해 나간다. 그리 생각하자 묘한 고양감에 입매가 꿈틀거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벌떡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뭐라도 해 볼 심산은 아니었고, 툭하면 침대에 묻는 습관을 개선시켜 보려는 요량이었다.
그래, 어차피 지금까지의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상황을 회피하기만 해서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수동적으로 휘둘릴 바에 차라리 잘할 수 있는 걸 함으로써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자.
물론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안 그래도 검제와의 대련을 끝마친 후 생도들이 미묘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었다. 질투심과 공포가 뒤섞인 감정들이 번진 얼굴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훈련이라도 해 볼 생각으로 사시미 두 자루를 챙겼다.
날이 잔뜩 상해 버린 다이쏘 사시미지만 미처 버리진 못했다. 정이 붙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간 사시미 외곬 인생을 살았던 게 아카데미 생활에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예의 클로이와의 대련처럼 장검을 어설프게 다뤄서 부러지기라도 한다면…….
거의 일주일간 극심하게 나를 괴롭혀 댔던 그 격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진다.
차라리 무통의 가호 제한 시간인 40초를 초과해 입원해 버리고 말지, 장검을 잘못 휘둘러 칼날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폐병 환자처럼 시름시름 앓으며 피골이 상접할 것이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도 ‘검신의 가호’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어느 정도 거두었기에.
사실 이 가호가 없었다면 진즉에 요단강을 몇 번은 횡단했겠지.
게다가 이틀 후면 제련된 무라사메를 받아 볼 수 있을 터다. 어떻게 제련되었을지 벌써부터 설레, 자다가도 눈이 떠진다. 그도 그럴 게, 칼에 그냥 기름만 먹이고 끝나는 게 아닌 무장 강화였기에. 기대가 배가되는 건 어찌 보면 칼잡이로서 당연한 일이다.
‘무장 강화라.’
게이머로서의 경험에 의하면 ‘기적의 가호 M’은 무기의 강화와 실패에 대해선 꽤나 관대했다.
제련이나 강화 실패 시 등급이 한두 단계 떨어지는 일은 있어도 다른 양산형 모바일 게임처럼 수백, 수천 꼬라박은 아이템들이 펑펑 터져 대진 않았다.
아마 그런 양심 밥 말아 먹은 게임었다면 시작조차 안 했을 것이다. 내 돈은 소중하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나를 집어삼킨 세계가 이곳이라는 것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래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 건 변함없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식탁에 놓인 칼을 챙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연무장에 가 심상의 영역을 다뤄 볼 생각이다.
만약 심상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만 있다면 구태여 검신의 가호를 발현하지 않고서도 전투 훈련을 해 볼 수 있을 터다.
일전보다야 제한 시간 40초 안배에 능숙해지긴 했어도, 끽해 봐야 1분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다.
만일을 대비하기에는 짊어져야 할 리스크가 너무 큰 양날의 검인 능력이다.
소지품을 챙겨 불을 끄고 나가려던 찰나, 불현듯 의념 하나가 머릿속에 빠르게 스쳤다.
‘한번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조명이 꺼져 암전된 기숙사 방 안.
나는 허리춤에서 사시미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조명이 꺼져 암전된 방 안에서 집중하려 굳이 눈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전신에 각인된 듯 새겨진 사시미에 대한 감응력과 집중력.
왠지 모르게 그 두 가지의 재료면 충분할 거라는 확신이 든다. 온 신경을 꼬나쥔 칼자루에 집중시켰다. 문득, 손에 감긴 칼자루의 감각이 새롭게 돋아나는 것 같았다.
컴컴한 시야 속, 서 있는 건 오롯이 한 자루의 칼과 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세속적인 것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던 순간.
검제와 마주했던 감각을 떠올리며 넓게 확장된 육감이 잘게 쪼개지고 다시 결합되어 무형의 덩어리를 조형시킨다. 그러자 일렁거리는 푸른 기운이 손을 타고 사시미에 작열하듯 달라붙었다.
곧이어 힘을 버티지 못한 사시미가 일순간에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