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3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32화(32/300)
32화 준비 (7)
토요일의 아침이 밝았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게 평소의 내 주말의 모습이나, 오늘만큼은 몸이 저절로 일으켜졌다.
오늘이 대장간에 제련을 맡겨 둔, 무라사메를 찾으러 가는 날이었기에.
‘드디어.’
입에서는 저절로 흥이 가득 실린 휘파람이 나왔고, 나갈 준비를 하는 내내 설렘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여태껏 다이쏘 사시미를 무장 삼아 써 왔다.
말이 좋아 무장이지, 사실상 면피성으로 갖고 온 쇠로 만든 도구였으니 제대로 된 첫 무장 수령은 감개무량할 수밖에.
게다가 지금까지 상태창에서 유일하게 상승하지 않은 스텟은 ‘무장의 격’뿐이다. 어쩌면 의문투성이인 ‘검신의 가호’의 가닥을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일단 지금 당장은 가호에 대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저 칼잡이에게 새로운 칼만큼 값어치 있는 선물은 없다는 게 내 신바람의 요였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적어도 대장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 그게… 허, 참. 유감이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적이며 심심한 위로를 전하는 대장장이.
대장간의 열기로 벌겋게 익은 얼굴에 낯부끄러움이 더해지니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갰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야. 망칫밥을 30년 가까이 먹어왔지만, 이런 케이스는 단 한 번도 없었어. 뭔 놈의 쇠붙이가 망치질 한 방에 반으로 뚝 쪼개지더라고. 마치 검 스스로가 제련되기를 거부한 것처럼 말이야. 순간, 칼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니까? 그래서 급하게 형태 틀을 뜨고서 쇳물을 녹여서 제련 했더니 이렇게 됐더라. 그래도 웬만한 대장장이가 손댔으면, 무기 형태도 못 갖추고 그냥 쇳덩이가 됐을거야. 나니까, 이 정도지. 암 그렇고 말고, 하하하!”
“…….”
대장장이는 기분 좋게 너털웃음 터뜨리며 작달막한 회칼로 변모해 버린 ‘무라사메’를 건넸다.
매끈한 적갈색 나무 재질의 칼자루, 검집을 대신하듯 노끈이 칭칭 감겨 있는 칼날.
매듭에 사이한 기운이 흐르는 미끈한 칼날은 따끈한 기름이 매겨져 윤광이 흘렀다.
만듦새 자체는 장인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느껴진다. 칼밥 20년 경력에 여러 사시미를 떠나보낸 칼잡이의 눈으로 봐도 실로 내공이 느껴지는 칼임은 분명하다.
대장장이의 말대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긴 한 모양인데…….
무장을 받아 듦과 동시에 망막에 떠오르는 창이 실소를 터뜨릴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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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메(叢雨)]종류: 사시미
설명: 이슬을 머금는 검이라 불렸‘던’ 검입니다. 장인의 노하우가 깃든 탄소강의 회칼로 거듭났습니다. 크기는 작아도 사용자에 따라 성능은 다를 수도?
규격 : 「칼날 길이– 35센티」, 「폭 – 6센티」
특성 : 「파괴력 – C」, 「사정거리 – E」, 「경도 – E」, 「성장성 – A」
등급 : (E) ~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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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발.’
대체 무기에 뭔 짓을 했길래, B급 무장이 최하급인 E급 무장, 그것도 회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경우는 ‘기적의 가호 M’ 플레이 당시에도 겪어 본 적 없었다.
그때는 끽해야 한두 단계 떨어지는 게 고작이었는데.
하락장의 비트 코인도 아니고 미끄러지듯 고꾸라진 등급에 뒤통수가 얼얼했다. 하물며, 형태도 끝끝내 사시미다. 우연인진 필연인지는 몰라도 결국에 또 사시미다.
‘…….’
무라사메를 제련하고 연단한 대장장이는 당연히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터.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이유가 대장간의 열기 때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망연한 시선으로 무라사메를 내려다보고 있자, 대장장이가 콧잔등을 문지르며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돌린 내가 날카롭게 노려보자, 사나운 감각을 느꼈는지 흠칫 몸을 뒤로 뺀다.
“거참, 미안하대도.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정말이야! 최선을 다해 봤는데, 원 형태하고 지금 형태하고 상성이 좋지 않았나 봐.”
비용을 대신해서 B급 무장의 쇳조각을 가져가 놓고서 사과만 하면 끝인가? 수억대의 무장을 10분의 1토막 가격의 최하급 무장으로 만들어 놓고서 말이다.
‘벨까?’
무라사메의 첫 개시로 칼날에 피를 매기려다가 고개를 떨궈 한숨을 푹 흘렸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수리까지 오른 열기를 조금 식힌 후, 천천히 무라사메를 살피기 시작했다.
칼자루의 만듦새는 훌륭하다. 규격 또한 가호의 규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모태가 B급 무장이라 그런지 칼의 파괴력도 이 정도면 준수하다.
사정거리야 사시미를 잡은 시점에서 포기했어야 할 부분이다. 다만, 경도가 최하등급인 게 참 아쉬웠다.
E급이긴 해도 명색이 무장인지라 웬만한 사물은 전부 베어 넘길 수 있겠지만, 나무토막이나 썰자고 중간고사 때 그 개고생을 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평타는 가야지. 몸이 탄탄한 마수를 베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경도였다.
“하아…….”
그나마 고무적인 건 성장성이었다. 솔직히 성장성만 유독 눈에 띄게 높은 게 의아했다.
상념에 사로잡혀 있자, 대장장이가 시커멓게 그을린 턱수염을 매만지며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사실 말이야, 대장장이 생활 30년에 이런 무장을 건네는 내 맘도 편치 않더라고. 그래도 그 무장 자체가 가지고 있던 포텐셜이 대단하니까 강화하면 분명 쓸 만해질 거야. 사과의 의미라고 하기는 좀 거시기하지만, 강화 재료만 가지고 오면 내 강화 비용은 받지 않겠네.”
나는 대장장이를 쳐다봤다. 거짓말을 하는 눈동자는 아니다. 저런 눈을 보니 가슴에서 솟구치던 분노가 조금은 잠잠해졌다.
성장성이 A 정도로 높다면, 무장의 잠재력만큼은 못해도 A급, 운이 좋으면 S급일 터. 거절하기에는 실로 군침이 싹 도는 제안이지 않은가.
다만, 그렇다기엔 강화 재료의 수급이 마음에 걸렸다. 강화 재료의 주 수급처는 마수였다.
예의 머맨같이 하위급 마수 무리를 갈무리해도 소재가 나오지만, 한 번 강화할 때 하위급은 수백 마리 정도를 토벌해야 한다.
그에 반해 상위급 마수 파생 소재는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일고여덟 마리 정도로 퉁칠 수 있다.
효율성을 따져 본다면 결국엔 상위급 마수를 토벌해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산 양산형 모바일 게임이 으레 그렇듯 실패 확률도 당연히 존재하기에 사실상 한 가지의 선택지가 강제된다.
특수 강화 소재로 절대 실패하지 않게 하는 소재가 있긴 한데……. 소재의 출처가 마인(魔人)인지라 그 가능성은 훌훌 털어 버렸다.
고작 무장 하나 강화하겠다고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등바등 살아 보자고 이러는 건데, 목숨을 저당 잡힐 수야 없지.
고민을 마친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였다.
“…약속하는 겁니다.”
“암, 내 대장장이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장갑 낀 손으로 가슴을 퉁퉁 두드리는 대장장이. 나는 잠시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 손바닥을 펴 뻗었다.
“그건 그거고. 제련하고 남은 쇠붙이 값 절반 정도는 돌려주시죠.”
“…뭐?”
대장장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크게 기울이며 되물었다.
“설마 무장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제값을 받아 낼 생각이었어요?”
“아니, 나는 자네 주문대로 만들어 줬고, 강화 비용도 안 받겠다고 하지 않았나!”
“남은 쇠붙이 팔면 몇천은 나올 텐데. 더도 덜도 말고 딱 천만 원 어때요? 제가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돈이 좀 궁하거든요. 이 정도면 많이 봐준 건데.”
“무슨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요놈 보게, 어딜 어른 상대로 슈킹을 치려고?!”
호통성을 지르는 대장장이. 태생이 장사꾼인지라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서는 그냥은 못 넘기는 성격이다. 나는 마른 웃음을 흘리고서 대장간 문의 걸쇠를 굳게 잠갔다.
스릉―!
뒤이어 손바닥에 착 감기는 오동나무를 어루만지며 노끈을 살살 풀기 시작했다.
검신의 가호 덕에 성정에도 변화가 생겨 이성의 끈은 잔잔하다 못해 고요했다.
“너, 너 이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대장장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안 그래도 성능 확인도 해 보긴 해야 했는데. 마침 잘됐네.”
입가에는 조소를 걸고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녹스 일 이후로 두 번째여서인지 겁박이 꽤 능숙해져 있다.
“그, 그럼 절반인 오백 어떤가? B급 무장의 쇳조각이라도 시장 유통가는 좀 달라서 말이야 원금 회수도 어렵네, 정말일세!”
뭐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는지 대장장이는 꼿꼿이 세우던 허리를 굽히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무라사메의 노끈을 살살 풀며 한 발을 더내디뎠다.
“파, 팔백! 더 이상은 안 되네!”
대장장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 가며 가격을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묵묵부답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발치에 서자 칼날을 감고 있던 노끈이 스르륵 벗겨졌고. 하얀 날이 이를 보이더니 익숙한 어구가 귓전에 맴돌았다.
[무장(武裝)의 격이 소폭 상승합니다.] [억지력을 사용해 사용자에게 맞게 동기화를 시작합니다.]지이잉―
[검신(劍神)의 가호가 발현됩니다.]대장간에 쌉싸름한 침묵이 흘렀다.
“…….”
“…….”
꿀―꺽
침을 꼴깍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천.”
“아, 알겠… 네.”
* * *
휑할 정도로 넓지만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회의실의 전경.
차례대로 숫자가 놓인 원탁에 다섯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예의 뺨따귀를 얻어맞은 원로 클라디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클라디 원로님, 우리 원로단과 일체 상의 없이 행동하셨더군요. 이번에는 정도가 과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이건 명백히 저희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클라디 원로.”
말투는 존대였으나 눈초리는 차가웠다.
중간고사 때, 클라디가 독단적으로 레온의 조를 습격한 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리 불만을 표하는 이유는 생도들의 안위가 걱정되어선 아니었다.
“여러분 모두 기실 동의한 일이잖습니까!”
“그렇다고 마인을 보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휴전 협정을 맺었다 하나, 그들은 엄연히 적이외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입니까? 하루빨리 불온한 녀석들을 처리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젠장!”
클라디는 탁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며 도리어 역정을 냈다.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클라디.”
“…아, 죄송합니다, 원로장님. 못 볼 꼴을 보였습니다.”
안면에 굵직한 자상이 아로새겨진 노인. 원로장이 미간을 좁히자 클라디는 겸연쩍게 도로 앉았다.
“그, 그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클라디는 유리잔에 담긴 고급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뒤,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 갔다.
“친애하는 원로원 여러분, 이번 일은 가벼이 넘길 만한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메디아 그년이 불과 10년 전에, 저희 측 인사들을 전부 아카데미에서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때다 싶어 검제를 아카데미에 들였습니다.”
“근데 그게 아까 말씀하신, 강검마란 생도를 조사해야 한다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학원장이 그 특진생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우리로부터 정보를 차단하잖습니까. 마치 무엇을 숨기려는 듯 말입니다.”
“뭐를 숨긴다는 건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잠자코 듣고 있던 원로장이 날 선 어조로 물었다. 클라디는 미미하게 떨리는 손을 꽉 말아 쥐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원로장님도 반 배정 시험 때의 영상을 보셨잖습니까. 그 칼솜씨가 일개 생도의 것이라는 게 말이나 된다 생각하십니까? 저도 아카데미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지만, 살다 살다 그런 칼솜씨는 처음 봤습니다. 명백히 이질적인 생도라 생각합니다.”
“…크흠.”
다섯 명은 시험 당시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몇 초 남짓에, 천재 쌍둥이의 멱을 따 버리던 몸놀림은 흡사 검을 든 귀신 같았다.
숱한 천재들이 즐비한 아카데미지만, 그건 도저히 미성년의 솜씨라 볼 수 없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안대를 낀 애꾸눈 원로가 클라디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을 조사해야 한다는 거죠?”
“신원 미상의 특진생입니다. 그 출신이 의뭉스러움은 당연한 일이지요. 혹시 모릅니다, 알고 보니 용사 후보가 그 특진생일지?”
“…용사 후보는 레온 반 라인하르트지 않습니까.”
“아직 그 녀석은 가호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 반푼이 아닙니까. 존경하는 원로장님, 어차피 용사의 처분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칠성 영웅만으로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더욱이 용사라니요! 이참에 미리 방지하고 색출해야 해야 합니다.”
“…….”
원탁 위에 양손을 점잖게 모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원로장. 결국 원로단의 판단은 그의 몫이다. 어차피 원로장의 말에 다른 원로들은 반론을 제시하지 않았기에.
클라디는 원로단의 가장 민감한 구석인 학원장을 명목으로 삼았다.
메디아가 취임한 뒤, 원로단의 입김은 다소 줄어들었다.
제아무리 호아킨 아카데미의 수뇌부인 원로단 다섯일지라도, 결국 이 세계에선 명분과 무력이 갖춰져야 발언에 힘이 실린다.
아카데미를 넘어서 정·재계를 꿰차고 있는 그들이나, ‘칠성’이란 위명 앞에선 색이 바래는 것도 비슷한 이치. 메디아가 학원장으로 취임한 이후엔 이따금 제동 정도만 거는 것이, 원로단의 현 위상이었다.
그런데 가뜩이나 칠성 영웅 때문에 위축된 와중에, 느닷없이 용사 후보가 튀어나왔다.
원로단은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왕이란 공공의 적이 필요했다.
마왕이 존재하기에 대중은 마족들의 견제 세력인 영웅들, 더 정확히는 귀족들의 말에 고분고분했으니까.
하나 공공의 적이 사라진다면 원로단이 역풍을 맞는 것은 물론이고, ‘귀족’의 근간 자체가 무너지리라.
선동과 날조에 도가 튼 원로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대 세력이 사라진 군대는 그 가치가 무용함을.
하여, 용사는 원로단에 있어 반드시 축출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클라디가 재차 입을 뗐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존재는, 아둔한 민중을 이끌고 균형을 지키려 노력하는 건저희 원로단입니다. 6군단장 바스몬이 토벌된 이후의 저희를 보십시오. 세간에선 칠성 영웅만 우러러보고, 저희는 뒷방 늙은이 취급 아닙니까!”
“…….”
누구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자리한 모두는 침묵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지금도 그런데, 더욱이 용사라면 어떻겠습니까? 민중을 이끌어 가야 할 저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원로장님, 감히 청하건대 아디토레에 의뢰해 주십시오.”
‘아디토레’란 단어가 튀어나오자 안대 낀 원로가 이맛살을 구기면서 말했다.
“그 명분 따지기 좋아하는 녀석들이, 아무 명분 없이 의뢰를 승낙할 것 같진 않습니다만, 클라디 원로.”
“원로장님이 직접 말씀하신다면, 명분이 어떻든 무시하긴 힘들겠지요. 까 놓고 말해서, 질서의 가문이니 뭐니 하지만 결국 백정 놈들 아닙니까.”
“흠흠, 그 말엔 동의합니다. 귀족으로서 우아함과 기품 따위 없는 족속이긴 하지요.”
“혹여 그들이 거부한다면, 그것대로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원로장님, 부디 지혜로운 판단을.”
일장 연설을 마친 클라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최대한 진정시켰다.
억측과 생떼라는 건 자신도 알고 있지만, 목숨 줄이 경각에 달했는데 뭐라고 못 할까.
그 음험한 여교관의 손에 불쏘시개가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클라디도 엄연히 아카데미의 원로 중 한 명. 그깟 여인네 한 명 때문에 이토록 억지를 부려 가며 원로단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따로 있었다. 입에 담기조차 섬찟한 악마.
‘마왕군 5군단장, 아고르.’
여기서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음을 구걸하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혈관에 흐르는 피들이 차갑게 식어 가는 느낌이다. 클라디는 몸서리를 치고는 다시 원로장 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내 원로장은 눈을 반쯤 뜨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디토레 가문에 연락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