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3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38화(38/300)
38화 물소 던전 (2)
대충 한 시간쯤 걸었을까, 초반에 등장한 물소 다섯 마리를 끝으로 개미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던전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가 더해져 갔다.
입구 부근만 해도 다닥다닥 걸려 있던 횃불도 그 수가 크게 줄어 있었다. 공기도 차가워져 숨을 내쉬면 입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원래 이 정도로 개체 수가 없나요?”
선두에 선 클로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게. 아무리 인기 좋은 던전이라도 이 정도로 씨가 마르진 않을 텐데 말이야. 사키, 네 생각은 어때?”
“흐음.”
사키 료조는 팔짱을 낀 채 깊게 고민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는데, 아까 그 물소들 좀 이상하지 않았어?”
“이상하다고? 어떤 게?”
스피드 웨폰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되물었다. 사키 료조는 내가 아까 건넨 사탕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아니, 확실한 건 아닌데. 왠지 걔네들 뭔가로부터 도망쳐 온 듯이 달려들었잖아. 버팔로들 습성을 고려해 봤을 때, 퍽 어울리진 않아서.”
“그건 그렇네, 확실히 물소들은 기본적으로는 온순한 마수들이니까. 철원에선 종종 밭갈이에도 쓰이는 마수기도 하고. 그나마 인간 친화적인 마수라고 해야 하나.”
…그 살벌한 소들을 밭갈이로 사용한다고? 이곳 사람들은 대체…….
웨폰과 사키는 한참을 마수 버팔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이 말하길, 이 던전의 공략 난이도가 낮은 편인 것도, 웬만한 도발이 아니라면 버팔로들은 선공해 오지 않기 때문이란다.
뭐, 그 점은 내가 플레이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점이긴 했다.
게임 플레이 당시에도 마수 버팔로, 통칭 물소들은 어그로가 잘 안 끌리기로 유명한 마수였다.
이 세계는 지금의 내게는 현실이니 게임과는 괴리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진 않은 모양.
“음, 수상쩍은 게 한둘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뭐, 별일 있겠어? 어차피 여기 루트야 정형화되어 있고, 혹여 뭔 일 나도 이곳은 전파도 통하는 던전인데 괜찮겠지.”
“그래, 뭐. 검문소에 직원들도 대기 중이니까.”
사키가 나른한 말투로 웨폰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의 말에 문득 검문소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직원이 생각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째 속 시원히 씻기지 않는 위화감.
나는 조용히 앞장서 걷던 클로이를 불렀다. 클로이는 방긋 웃으며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내 옆에 달라붙었다.
“아까 그 직원 말인데…….”
나는 그녀의 귓전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클로이. 이윽고 알겠다는 듯 주먹을 움켜쥔다.
“네, 일단은 알겠어요.”
“뭔데. 우리도 알려 줘.”
심드렁하게 묻는 웨폰에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클로이만 할 수 있는 일을 좀 부탁했어.”
“…뭐야, 너희 연애하냐? 어쩐지.”
두 눈을 게슴츠레 좁히는 스피드 웨폰. 그 말에 클로이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나는 단호하게 손을 치켜들며 완강히 부정했다.
“남녀 사이를 그렇게만 보는 것도 선입견이다.”
“그래? 난 또, 맨날 붙어 다니니까 그런 줄 알았지.”
그러자 고개만 반쯤 돌린 채 귀만 세우고 있던 사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
나를 가만히 노려보는 클로이. 입술이 삐져나온 게 제대로 삐진 모양이다.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짧게 숨을 내뱉었다.
방금 부탁한 참인데 너무 매정한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자기 전 너튜브로 배운 얀데레 조우 방침 중 하나였으니까. 잠시 시선을 어디에 둘지 찾다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스피드 웨폰, 너는 레이첼이나 사키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의외로 발이 넓던데.”
“아, 그거.”
조금만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주연급 인물들을 알고 지내는 스피드 웨폰을 플레이어였던 내가 모른다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플레이 당시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던 이름이었거든.
스피드 웨폰은 조금 흐릿한 표정을 지으며 어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가문은 레이첼네 가문, 그러니까 창성 가의 방계 가문이거든. 레이첼 그 녀석이랑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는 아니었어도 간간이 만났어. 먼 친척이긴 해도 같은 핏줄이라나.”
스피드 웨폰은 답답한 듯 짜증스럽게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혈통을 중요시하는 귀족들은, 그놈의 핏줄이 뭔지, 방계니 뭐니 하며 지리멸렬하게 따지는 듯하다.
물론 특진생인 나와는 넘사벽급으로 출신 성분의 차이가 있겠지만, 멸시가 새끼를 치는 그들의 세계에서 방계 출신은 조롱의 대상일 터.
그런데 평민 출신인 내가 이런 걱정을 해 주는 것도 웃기긴 하다. 적어도 이 녀석은 돈 걱정은 안 할 텐데,
나는 대장장이나 슈킹쳐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고민하자 넉살 좋게 웃어 보이는 녀석.
“그런 표정 짓지 마, 인마. 난 오히려 지금 내 입장이 너무 좋은데?”
스피드 웨폰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방계 출신이라서 좋아. 그 더러운 귀족 사회랑 접점도 별로 없고. 그 새끼들 아주 신물이 나거든. 아, 맞다. 그리고 사키 얘랑은―.”
그의 대답을 들은 사키는 입에 머금고 있던 양갱을 빼고선 말을 가로챘다.
“내가 필기 수석, 웨폰 얘가 필기 차석이야.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는 얼마나 길길이 날뛰던지.”
“야, 그걸 네가 말하면 어떡하냐고.”
“왜? 사실대로 말한 건데?”
사키는 우습다는 듯 킥킥거렸다.
“참고로 나는 반 배정 시험에서도 3석이지롱.”
살짝 혀를 빼무는 사키 료조. 양갓집 규수처럼 생겨서는 하는 짓은 말괄량이였다.
혀로 마른 입술을 훑는 스피드 웨폰. 무어라 반문하려다 포기했는지 턱을 씰룩거렸다.
웨폰 이 녀석이 필기 차석이었다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선입견을 깨부숴 주는 캐릭터였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스피드 웨폰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근데 검마 너도 참 대단하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나 몰라라 하지 마라.”
나는 은은한 웃음을 흘렸다.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라.”
입술을 삐죽거리던 클로이도 그 말에는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이며 중얼거린다.
“혹시 모르지. 나중에 칠성 영웅 중 한 명이 될지?”
“맞아요, 검마 군이라면.”
그 말에 사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차갑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돌아 우리를 스윽 훑어보았다.
“나는 칠성 영웅이 싫어.”
그리 말하고선 꿍한 표정으로 휙 고개를 틀어 버린다. 동요를 내보이지 않겠다는 듯, 애써 표정을 숨겨 보지만, 어째 사키의 눈동자가 조금 젖어 있던 것 같은데.
“뭐야, 쟤?”
스피드 웨폰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키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상체를 살짝 뒤로 돌려 빨리 오라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일단 가자. 던전 공략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지.”
“그렇지.”
웨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검마 군.”
“응?”
대열의 후미에 있던 클로이가 내 옷소매를 끌며 말했다. 그녀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뭔가 좀 이상해서요. 뒤편에서 마수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는데.”
“아, 그래? 오면서 우리가 발견을 못 했나 보네. 잘됐다. 마수들은 몇 마리야?”
“어, 그게.”
“정확할 필욘 없어. 몇 마리 정도인지만 알려 줘.”
확신이 안 섰는지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입술을 뗐다.
“가호로 감지되는 건 대략 오십 마리 정도…….”
“뭐라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잘못 들었나 했지만, 동시에 어마어마한 소음이 우리의 귓전에 내다 꽂혔다.
두두두두두두―!
던전이 흔들린다. 우리의 시선이 일제히 뒤편을 향했다.
수를 가늠할 수도 없는 버팔로 무리가 안광을 벌겋게 늘어뜨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코뚜레가 뚫린 콧구멍에선 빨간 선지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녀석들 뭐야?! 뭐 저렇게 많아! 그리고 애초에 버팔로 맞아?”
웨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던전 입장 초반에 토벌한 그 버팔로들과 외견상의 차이는 없었지만, 기세가 흉험하기 짝이 없었다.
“음무우우우우!”
맨 앞 정중앙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물소가 탁한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무리가 사나운 함성을 내지른다.
““““““음무우―우우우!””””””
우리를 묵사발을 내 버리자는 열망에 들어찬 환호성 같았다. 발굽에 땅이 어찌나 세차게 흔들리는지 머릿속이 울리는 것 같았다.
‘온순한 마수라며!’
원거리 공격이라는 약점이 분명한 마수라 할지라도 그 수가 수십 마리에 이르니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금세 따라잡혀서 저 가시 돋친 뿔에 꿰어질 터다.
나는 파훼법을 강구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놀랍게도 조금 집중하는 것만으로 칼을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또렷한 영상이 투사되는 것 같았다.
목적을 확립한 순간, 당혹감은 빠르게 누그러지고 차갑게 상황을 마주한다. 암순응이 얼추 끝났는지, 칙칙한 어둠 속에서도 시선은 마수의 수를 정확히 가늠하기 시작했다.
호흡이 살짝 가빠졌다. 팽팽해진 공기가 피부를 휘감는다. 하지만 품 안에 있는 무라사메의 차가운 감촉이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첫 스승님이 해 주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칼에는 다 용도가 있는 법이다. 닭 잡는 칼로 소 못 잡듯이, 사시미는 생선한테 쓰는 칼이다, 알겠나.’
잇새로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생선 잡는 칼로 소 잡게 생겼네.’
곧바로 나는 클로이에게 말했다. 급박한 상황에 맞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클로이, 넌 저 버팔로 무리의 시선을 분산시켜. 정면 돌파하지 말고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면 대열이 흐트러질 거야.”
“아아, 네!”
“굳이 공격할 필요는 없고 시선만 좀 끌어 줘.”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클로이. 얼굴에는 믿음이 번져 있었다. 그녀는 등에 멘 카타나를 뽑아 들었다.
이이잉- 하며 칼날이 울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쇠뇌가 어지간히 손에 안 맞았던 모양이다.
이어서 나는 웨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의 얼굴에서 공포와 놀람의 감정이 지워져 나간다.
“넌 알지?”
“자식,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며 목에 걸린 리코더를 흔들어 보이는 웨폰. 눈동자에는 신뢰가 일렁였다.
“사키, 너는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오는 녀석들을 저지해.”
“어, 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는 사키. 나는 그녀를 등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쟤 뭐야, 뭔데 이렇게 침착해?”
사키는 가만히 날 응시하더니 웨폰에게 물었다. 웨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놀라지 마라.”
“…뭐?”
사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에 웨폰은 말없이 씨익 웃어 보인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손가락 사이마다 클로(claw, 갈고리)처럼 칼을 끼웠다.
꾸욱.
아귀에 힘을 살짝 주자 여덟 자루 칼날의 거리가 벌어졌다.
곧이어 가슴팍에 겹쳐 모은 팔을 펼치자 검집이 전부 벗겨졌다.
―스르릉!
서늘한 칼날들이 투명한 울림으로 노래한다.
[검신(劍神)의 가호가 발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