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5)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5화(5/300)
5화 아카데미는 녹록지 않다 (1)
호아킨 아카데미의 학원장 집무실.
지크프리트와 메디아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한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하, 내가 이십 년 가까이 학원장을 맡아 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
한숨을 푹 쉬던 메디아는 이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싫습니다.’
최상위 반인 성(星) 클래스를 제안하자마자 강검마가 내놓은 대답이었다.
배정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다 해서 클래스 이름이 ‘성(星)’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 천상계 클래스.
하물며 특진생이 배정되는 건 유례가 없었다. 게다가 강검마는 수석 선서식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메디아는 병실에서 보았던 표정을 떠올렸다. 검은 머리에 맹랑한 말투의 소년. 칠성(七聖) 영웅인 그들을 보고도 긴장하지 않는 태도.
강검마가 수석 판정을 받고, 노발대발하던 아카데미의 원로들은 영상 속에서 번쩍거리던 회칼을 보고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보여 준 검극은 칠성 영웅 중 한 명인 그녀에게도 반세기 만에 얼얼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메디아는 상념을 털고 검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야, 지크.”
“…….”
“솔직히 우리 검마 너무 멋지지 않아?”
“우리 검마?”
“그 아카데미 꼰대들도 처음에는 떽떽거리다가 시험 영상 보고는 결국 인정했잖아. 네 손녀 대신에 검마가 수석 받은 게 그렇게 못마땅해?”
검제가 마뜩잖은지 미간을 좁혔다.
“시조의 영웅 의지가 깃든 아(亞)공간의 채점에 토 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아카데미가 그를 수석으로 정했고, 우리는 그저 따를 뿐. 단지…….”
검제 지크프리트는 말을 멈추고 침음을 흘렸다.
‘강검마’
기술이 뛰어났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육신이 뛰어났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경험이 뛰어났다면 끄덕였을 것이다.
약관이 채 지나지 않은 소년이 보여 준 검(劍)은.
‘벤다.’라는 개념을 구현한 듯한 움직임.
지크프리트 자신이 한평생 추구해 온 검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였다.
그러나 소년의 막힌 혈(穴)들을 뚫었을 때 느꼈던 위화감.
신체 단련은 개나 줘 버린 말랑한 몸뚱이는 마치 담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담았던 것처럼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우연이었을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지만, 애써 눌러 본다.
이 나이 먹고 호승심이라니. 그것도 자기 손녀딸과 동갑인 소년에게.
내면에서 조립되지 않는 의념이 목에 박힌 생선 가시처럼 갑갑하게 했다.
생각에 잠긴 그를 깨운 건 축 늘어져 중얼거리는 메디아의 입술이었다.
“얼굴도 곱상하고… 위기에 빠진 여자를 위해 적들을 베는 모습은 정말…….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아니, 지금도 가능한가? 야- 틀딱, 어떻게 생각해!?”
메디아가 허벅지를 오므리며 침을 꼴깍였다. 검제는 표정을 구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서 너 같은 여자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나.”
“너 요새 성스타그램 하냐? 왜 자꾸 아까부터 대학생들, 대학생들 거리지?”
그제야 메디아는 상체를 일으켜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그래, 그 잘나신 주둥이 한번 열어 봐. 나 같은 사람을 뭐라고 하는데?”
“빗치(Bitch).”
그날, 인류 최강 지크프리트는 빗치에게 반세기 만에 얼굴에 생채기가 났다.
* * *
학원장 메디아의 입김 덕에 이틀 정도를 더 쉴 수 있었다. 몸 관리는 젊어서부터 해야 한다나 뭐라나.
하여튼 헐렁한 분위기의 여자였지만, 교육자로서의 마음가짐은 확실했다. 학생에 대한 배려와 합리성이 적절히 섞인 느낌이랄까.
⌜⎯랑(狼)⎯⌟
눈앞에 교실의 문패가 보였다.
나는 성(星) 클래스로 보내겠다는 메디아의 유혹 섞인 제안을 뿌리치고 범 클래스를 끝까지 고집했지만, 결국은 적당히 타협을 봐 랑 클래스에 배정됐다.
대신, 조건으로 내가 학년 수석이라는 사실과 시험 때의 일은 비밀리에 부쳐 준단다. 괜한 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건 내가 바라던 바였기에 잠시 고민하다 바로 승낙했다.
지리멸렬하게 물고 뜯고 싸워야 하는 고위급 클래스보다 하위 반으로 가 무탈하게 학업을 마치는 게 골자였으니까. 이 정도면 그래도 상정 범위 안이다.
“스읍.”
나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열리는 소리도 안 나게 하려고 숨도 참았다.
고딕풍의 운치가 있던 건물 외관과는 달리 내부의 인테리어는 현대식으로 깔끔했다. 녹색 칠판을 시작으로 하여 기다란 책상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학생들끼리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쭈뼛쭈뼛 교실에 들어서자 얕보듯 내리깔리는 시선들이 내게 고정되었다. 학생들은 내 명찰 색을 한번 흘기고선 자연스럽게 다시 떠들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는 듯이.
말 그대로 그냥 개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무시는 무시로 되받아치는 것. 아싸에겐 아싸의 삶이 있는 법이다.
어느 자리에 앉을까 고민하던 중, 맨 끝 열 구석 자리가 비어 있는 게 보였다.
‘오, 저기 앉을까?’
맨 뒷자리에서 그윽하게 창을 바라보며 봄 햇살을 쬐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
꼴값 떨지 말고 대충 앉자.
나는 앞에서 세 번째 열의 중간 즈음에 앉았다. 긴장해서 바싹 굳어 있던 어깨에 힘을 푼 후, 창밖을 내려다봤다.
나뭇가지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카나리아 한 쌍이 보였다. 잠시 멍한 얼굴로 새들의 짝짓기 현장을 쳐다보던 중이었다.
똑똑.
책상을 두드리는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고개를 돌리자 여학생 하나가 말을 더듬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 저기.”
적갈색 반곱슬머리에 강아지상의 자그마한 여학생. 아직 애티가 안 벗겨진, 복슬복슬하니 귀여운 인상이었다.
살짝 눈이 마주치자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붉히며 휙 고개를 돌려 버린다.
“…….”
“…….”
몇 분간 가라앉는 침묵에 내가 먼저 운을 떼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험 때는… 고마웠어요…….”
시험이란 말에 생각났다. 그 사이코 쌍둥이한테 피죽이 될 뻔했던 여학생.
“아, 그때.”
“…네.”
근데 동갑끼리 웬 존댓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녀는 힐끔거리다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본다. 낯을 어지간히 많이 가리는 모양이다.
“고맙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당시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기를 빼 들었다. 눈앞의 여학생을 위하는 마음이 희미하게도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으나, 결국 나 살자고 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론 그녀를 구한 모양새였지만, 내가 뱉었던 대사에는 위선이 다분히 녹아 있었다. 그리 생각하자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아, 아니에요! 저,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가 쓰게 웃자 여자애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나도 모르게 입가에 기분 좋은 아빠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 난 강검마.”
“제 이름은 클로이예요…….”
“반가워, 클로이. 같은 반일 줄은 몰랐네.”
“아, 저도 반가워요……!”
여자아이도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름을 말해 줬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게임 중반부까지 스토리를 진행했던 내가 모르는 이름이라는 건 둘 중 하나. 나처럼 엑스트라든지, 아니면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이든지.
잠시 생각하다, 나는 후자의 생각은 접어 두었다.
‘기적의 가호M’ 후반부 스토리의 주된 내용은 마족들과의 전투였다. 그 시점에 이렇게 작고 가녀린 소녀의 등장은 너무 뜬금없지 않은가. 게다가 반에 한 명씩 있는 존댓말 속성까지.
‘나 같은 엑스트라구나.’
반가운 마음에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아, 맞다. 혹시 시험 때 일, 비밀로 해 줄 수 있을까?”
“아? 아, 네. 물론이죠.”
클로이는 이유는 묻지 않고 긍정하듯 작게 고갯짓했다.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클로이가 우물쭈물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스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모두 착석!”
수업 시작을 알리는 쩌렁쩌렁한 외침이 교실 내벽에 울려 퍼져 메아리를 만들었다.
‘나중에 말하자.’
나는 소리 없이 입을 움직여 클로이에게 말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일단 입학을 축하한다. 그대들은 고결한 시조의 영웅, 발로르 호아킨 님의 의지를 잇는 자들로 선택받아 이 자리에 있다. 자부심을 품도록.”
단단한 근육질의 빡빡머리 교관이 얼굴을 익히려는 듯 면면들을 훑었다. 그러던 중, 시선을 잠시 내게 멈추고선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후, 절도 있게 방향을 틀어 분필을 잡는다.
“소개가 늦었군. 나는 1년 동안 너희를 담당하게 된 랑(狼) 클래스의 주임 교관 이원빈이라고 한다.”
저 얼굴로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원빈이라고 밝히고선 피식- 하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교관.
“오늘은 첫날인 만큼 수업은 없다. 대신 간단한 체력 훈련이 있을 예정이니 환복하고 30분 후까지 연무장에 모이도록. 질문이 있으면 해도 좋다.”
피어싱을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체력 훈련 메뉴가 어떻게 됩니까, 교관님?”
“간단하다. 팔 굽혀 펴기 1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스쿼트 100회 그리고 연무장 10바퀴만 뛰면 된다.”
그 말에 괴고 있던 턱이 미끄러졌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그맣게 ‘개꿀인데?’ 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니, 그리고 저 훈련 메뉴는 생도들을 대머리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교관의 노란 속내가 너무 보이는 거 아닌가. 자기가 대머리라고 창창한 젊은이들마저 대머리로 만들어 버리려는 심보가 분명하다.
“더 이상 질문 없으면, 환복하고 장소로 모인다. 이상.”
꽉 차게 늘어선 학생들이 탈의실로 향한 사이, 나는 교관에게 슬쩍 붙어 말을 걸었다.
“…저, 교관님.”
“왜 그러는가, 강검마 군.”
‘내 이름을 어떻게?’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제가 몸이 좀…….”
“음.”
교관의 눈매가 좁혀지다 이내 입가에 불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암, 수석 정도 되는 학생에게 이 정도 메뉴 가지고는 몸도 안 풀리겠지. 안 그런가!? 그럼 이참에 첫날은 성(星) 클래스에서 훈련받는 게 어떤가? 학원장님께서 강검마 군은 모든 클래스의 수업을 전부 들을 수 있도록 지시하셨네.”
…그 음란 마귀 학원장.
“아닙니다, 교관님. 생각해 보니 화장실이 잠시 급했던 것 같습니다. 마침 몸이 찌뿌둥하던 차였는데, 어쩜 그렇게 딱 맞춰서 짜 오셨는지. 교관님의 안목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하하.”
내 반응이 마음에 든 듯 교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역시 수석이라 그런지 시원시원하구먼! 그래, 얼른 환복하고 연무장에서 보도록 하지.”
나는 힘차게 ‘네!’ 하고 대답한 후,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씨, 씨, 바- 헉, 아, 알.”
입에서 욕지거리가 굴러다녔다.
“하나, 둘, 셋, 넷. 어쭈, 다리가 보인다. 빨리빨리 움직인다. 실시!”
“““““실시!”””””
끔찍하게 넓은 연무장을 생도들이 교관을 따라 뛰었다.
뭐가 저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는 남학생들과 꺄르르 웃으며 뒤쫓는 여학생들, 심지어 떠들기까지 하는 학생들도 보인다.
“제-발…….”
진짜 뒤질 거 같다. 아니, 뒤져 가고 있었다.
달음질의 관성이 위장을 흔들어 대니 목젖에서 시큰한 위산이 느껴졌다.
하늘이 노랗다는 게 뭔지 알 거 같다. 내 속이 노래지니까 하늘도 노랗게 보이는 거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뒤처지자 클로이가 옆에 따라붙었다.
“하아, 하아⎯.”
“…많이 힘들어요? 몸이 안 좋아 보여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걸 간신히 고른 후 고개를 돌렸다.
“하, 하, 괜찮아.”
“검마 군은 몇 바퀴째인가요?”
“아마 다섯 바퀴 정도? 클로이, 너는? 한참 뒤쪽에서 오는 것 같던데…….”
“…저는 아홉 바퀴째요.”
“어?”
“조금만 더 힘내세요!”
클로이는 손을 가슴에 모아 응원하고는 다시 선두로 뛰어갔다.
“…….”
작달막한 키에 어울리지 않게 발이 날다람쥐처럼 잽싸고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