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5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52화(52/300)
52화 짧은 여유 (3)
시험이 시작되고 호기롭게 시험지를 받은 것도 잠시,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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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4년도 필기 중간고사〉
1번. 「신은 죽었다!」 1844년 프로이첸 왕국 태생 철학가인 프리드리히 나체가 말한 이 구절의 본질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2번. 인간은 과연 가호(加護)를 부여받을 자격이 있는 생물인지 견해를 적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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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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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잃은 초점.
나는 눈을 돌려 주변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다들 익숙하다는 듯 부지런히 연필을 끄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시발. 시험이 서술형이라는 말은 없었잖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는 이곳 호아킨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래 필기시험을 치러 본 적이 전무했다.
입학시험도 ‘나’ 이전의 강검마 녀석이 대신 치렀던 거였으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서 시험은 이렇게 서술형인 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언질 한 번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조졌네.”
나는 숨을 몰아 뱉었다. 그래도 최선은 다해 봐야지.
이윽고 각 면의 끝 쪽에 1부터 5까지 차례로 적힌 연필을 움직였다.
* * *
같은 시각,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베임하르크가(家)의 별장.
허리춤에 쇠붙이를 치렁치렁 매단 무리가 베임하르크의 고용인을 따라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단장, 우리도 이제 출세했네, 호아킨 아카데미의 원로님께서 다 부르시고. 이참에 단장도 양지로 진출해 보는 건 어때?”
추레한 남정네들 틈 사이에서 도드라지는 인상착의 여인. 차림새는 화려하지 않았으나 단아한 외모 덕에 맵시가 귀티가 났다.
“파릭, 남은 혀도 뽑히고 싶지 않으면 닥쳐.”
“아, 알았어! 알았어. 뭘 그리 죽일 듯이 노려봐? 농담한 것 가지고.”
음색에 짙게 배어 있는 살기. 파릭은 화들짝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쉭쉭, 발음 새는 소리가 났다. 그의 반응에 여인은 도로 고개를 앞으로 틀었다.
“단장도 참, 너무 고지식하다니까.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동조를 구하는 파릭은 괜스레 옆에서 걷던 동료 장태풍을 툭툭 쳤다.
“파릭, 너는 신참이라 모르겠지만, 단장은 원래 윗분들을 싫어한다.”
“뭐? 근데 왜 이번 건은 받아들인 건데?”
장태풍은 비릿한 미소를 걸고서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며 말했다.
“당연히 이거지, 이번 건은 거절하기엔 너무 금액이 크잖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단장도 그 점을 참작한 거지.”
“하긴, 착수금이 두당 1억에 성과금은 그 두 배니까.”
두툼한 손가락으로 턱을 쓰며 고개를 끄덕이는 파릭. 장태풍도 동조하듯 어깨를 들썩였다.
이윽고 그들은 클라디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고 고용인이 기품 있는 손동작으로 문을 두드렸다.
“클라디 폰 베인하르크 님, 그들을 데려왔습니다.”
“들이게!”
파릭과 나머지 단원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집무실을 어수선하게 구경했다. 클라디는 잠깐 미간을 구기고는 집무실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낮잡아 보는 클라디의 말투에 파릭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러나 단장의 손짓 한 번에 감정을 삭였다.
“자네들에게 맡길 일이 있어 이렇게 불렀네.”
“누구를 죽이면 됩니까?”
단장이 무표정으로 묻자 클라디의 입가에 음충맞은 미소가 걸렸다.
“저자들에게 그것을 주게나.”
클라디가 턱짓하자 고용인이 탁상에 놓인 서류를 단장에게 내밀었다. 파릭이 단장의 어깨 너머로 서류에 박힌 생도의 사진을 확인했다.
“뭐야, 아직 아래에 털도 다 안 난 것 같은 애송이인데? 생긴 건 꼭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다음 주에 ‘무인도 생존 훈련’이 있네. 그곳에서 그 녀석을 처리해 주면 되네. 착수금은 전해 들었다시피 두당 1억. 성과금은 따로 주겠네.”
“…사후 처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클라디는 그리 질문하는 단장을 쳐다봤다.
감색 머리칼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지만, 그녀의 고운 얼굴은 전부 가려지지 않는다.
프레데터(Predator), 레이 션.
냉막한 태도로 용건만 꼬집는 점은 다소 고깝긴 해도, 실력 하나만큼은 발군이리라.
클라디는 느릿느릿 잔을 기울여 마른 입술을 축였다.
“섬 주변에 널린 게 바다 아닌가. 던져 버리게. 그러면 물고기 밥이든 상어 밥이든 되겠지.”
참고로, 그날 저녁 메뉴는 제주 앞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도미회였다.
* * *
필기시험이 끝나고 점심시간. 동아리 부원들과 같이 학내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점심을 먹고 있다.
아직 동아리 창설 전이지만, 부원 한 명만 구하면 되는 상황이었기에, 클로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미 나를 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야, 사키! 어떻게 첫 번째 문제 답이 그건데?!”
“너야말로. 신은 죽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바보가 어딨냐?”
“원래 이런 문제일수록 보다 직관적인 해석을 요하는 거라고!”
“입만 살아 가지고… 됐다 됐어. 에휴, 말을 말자.”
버럭 소리를 높이는 웨폰과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는 사키. 두 사람은 시험 답안을 대조해 가며 갑론을박 중이었다.
물론 말만 갑론을박이지 웨폰의 일방적인 강론이고, 사키는 졸음을 머금은 얼굴로 입맛을 쩝쩝 다시며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었다.
볶음밥을 먹는 클로이만이 그들의 옆에서 햄스터처럼 입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먼젓번에 내가 한번 해 준 이후로 그녀는 점심 대부분을 볶음밥으로 싸 왔다.
“검마 군은 시험 잘 봤어요?”
클로이가 눈만 살짝 올려 물었다. 나는 머쓱하게 턱을 긁적이며 대꾸했다.
“다 찍었어.”
“엥, 서술형인데 어떻게 찍어요-! 검마 군도 정말 짓궂어.”
클로이는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키득거리며 웃는다. 왠지 얘라면 적당히 믿고 넘길 줄 알았는데.
‘너무 바보로 본 건가?’
시험 결과가 어떻든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기치 못한 서술형이었다.
나름 손 닿는 데까지는 답안을 써 내려갔다. 세부적인 지식은 얕으나, 게임으로 접했던 단말마적인 정보들을 억지로 짜내어 적었다.
최선은 다했다. 결과는 교수님의 손에 달렸지만.
어차피 큰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고 보여 주기식이었는데, 순위 좀 낮으면 어때. 그래도 클로이보다는 위 순위일 터다.
부지런히 숟가락을 움직이는 클로이를 보자 문득 의문이 떠올라 물었다.
“클로이, 혹시 녹스한테서 따로 들은 말 없어?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별 반응이 없는 것 같아서.”
“…아, 그게.”
몇 주 전, 녹스가 나를 직접 찾아와 건넨 이야기.
 ̄아카데미의 원로단, 그들이 아디토레 가문에 강검마 네 녀석의 처분을 의뢰했다.
확인 절차에 두 달은 걸릴 거라 말했지만, 게임상에서 조력자로서의 아디토레의 일 처리는 빠르고 확실했었다.
그들의 정보 수집력으로 지레짐작해 봤을 때, 지금쯤이면 얼추 결론을 내렸을 타이밍이다.
하지만 한층 더 차갑게 갈무리한 오감을 상시 유지 중임에도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었다. 그 점에 오히려 불안한 바람이 일었다.
‘폭풍전야.’
태풍이 불기 직전처럼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정적이다.
게다가 버팔로 던전 회의 당시 느껴지던 시선도 그날 이후로 감지되지 않았다. 상시 감응력을 곤두세워 주변을 넓게 둘러보아도, 딱히 이상 징후는 없었다.
내 질문에 클로이는 분주히 움직이던 숟가락을 내려놓고선 입술을 달싹거렸다. 팔자를 그리는 눈썹은 흡사 풀 죽은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그, 그게, 사실 어제 녹스한테 전화가 한 통 오기는 했는데, 일찍 자느라 못 받았거든요.”
분명 클로이는 야행성이었던 것 같은데, 얼마나 늦게 전화한 거지?
시간 불문하고 온 전화라면 급한 소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아디토레 구성원들의 전화번호는 일급 기밀로 보호되어, 외부인에게 반출되는 것은 불법이다. 지구로 따지자면, 국정원 요원들의 신상이 비밀에 부쳐지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녹스가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소식은 클로이를 통해 전해 들어야 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한마디 한마디가 내게는 절실했다.
“전화는 몇 시에 왔었어?”
나는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러자 클로이의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와 간극을 좀 벌렸다.
“저, 저녁 7시요. 요새 시험 공부 하느라고 밤을 좀 많이 새워서… 헤헤.”
“…….”
백 퍼 고의로 안 받은 거네.
물론 녹스의 소식통이 내게는 긴요할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그를 불편해하는 듯 보인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겠지만, 남의 가정사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남매인데 사이가 괜찮으면 좋으련만.’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아쉬움을 털었다.
‘급한 전화면 다시 오겠지.’
클로이는 멋쩍게 내 눈치를 보다가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녹스라는 이름에 입맛이 가셨는지 사뭇 시무룩해진 기색이다.
그녀의 입가엔 밥알이 청승맞게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밥알 몇 톨. 떼 줄까 하다가 말았다.
‘괜히 오해 살 짓은 하지를 말자.’
클로이는 뒤늦게 이물감을 감지하고는, 고개를 휙 틀어 밑소매로 입가를 거칠게 닦았다. 뒤통수만 보이는데도 민망함이 뚝뚝 묻어 있었다.
‘…말이라도 해 줄 걸 그랬나.’
그렇게 잠시 후, 한참을 열띠게 토론하던 웨폰과 료조. 결국엔 제풀에 꺾인 웨폰의 얼굴에 침울함이 번졌다. 아무래도 결론이 난 것 같았다.
클로이는 별 관심이 없는지, 고개만 갸웃거리다 말았다.
“으아아아악! 대체, 왜 왜! 몇 날 며칠을 밤새워서 공부했는데!”
“이제는 순순히 인정하지 그래? 그냥 지.능. 차이라는 걸?”
비탄을 터뜨리는 웨폰과 키득거리는 료조.
아무래도 열띤 토론의 승자는 료조, 패자는 웨폰인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웨폰은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는지, ‘두고 보자.’라는 독기 품은 눈빛을 료조에게 쏘아 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료조는 하품을 잘게 하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내 옆에 바싹 붙었다.
뭔 이야기를 그렇게 해? 둘이 진짜 연애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클로이의 입가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뺨의 홍조가 가일층 진해지더니 이윽고 손으로 어깨를 싸매는 그녀.
“항상 말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단호히 그 여지를 잘라 냈다.
그러자 도로 제자리를 찾는 클로이의 입꼬리.
클로이는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데 목소리에 옅은 건조함이 스며 있었다. 반면, 료조는 양갱의 겉 포장을 벗기면서 묘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노린 거다.’
보면 료조 얘는 참, 성격이 애가 맞나 싶을 정도의 냉정함을 보이면서도, 간혹 천진한 장난을 치기도 했다.
레이첼처럼 저돌적으로 치는 게 아닌, 은연중에 흘리는 그런 느낌. 그래도 둘 사이는 겉보기엔 완만했다.
말이 자주 오고 가진 않았지만, 내 주위의 여자만 보면 발톱을 드러내는 클로이가 유일하게 꼬리를 마는 인물이 료조였다. 말재주 덕인지 레이첼의 완력에도 굴하지 않는 클로이를 길고양이 다루듯 잘 골려 먹었다.
“맞다. 부장, 너는 왜 맨날 내 연락 씹어?”
“뭔, 맨날이야. 한 번 씹은 것 가지고.”
“오늘 아침에도 씹어 놓고선 무슨.”
료조는 샐쭉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자 클로이는 잠시 눈만 깜빡거리더니 목을 옆으로 크게 꺾었다.
“…연… 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