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53)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53화(53/300)
53화 짧은 여유 (4)
향긋한 풀내가 감도는 초여름의 어느 날. 마침 필기 고사도 끝났겠다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청춘이 쏟아져 나왔다. 수목의 녹음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새소리가 청춘들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수풀림 사이 은밀한 곳에서 서로를 향해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 한 쌍도 있고, 벤치에 앉아 하하 호호 빙그레 웃으며 정답게 동기의 뒷담을 까는 여학생들도 보인다.
하지만 여기 돗자리를 깔고 앉은 생도들의 기류는 조금 달랐다. 서늘함을 넘어 싸늘해진 공기.
부원들의 시선이 클로이에게 모였다. 일변한 기류에 낌새를 느낀 웨폰이 숨을 집어삼켰다. 얘는 겉 인상만 보면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게 생겨선 겁이 너무 많았다.
“클로이?”
“…….”
웨폰은 그녀의 이름을 의문문으로 불렀다. 외견상 클로이가 분명하지만, 그녀가 아닌 듯한 이질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서늘하게 비어 버린 눈동자에 미묘하게 씰룩거리는 뺨.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지금이 딱 그 상황인 것 같았다.
“엥, 뭐야. 클로이 왜 저래?”
“아씨- 절로 냉큼 떨어져!”
“아, 뭔데 그래! 검마 너는 클로이랑 안 지 좀 됐으니까. 왜 저러는지 알 거 아니야,”
사키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로이도 동시에 똑같이 기묘한 각도로 고개를 기울였다.
빨간 홍채를 싸맨 눈자위. 저걸 뭐라 불렀더라, 사백안이었나? 듣기만 했지,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다. 나는 땅을 짚은 손으로 몸을 밀어 조금씩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
평소에는 아기 새 같은 얼굴에 말랑말랑한 성격인데, 지금 클로이의 표정은 영락없는 독사의 그것이다. 독심을 잔뜩 품은 눈동자는 광채를 잃어 가고 있었다.
“검.마.군?”
그때, 나를 쳐다보던 클로이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단음절로 뱉어 낸다.
머메이드와 카우 킹을 상대할 때도 돋지 않던 소름이 일순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나한테는 전화번호도 안 알려 줬으면서.”
“클로이 그건, 네 전화번호가 기밀이니까.”
나름대로 변명을 읊어 보지만, 클로이의 귓가엔 닿지 않는지 계속해서 조그마한 입술을 움직여 댔다.
“…맨날 주변에는 나 말고 다른 여자들을 끼고 놀고.”
“…나는 검마 군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검마 군은 날 항상 슬프게 만들어.”
“…나만의 왕자님이 되기로 약속했으면서.”
뭐라는 거지? 다른 건 몰라도 여자를 끼고 노는 거랑 왕자님 소리는 그냥 넘길 수 없다.
클로이는 더듬거리던 말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속사포로 중얼거린다.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아무래도 클로이 내면에서 두 자아가 팽팽하게 맞부딪치는 것 같았다.
‘…하.’
얀데레 모드 직전의 클로이.
도무지 익숙해지지도,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속성이다. 한동안 잠잠해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방심했다.
“뭐야, 얘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아리송한 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묻는 사키. 신체를 접촉하자 적갈색 눈썹이 좀 더 휘었다. 나는 침음만 흘리며 속삭이듯 대꾸했다.
“…료조, 너 얀데레라고 아냐?”
“앙데레? 아씨, 뭔 발음이 그렇게 어려워. 나 일본 사람인 거 몰라?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고.”
혀를 빼꼼 내밀며 새침한 표정을 짓는 료조.
‘아니, 미친.’
서브컬처를 잘 모르는 나도 아는데, 본산지에서 온 그녀가 모른다는 게 참 우스운 상황이다.
‘…근데 얀데레가 어느 나라 말이었지?’
나는 머리를 훌훌 털어 잡념을 쫓아냈다. 어쩌면 료조 얘는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중에 딱밤이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와중에도 살금살금 주머니를 향해 기어 가는 클로이의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커터 칼을 찾는 손길.
대체 왜 얘는 커터 칼을 품고 다니는 거지? 하는 의문이 어리다가 핸드폰은 안 챙겨도 사시미는 챙겼던 오늘 아침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란 새끼도 참.”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클로이의 눈빛을 보아하니 그래도 아직까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진 않은 모양. 진정시키려면 지금밖에 없는 것이다.
와중에도 흥미롭다는 기색으로 내 옷소매를 잡아끌며 클로이가 왜 저러는지 연신 묻는 료조. 이거 왠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상황을 대략 파악한 듯한 웨폰이 그녀의 이마를 찰싹 때렸고는 뒤로 잡아끌었다. 그 모습에 살짝 드는 아쉬운 마음에 옅은 침음을 흘렸다.
존나 세게 때리지.
료조는 이마를 문지르며 사나운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쟤는 알까, 웨폰이 목덜미에 칼날이 들어올 뻔한 걸 살려 줬다는 걸.
그렇게 사키와 웨폰이 실랑이를 하던 중 이윽고 주머니에서 커터칼을 뽑을랑 말랑 각을 잡는 클로이.
문답 무용으로 연장부터 뽑아 드는 모습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클로이가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하는 이유가 뭘까. 나를 향한 비틀린 감정은 일기장으로 확인했었지만, 반 배정 시험에서 한 번 도움을 준 것만으로 그런다고?
애초에 아디토레의 구성원들은 진즉에 감정을 도려내는 훈련의 받을 터인데, 클로이가 내게 품은 감정이 과연 연정이 맞기는 한 건가? 아니, 그리고 보통 좋아하는 사람한테 칼부터 들이미나?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찼다. 하지만 일단 지금은 클로이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방법은 당연히, 대화.
드⎯르륵.
플라스틱에 칼날이 걸리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클로이. 재차 탁해진 동공은 핏빛을 머금고 있었다.
최근 자기 전, 너튜브로 얀데레 공부를 소홀히 한 과거의 나를 자책하면서 대화로 상황을 풀어 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당장에 사시미를 들이밀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억눌렀다. 쓸데없이 유혈은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일전에 그녀의 머리칼을 잘랐던 것에 아직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물론, 당시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정당방위긴 했다. 그러나 날붙이로 하는 대화가 만사형통은 아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말로 해결을 보는 것. 그게 인간과 짐승을 구분 짓는 뚜렷한 기준이지 않을까.
“미친.”
경악한 표정으로 웨폰은 당혹 성을 내질렀다. 얘는 내심 클로이의 특이함을 알아차린 것 같은데, 겉모습과 달리 여린 속내 탓에 몸이 굳은 것 같고.
그 와중에도 료조는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나와 클로이를 번갈아 보았다. 말릴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다는 듯 흥미로운 기색으로 보는 모습이 너무 얄미웠다.
이따 딱밤 한 대 갈겨야지, 못 참겠다.
휘-잉.
갑자기 백주 대낮에 어울리지 않는 소슬한 바람이 귓불을 스치고.
클로이가 칼날을 반쯤 세우고서 커터칼을 들고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검마 군.”
“클로이.”
저벅.
“앞으로 저만 바라보게 만들어 줄게요.”
“우리 대화로 풀어 볼까?”
꿈틀거리는 클로이의 한쪽 눈썹.
“저한테 연락도 안 해 주면서 무슨 대화를 하죠?”
“클로이, 나는 너랑 면대면으로 말을 주고받고 싶은 거였어. 핸드폰 같은 고철 덩어리로 소통하면 너무 정 없잖아, 우리 사이에. 안 그래?”
“…우리 사이?”
“그래, 우리 사이.”
나는 클로이의 겁박을 열심히 맞받아쳤다. 그러자 차츰 그녀의 혈색이 진정되어 가는 기미가 보인다.
저벅저벅.
클로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예상 못 했는지, 그녀는 순간 주춤하며 걸음을 내뺐다. 분홍색 커터 칼을 잡은 손가락이 미미하게 떨렸다.
이윽고 나는 클로이의 앞에 우뚝 섰다. 그녀는 눈만 살짝 올렸다.
‘여기서 말 한 번 잘못하면 칼빵이다.’
나는 티 나지 않게 호흡을 다듬었다. 태연한 태도로 복잡한 속내를 가려낸다. 사나이의 블러핑. ‘가오’를 내세울 차례였다.
두뇌를 재빠르게 굴려 너튜브로 봤던 얀데레 관련 영상들을 톺아본다.
수십 개의 영상 필름들이 기차처럼 줄지어 스쳐 지나갔다. 뇌에 부하가 갔는지, 코끝에 타는 냄새가 감돌았다.
“검마 군?”
그녀의 부름에 나는 한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 넣은 뒤, 다른 팔을 뻗어 클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클로이, 언제나 내 생각 해 줘서 고마워.”
“…에, 에?”
당황했는지 그녀의 잇새로 혀 깨문 앙증맞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탁한 막이 껴 있던 것 같은 안광에 총기가 깃들기 시작한다.
‘여기서 쐐기를 박는다.’
나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십 년 서비스업으로 다져진 말투에는 가식이 잔뜩 껴 있다.
어쩌면 이때를 위해서, 입매 근육을 단련해 왔을지도 모른다. 억지로 머금은 미소에 입매가 경련할 것 같았지만 참아 냈다.
“버팔로 던전 때도 그렇고, 나는 언제나 네게 의지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
“저, 정말요?”
나는 고개를 들어 끄덕였다. 클로이의 뺨에 홍조가 진하게 떠올랐다.
“당연하지.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헤에.”
코인지 입인지에서 나는 소리를 흘리는 클로이. 곧이어 그녀의 표정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후.”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클로이는 신이 난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사태가 진정되었음을 파악한 웨폰도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사키는 왜인지 입매만 비틀었다.
‘쟨 또 왜 저래.’
팽팽했던 긴장이 소강에 접어들자 초여름의 흥취가 다시 감돌았다.
나는 그제야 주머니에서 꽉 움켜쥔 칼자루에 힘을 풀었다.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 * *
다소 살벌했던 회동이 끝나고 웨폰과 사키는 각자의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기숙사동은 달랐지만 바로 옆이라 방향은 같았다.
“강검마, 걔…….”
걷던 웨폰이 중얼거렸다. 그가 강검마와 알고 지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이 벌어진 현장에는 여지없이 웨폰이 있었다.
그렇기에 웨폰은 강검마의 성정과 손속을 어느 정도는 가늠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부장은 점점 변하고 있다.’
스산한 위화감이 든다. 첫 조우 당시에는 쌀쌀한 인상의 동기 정도였는데, 요 근래 강검마의 눈빛엔 차가움이 짙게 서려 있었다. 날이 갈수록 침전되는 그의 분위기는 인간성이 마모되어 가는 것 같았다.
웨폰은 그 앞에선 그를 최대한 대범한 태도로 대하지만, 종종 등골이 차게 식는 것을 느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조금 전의 상황. 어느 순간부터 클로이는 일순간에 흉험한 살기를 내뿜었다. 추측건대, 그녀는 강검마와 연관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클로이가 강검마를 좋아하는 건, 길 가던 어린아이도 알 만큼 노골적이다. 그러나 강검마는 언제나 적정선을 유지하려는 듯이 애를 먹는다.
‘…삐뚤어진 사랑.’
웨폰은 혼자서 고개를 내저었다. 암살자 집안 출신의 그녀이니, 감정에 대한 상식이 많이 결여됐음은 당연하겠지. 일견 범인과 차이는 있으나, 클로이는 늘 강검마에게 헌신적이다.
‘근데 강검마 걔는…….’
웨폰의 전신에 옅은 소름이 끼쳤다.
강검마는 분위기가 일변한 클로이를 다독여 주었다. 언뜻 보면 상냥한 언행이었으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웨폰만은 똑똑이 보았다.
강검마는 주머니에 푹 찌른 손에 사시미를 쥐고 있었다. 자못 위급할 시엔 여지없이 칼부터 빼 들기 위함이었으리라.
‘부장은 회유와 폭력을 섞어 사용하는 거야.’
되도록이면 대화를 통한 설득과 회유를 지향하지만, 유사시에는 폭력의 공포를 이용할 줄 아는 인물.
일견 악인으로 비칠 수 있으나, 그것은 엄연히 군주로서의 자질이다. 그런데 부장은 열일곱의 나이에 그 자질을 갖춘 것 같았다.
‘분명 강검마는 크게 될 거다.’
동 나이대에선 적수가 없는 무력에 자비심과 냉혹함을 겸비했다. 지금이야 같이 밥도 먹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나누지만 추후에 강검마는 우러러볼 수 없는 인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웨폰의 깊은 곳에서 묘한 고양감이 솟아났다. 상념을 마친 웨폰은 고개를 돌렸다. 사키가 볼멘 표정으로 핸드폰 액정을 두드리고 있었다.
“너, 왜 그러냐?”
“내가 뭐?”
“아까부터 뾰로퉁한 표정이나 짓고 말이야.”
“남이사.”
웨폰이 묻자 무정하게 대꾸하는 사키. 아까보다 더 세게 딱밤을 쥐어박을까 하다 가까스로 억눌렀다.
웨폰이 여태 본 사키는 기본적으로 속내를 남에게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유별나게 강검마와 있을 때는 간간이 솔직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 저의가 무엇인지 웨폰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서 질문을 바꿔 물었다.
“…됐고, 핸드폰으로 뭐 하고 있어? 알고 보니 필기시험 답이 다른가 해서 서칭하고 그런 거 아니야?”
“너, 아까부터 자꾸 쓸데없는 말 할래?!”
장난기 섞인 말투에 사키는 미간을 좁히며 차갑게 노려본다. 흠칫한 웨폰은 먼 산을 바라보며 실없는 휘파람을 흘렸다. 그녀는 시선을 도로 핸드폰에 고정한 채 한마디 툭 내뱉었다.
“전에 내가 너튜브에 업로드했던 영상들 좀 지우고 있어.”
“뭐야, 너 너튜브도 했었냐?”
“전문적으로 한 건 아니고, 심심해서 잡학 지식 같은 거 정리해서 올려 놨던 거야.”
“야, 너는 맨날 늘어지게 잠만 자면서 이것저것 성실하다? 그럼 조회 수는 어느 정돈데.”
사키는 귀찮다는 듯이, 핸드폰을 웨폰 쪽으로 돌렸다.
곧이어 웨폰의 망막엔 사키가 업로드했던 영상들과 조회 수가 떠올랐다. 영상들은 평균 조회 수가 50만에 육박했다.
“됐지?”
휙, 핸드폰을 갈무리하는 사키. 웨폰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가 지우고 있던 영상 제목을 중얼거렸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버블 경제의 위험성, 얀데레 조우 시 행동 요령…….”
알기 힘든 내용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