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55)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55화(55/300)
아카데미의 연무장은 아발론 섬으로 향하는 생도들로 꽉 차, 뻑뻑한 흙먼지가 일었다.
“하암.”
나는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한 후 대충 아무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피곤하다.’
요 이틀 동안 방과 후에 도서관에 들러, 신화나 전설에 관한 서적과 개론서들을 들척거리다 보니 금세 수요일이 도래했다.
조바심 갖지 않겠다 다짐한 것과 달리, 몸이 급하게 움직였다. 원래 몸이 바쁘면 속이 게워지는 법이다.
그렇게 잠시 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자, 교관들이 각자 도맡은 클래스 생도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에 나도 벽에서 등을 떼고 가려던 찰나, 노건한 음성이 나를 불러세웠다.
“생도 강검마.”
“어, 검제님.”
초록색 기능성 운동복을 입은 검제. 진중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등 가방에는 각종 낚싯대가 빼꼼 모습을 보인다. 낚시가 취미였어?
“요새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더군.”
“아, 네, 뭐…….”
나는 멋쩍게 뺨을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검제는 간혹 내가 혼자 운동하고 있을 때면 먼발치에서 나를 관망했다.
교육자로서 생도를 살피는 건 옳은 일이나, 그 정도가 퍽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뭐만 하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것도.
검제는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활짝 핀 미소를 지었다.
“뛰어난 재능에 노력이 쌓이면 그 성과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절이 되는 것일세. 그래도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몸이 버틸 수 있는 법이니, 이번 훈련에서는 모쪼록 푹 즐기게.”
“…감사합니다. 검제님도 대어 낚으시길.”
“아, 이거 말이군, 고맙네. 하여튼 그럼 나는 이만 감세. 험험.”
검제는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흘리고서 급히 자리를 피했다. 와중에 뒤통수에 느껴지는 찌릿한 시선.
고개를 슬며시 뒤로 돌리자, 아벨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향한 할아버지의 노골적인 관심이 기껍지 않은 모양이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새침한 표정으로 휙, 고개를 틀었다. 그에 나는 실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걱정 마라, 너는 곧 남자친구 생길 테니.”
나는 옅게 웃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클래스별로 도열을 맞춰 선 생도들. 한껏 들뜬 생도들도 보이고, 야외 활동이 썩 내키지 않는지 난색을 드러내는 생도들도 보인다.
허리춤에는 훈련용 무장을, 등허리에는 각자 구비품으로 채워진 배낭들이 메여 있었다.
비록 아발론 섬이 마수 출몰 구역은 아니나, 안일함을 방지코자 훈련용 무장이라도 챙기라는 학원장의 지침이 있었다.
나도 무라사메는 기숙사에 고이 모셔 놨지만, 불의의 상황을 대비해 다이쏘 사시미를 한 움큼 챙겼기에, 아쉬운 마음을 털 수 있었다.
어젯밤 메디아에게서 ‘상비약은 챙겼어? 옷가지는? 속옷은 최소 세 벌 이상 챙겨 가야 해! 때 잘 안 타게 검은색으로!’라는 문자들이 왔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흡사 어디 여행 가기 전 챙겨 주시던 어머니 같았다.
아, 생각해 보니 학원장 메디아가 내 어머니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지. 이십 대 아가씨 같은 겉모습 때문에 종종 그녀의 나이를 망각하곤 한다.
‘…근데 굳이 팬티색까지 정해 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작게 도리질하고서 시선을 돌려 전방을 슥 둘러보았다. 바글거리는 인파 사이로 교관들이 손에 들린 명부로 한 명 한 명 얼굴을 대조해 가며 점검 중이었다.
하여, 오히려 나는 교관들의 면면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클래스마다 배정된 교관들이 일동 집결하는 건 예삿일은 아니었기에, 때마침 예의 검문소 직원이 말했던 인상착의 여교관을 찾아볼 심산이었다.
의중은 모르겠다만, 그자가 나를 노린다면 이번 무인도 생존 훈련이 적기일 것이다.
지형지물이 수시로 바뀌는 섬의 신비성을 이용한다면 뒤처리도 편리할 터다.
물론 그건 내 입장에서도 반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상대가 친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처리하고 시체를 용이하게 유기할 수 있을 테니까.
사람한테 칼 쓰는 게 아직도 껄끄럽긴 하다만, 내 목이 오가는 판국에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보라색 머리에 키 큰 여자. 몸매가 좋음.’
지구 기준으로는 강남역에서도 단박에 찾을 수 없는 모습일 텐데, 자색 머리칼만 해도 대여섯 명에, 뭘 먹고 그리 발육이 좋은지 여교관 일동의 몸매는 전원 발군이었다.
“이걸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면면을 살필수록 망막에 빠르게 번져 가는 형형색색의 머리칼들. 어렸을 때 얼핏 본 매직아이를 볼 때처럼 현기증이 몰려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나는 미간을 짚은 채 살살 마사지한 뒤, 눈에 쌓인 피로를 덜기 위해 턱을 살짝 들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자 누군가 옆에 조용히 다가와 검지로 옆구리를 쿡쿡 찌르려 한다. 내게 이런 장난을 칠 사람, 안 봐도 누군지 뻔했다.
나는 내 옆구리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는 고운 손가락을 낚아채고서 상대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딱―!
경쾌한 탁음과 함께, 악! 하는 짧은 신음을 내뱉는 사키 료조. 그녀는 두 손으로 이마를 싸매며 가자미눈으로 나를 째려본다.
“야! 심심해서 장난 좀 치려는 거 가지고 사람을 때리고 그래?!”
그녀는 혼자서 작게 투덜거렸다. 내가 낮게 웃자 혀를 삐죽 반쯤 빼물고, 잰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키 료조, 쟤는 진짜 캐릭터를 모르겠네.”
아마 이 세상에서 만난 인물 중 첫인상과 가장 괴리가 있는 사람이 그녀지 않을까 싶다.
만사 귀찮다는 듯 드러누워 잠만 자던 모습은 없고, 이젠 내 주변을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귀찮아서 반응해 주지 않으면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사라졌다가 다시금 눈에 띄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발랄하고, 안 좋게 말하면 정신 사나웠다. 양갓집 규수 같은 단정한 외모가 무색하게 길고양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료조.
어떤 부분에 내게 흥미가 동하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공기화되는 캐릭터긴 해도 그녀는 엄연히 메인 히로인 중 한 명이었기에 필요 이상으로 친밀감을 쌓고 싶진 않았다.
“…이번만큼은 되도록이면 조용히 넘어가고 싶은데.”
조용히 아발론 섬에서 찾고자 하는 가호만 찾고, 불시에 일이 생겨도 혼자서 해결을 볼 참이다.
그렇게 교관들이 생도 체크를 마치자.
[곧 아발론 섬으로 향하는 아공간 게이트가 가동됩니다.] [안전에 유의하여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영민한 기계음이 귓가에 스미더니 새파란 하늘에 보랏빛 장막이 돔처럼 드리웠다.
[영웅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 *
“와.”
아발론 섬에 도착하자마자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초여름의 흥취를 잔향처럼 흘리는 난생 본 적 없는 형태의 수목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대양에 의해 지면에 낮게 깔린 물안개는 섬의 신비함을 가중시킨다.
“신성한 땅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네.”
하지만 무엇보다, 섬 중앙에서부터 파라솔처럼 크게 솟아 있는 거대한 나무가 절경이었다.
시작의 사과나무, 위그드라실(Yggdrasil).
기원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신화시대에 신들이 심었다는 거목.
섬 중앙에 있는 ‘미미르의 호수’를 양분 삼아 몇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굳건히 같은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는 신성한 나무.
빛이 감도는 잎사귀들은 해의 빛을 가릴 정도로 선명하게 순금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단풍처럼 물든 게 아닌, 등대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개를 한참을 젖혀도 꼭대기가 안 보이는 것이, 거의 그 높이가 호아킨 아카데미의 본관과 비교될 정도다.
이 세상에 떨어진 지 어언 1년이 훌쩍 넘어 판타지스러움엔 내심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풍경에 나는 두 눈만 깜빡거리며 쳐다보았다.
보고 있자니 그 신성함에 넋 잃고 매료될 것 같았다. 나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연이어 머리를 세게 흔들어 정신을 바로잡았다.
“관광은 할 것부터 한 후에 하자.”
나는 일단 들춰 메고 있던 등 가방을 풀어, 짐 상태를 확인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주말 이틀 동안 아발론 섬 관련 서적들을 탐독해 만든 약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가져온 다이쏘 사시미 묶음과 옷가지들.
그러나 그 틈바구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것이 있으니. 어제 학내 마트 등산 코너에서 사 놓은 ‘마체테’가 그것이었다.
「생존」이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이번 무인도 생존 훈련에서 식량은 섬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
비단 생존뿐만이 아니라, ‘오브 찾기’라는 경쟁 요소도 있었지만 내겐 어디까지나 차선이었다.
“뭐든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
사실 하루 정도야 주린 배로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2박 3일 동안 ‘가호’를 찾기 위해 섬 전체를 들쑤실 예정인 나로선, 무엇보다 식량 수급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런 오지에서 가장 효과적인 식량 확보 수단은 당연하게도 수렵과 채집이다.
다만, 그렇다고 맨손으로 사냥할 수도 나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갈 순 없는 노릇이니 비싼 돈을 들여 하나 장만했다.
영화 등지에서 마체테는 사람 죽이는 용도로 쓰이는 흉기로 묘사되지만, 그 본 용도는 벌초 및 벌채할 때 사용하는 도구란다.
하기야, 회칼인 사시미도 언제부터인가 깡패들이 칼부림할 때 쓰는 칼로 통용되니, 원……. 세상 어디든 날붙이라면 흉기로 써재끼는 놈들이 문제다.
“…나는 빼고.”
게다가 ‘검신의 가호’에서 벗어난 규격 덕에 고통 부담 없이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사시미는 유사시에만 쓰자.’
무통의 가호 발효 시간은 10초 늘어 이제는 50초. 어떤 변수가 닥쳐올지 모르는 판인데, 무절제하게 사시미를 쓸 수는 없으니까.
“흐음.”
문득 나는 마체테를 꺼내 칼자루를 비스듬히 잡고 손끝으로 날을 쓸어보았다.
뾰족한 사시미만 써 와서 그런지 낭창낭창한 칼날과 뭉툭한 칼끝. 벌채에 주로 쓰이는 나이프답게 잡는 맛이 단단했다.
칼이라기보다는 유사 도끼 같은 만듦새. 때마침 장작도 패야 하는데 실용성을 따지면 이만한 도구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마체테를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도 보고, 팔을 움직여 휘둘러도 보자 붕, 붕 하는 우악스러운 파공음이 났다.
사시미가 손에 원체 익어서 그런가 까끌까끌한 새 옷을 입은 듯한 낯선 감각처럼 느껴졌다. 길게 썰리는 공기 소리도 생경하고 뭐랄까 본능이 석연치 않아 하는 느낌?
다만, 별다른 선택지도 없었기에 나는 마체테를 제외한 나머지 짐들은 가방에 쓸어 넣고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사냥부터 해 보자.”
나는 도서관에서 탐독했던 서적 중 ‘일타강사 베어 갈릭스의 생존법’을 떠올리며 나를 맞이하는 울창한 수목림을 향해 나아갔다.
운이 좋으면 한 시간 내에 작은 짐승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 * *
한 시간가량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던 중.
사사사사삭―
풀더미 하나가 흔들리더니,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근데 특이점이 뭘 처먹고 컸는지, 덩치가 거의 멧돼지만 했다.
녀석은 사람이 신기한지 머리를 갸웃거리며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생긴 건 마수처럼 생겼는데 흉포하진 않은 걸 보니, 그냥 잘 먹고 살이 토실토실 오른 토끼였다. 그리고 지금은 내 점심이다.
저 녀석 사냥에 성공한다면 적어도 이 훈련 기간 동안 식량 수급 문제로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죽은 벗겨 무두질을 가해 모포로 삼으면 제격일 것이고, 먹고 남은 고기는 반건조시켜 육포를 만들면 되겠지.
순식간에 척척 정리되는 훈련 기간의 식량 계획. 이번에는 모처럼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후우.”
나는 숨을 길게 늘어뜨리며 마체테의 칼자루를 단단히 꼬나 쥐었다.
칼을 쥐었지만 사시미를 쓰지 않아서 격통에서 자유로운 생경한 감각.
입꼬리가 설핏 올라가더니 임전을 결의한 전사와도 같은 불티가 눈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다.
내가 걸음을 살살 내딛자 고개를 좀 더 옆으로 꺾는 토끼.
석류 씨알 같은 붉은 눈알은 클로이를 연상시켰다. 어째서인지 손아귀에 가일층 힘이 실렸다.
“삐약?”
그러다 이내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이 눈에 들어왔는지, 굉음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다.
“……!”
눈앞에서 쾌속으로 거리를 벌리는 토끼. 어찌나 빠른지 녀석과 내 간극은 순식간에 50M 정도로 벌어졌다. 나도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다급하게 녀석을 쫓았다.
그렇게 십 분쯤을 녀석의 뒤꽁무니를 쫓아 전력을 다해 달음박질했더니, 심박이 엇박자로 뛰었다.
“하아, 하아…….”
그동안 체력 훈련을 꾸준히 겸해 와서 지구력은 자신 있었는데, 네발 달린 짐승을 쫓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다.
녀석은 도망치는 와중에도 머리만 돌려 중간마다 내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가다듬다가 곧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마인이랑 카우 킹도 썰었는데, 토끼 상대로 쩔쩔매는 꼬라지 하고는…….”
검신의 가호 없이는 한낱 토끼 한 마리 좇다가 지쳐 버리는 게 내 현주소였다.
그래도 10분가량을 무호흡으로 뛰다시피 했으니, 전생에 비하면 초인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조 섞인 말을 중얼거리고서 정면을 응시했다. 토끼는 동글동글한 빨간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존나 빠르네. 살려 줄게, 가라.”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뒤를 돌아 엉덩이를 내보이는 게 아닌가.
“삐약, 삐약, 삐약.”
그리고는 몽실몽실한 엉덩이를 보란 듯이 씰룩거리기 시작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었지만, 저것이 명명백백한 조롱의 의미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한참을 승자의 세리머니를 선보이는 토끼.
나는 관자놀이가 한 차례 꿀렁이는 걸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