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5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56화(56/300)
나는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 내고서 곁눈질로 토끼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
귀찮아서 살려 줄까 했는데 홧김에 사시미를 들고 단숨에 쫓아 멱을 따 버렸다. 사실상 자신의 명을 단축한 것이기에 별 감흥은 없었다.
나는 사시미를 도로 집어넣은 후, 마체테를 빼 들어 토끼의 가죽을 살에서 떼어 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생선만 발라 봤지 야생 동물을 발라 본 건 처음이었으나, 생각보다 매끄럽게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대충 발골 작업을 마친 뒤, 나는 그대로 건초와 장작을 모아 와 챙겨 온 성냥으로 불을 지폈다.
이어서 발라낸 고기들을 불 위에 올리고서 나무둥치에 가죽을 펴 무두질을 시작했다.
어설픈 가공 과정에 구멍이 숭숭 뚫리긴 했어도, 덩치가 원체 컸던 놈인지라 손상된 부분을 제해도 모포용으로는 충분했다.
뽑아낸 피는 멀찍한 곳에 뿌려, 육식 동물들의 이목을 분산시켰고 나머지 것들은 땅에 파묻어 냄새를 차단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뭐지, 나 왜 잘하는 거지?”
아무리 생존 서적으로 예습했다곤 해도 이토록 내 생활력이 강했을 줄이야.
어쩌면 아카데미보다 야생의 삶이 내게 더 잘 맞는 걸 수도……. 새롭게 발견한 또 다른 내 모습에 나는 낮게 소리 내어 웃으며 생각했다.
‘나중에 여유 될 때 부원들이랑 캠핑 같은 거 가면 재밌겠네.’
그래도 이곳에서의 최우선 목적이 주객전도되면 안 될 일이다. 남은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일은 그려 둔 약도에 기반해 섬을 바짝 돌아다닐 참이다.
“…그 가호만큼은 꼭 찾고 돌아가고 싶은데.”
치이익.
와중에 노릇노릇 익어 가는 고기. 탄 부분을 적당히 도려내고 이리저리 불길 위에서 굴렸다.
잠시 불멍을 때리다가 고개를 치켜들자, 새파랬던 하늘 역시도 노랗게 익어 가고 있었다.
노을과 더불어 무르익는 위그드라실. 섬을 품는 듯한 한없이 자애로운 위용.
현실 감각을 아득한 곳으로 날려 버리는 황홀경은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게끔 한다.
계속 보고 있자니 혼이라도 뺏길 것 같아서, 도로 고개를 떨구어 모닥불 쪽을 보았다.
고기 표면에 맺힌 지방이 장작에 떨어질 때면 파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훈연이 피어올랐다. 싹 도는 군침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생각해 보니 섬에 떨어지고 나서 아무도 본 적 없네.’
얼핏 기억나기로, 아발론 섬의 면적은 지구의 제주도와 비슷한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섬의 지형지물.
그리 생각하면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한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영민한 감응력을 곤두세워 상시 사위를 훑어야 한다. 그간의 경험들에 비추어 본다면 변수란 전조 없이 찾아오는 것이니.
언제라도 이상한 기류가 감지될 경우를 대비해 품속에는 사시미 두 자루가 고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주워 온 건초를 더해 가며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쑤셔 댔다. 야생 동물은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해 바싹 익혀 먹으라 했으니까.
빨리 익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고기를 푹푹 찌르고 있던 그때.
사사사삭―
귓가에 닿는 무언가에 수풀이 쓸리는 소리. 바로 옆이라 할 정도의 근거리는 아니었으나 날카로운 감응력은 빠르게 그 존재를 잡아냈다.
내 고개가 그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부지깽이와 마체테는 살포시 내려놓고서 품속에서 사시미를 꺼내 쥐었다. 여차하면 즉시 검집을 벗겨 낼 심산으로.
‘짐승의 기운이 아니다.’
사사사삭―
좀 더 가까워진 미확인 물체. 사시미는 손목만 살짝 털면 금방이라도 새파란 검명을 흩날릴 준비를 끝마쳤다.
내가 바투 다가가자 수풀이 크게 흔들리더니 불쑥 인영(人影) 하나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사시미의 검집이 미끄러지려는 찰나.
상대와 시선이 맞닿음과 동시에 꿈틀거리던 손목이 일순 멈추었다.
“뭐냐, 너…….”
물에 흠뻑 젖은 아벨이 홍조를 띤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입을 떼려던 때에.
꼬르륵―
아벨의 배에서 세찬 뱃고동이 울렸다.
* * *
하늘을 노랗게 익혔던 태양도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갈 무렵, 모닥불을 앞에 두고 강검마와 아벨이 앉아 있다.
“…….”
낮게 드리우는 적막. 두 남녀는 누가 먼저 운을 떼지 않고, 서로 어색하게 타오르는 불만 쳐다보고 있다.
한숨을 짧게 내쉰 강검마는, 불쏘시개로 쓰이는 잔가지로 고기를 뒤적거렸다. 코끝에 맴도는 고소한 냄새 아니, 향기에 ̄
꼬르륵―!
맹렬한 뱃고동이 연거푸 울려 퍼졌다. 이어 곧장 토마토처럼 익어 버리는 아벨의 뺨.
정수리까지 치솟는 낯부끄러움에 그녀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미쳤어, 미쳤어!’
아발론 섬에 도착한 직후, 2박 3일 훈련쯤이야 별일 아닐 거라 치부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웠다.
안일한 마음가짐만 아니었어도 상황이 이렇게 치닫지는 않았을 텐데…….
막연하게 자신감으로 부풀었던 가슴도 잠시, 생존의 가장 기초인 식량 수급에서부터 난항을 겪었다.
대충 눈에 띄는 들짐승을 사냥해 때우려 했지만, 생명의 호수라 불리는 ‘미미르의 샘’의 양분을 듬뿍 머금은, 초목을 따 먹고 자란 짐승들은…….
설령 토끼라 해도 그 몸체가 우악스럽게 컸고, 발은 눈으로도 간신히 쫓을 만큼 잽쌌다.
심지어는 가호까지 발현해 가며 토끼 한 마리를 쫓았으나, 녀석은 귀를 씰룩거리며 유유히 아벨을 따돌렸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려지면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조롱은 덤이었다.
그렇게 산을 뛰어다니길 몇 시간, 산등성이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계속 뛰어다닌 탓에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산의 어둠은 위험하다. 짙게 깔린 어둠은 방향감을 상실시킨다. 게다가 이곳, 아발론 섬은 수시로 지형이 바뀌어 대기에 특히나.
하는 수 없이 첫날은 주린 배로 넘길 심산이었으나, 곧 발을 헛디뎌 갑자기 생겨난 냇물에 굴러떨어졌다.
주위를 부지런히 살폈으나 때마침 바뀐 미로 같은 지형에 한순간에 발이 미끄러진 것이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삐끗한 발목에서 아린 통증이 느껴졌다.
“일단 오늘 밤을 넘길 야영지부터 찾아야 해.”
젖은 몸으로 으슥한 숲길을 걸으며 걷던 와중에, 그녀는 누군가 모닥불을 쬐는 걸 발견했다. 따뜻한 바람을 타고 솔솔 풍겨 오는 고소한 냄새.
아발론 섬은 무인도다, 그러니 필시 저 사람은 아카데미의 사람일 터. 자신의 행색은 악재가 겹쳐 추레했으나, 주린 배는 순간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였다.
그럼에도 니벨룽가(家)의 적통인 그녀였기에, 최대한 격조를 차리며 모닥불을 향해 지친 몸을 이끌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고기 냄새를 음미하며.
한 50M 정도 다가갔을 무렵, 그자가 누군지 확인한 아벨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저건……?’
강검마였다. 그의 앞의 장작불 위로는 큼지막한 고깃덩이가 노릇하게 익어 가고 있었고, 강검마는 털가죽을 어깨에 걸친 채로 불가에 앉아 조용한 눈으로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벨의 마비됐던 이성이 돌아오고, 일순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나는 여기서마저도 강검마, 쟤한테 졌구나.’
그는 사소한 부분에서도 늘 자신 머리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듯이 앞서 나간다.
얼마 전까지 강검마를 향해 활활 타오르던 투지조차 이제 생명을 다한 장작처럼 사그라들었다. 이내 아벨은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내저으며 쓰게 읊조렸다.
“…그냥 가자.”
그렇게 자리를 피하려 했을 때, 기척을 느낀 강검마가 양손에 사시미를 움켜쥐고 그녀에게 다가왔고.
당황한 아벨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풀썩 주저앉았다. 원래라면 날래게 도망쳤겠지만, 삐끗한 발목이 발을 잡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이 모닥불을 앞에 두고 말없이 앉아 있는, 지금 이 상황이었다.
아벨을 힐끔 쳐다보는 강검마. 그녀는 눈동자를 굴려 가며 시선을 피했다.
안 그래도 피하고 싶던 상대인데, 그 앞에서 적나라하게 뱃고동을 울려 대고 있자니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심경이다.
다만 그러기엔 상황도 상당히 뻘쭘하고, 다친 발목과 허기 때문에 젖은 솜뭉치처럼 발이 무거웠다.
이어서 불현듯 아벨의 몸이 떨려 왔다. 쌀쌀한 밤바람의 냉기가 젖은 옷을 휘감아 몸의 열기가 빠르게 식어 갔다. 입술은 서서히 분홍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강검마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더니 자신이 걸치고 있던 털가죽을 벗어 들이밀었다.
“이거 덮어라.”
“…어?”
아벨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강검마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봤다. 그는 털가죽을 잡은 손목을 까딱거리며 재차 권했고, 아벨은 못 이기는 척 받아 들었다.
‘따뜻해.’
털가죽에는 아직 강검마의 잔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뒤이어 그는 갑작스레 아벨의 신발을 벗겼다. 아벨의 얼굴에 홍조와 함께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어, 어?!”
“발목 이대로 놔두면 여기 있는 동안 곪아.”
강검마는 판자 하나를 쪼개 부목으로 대어 발목을 고정한 뒤, 챙겨 온 옷 한 벌을 쭉쭉 찢어 동여맸다.
그는 튼튼하게 조여진 걸 확인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눈매가 동글동글해진 아벨은 격동하는 심장을 억누르며 입을 움직였다.
“…고마워.”
강검마는 어깨를 들썩여 소리 없는 대꾸를 하고는 도로 시선을 고기에 고정했다. 아벨은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리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살랑살랑한 이 기분에 입술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일평생 검만을 잡아 온 그녀에게는 너무나 낯선 감정이었다.
아벨을 말하는 것을 대신해 모닥불에 빛무리 진 강검마의 모습을 바라봤다. 먼젓번보다 날렵해진 얼굴선과 인상.
새카만 눈동자는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가 깃들어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든다. 그간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의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순간, 그와 시선이 겹쳐졌다. 아벨이 당황한 기색으로 말을 더듬거리던 찰나, 강검마가 한 움큼 뜯어낸 고기를 내밀었다.
“다 익었다.”
노릇하게 잘 익은 고기. 강검마의 시선을 느낀 아벨은 얼떨결에 고기를 건네받았다.
계속되는 호의에 조심스레 강검마의 눈치를 살피는 아벨. 강검마는 다 익은 고기들을 뼈에서 발라내며 말했다.
“따뜻할 때 먹어. 어차피 혼자 먹기엔 양이 많아.”
“…응.”
아벨은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고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와, 이거 뭐야.”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리는 아벨.
표면을 절묘하게 코팅한 기름, 짭조름한 데다 들짐승의 풋내라고는 손톱만큼도 나지 않는다.
시장이 최고의 반찬이라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서도 어마어마한 맛이었다. 그러자 여태껏 표정에 변화가 없던 강검마가 설핏 웃으며 말을 뗐다.
“들짐승은 잡내가 많이 나서, 그냥 구워 먹으면 역해서 못 먹어. 그래도 운 좋게 옆에 월계수가 있어서 잎으로 고기를 한번 싸서 잡내를 빼냈다. 마무리로 근처 바위에서 채취한 암염으로 간을 맞췄고.”
강검마는 눈을 반짝거리며 조리 과정을 설명했다. 한참을 말을 잇던 강검마는 이내 민망했는지 턱을 긁적거렸다.
한참을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벨의 입가에 왠지 모를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화답하듯 한입 더 크게 베어 물고선 입술을 오물거렸다.
“맛있어.”
강검마가 웃었다.
“많이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