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5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57화(57/300)
아발론 섬의 아침은 일찍 찾아왔다. 푸르스름한 색감이 진한 어스름한 새벽녘.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댓바람의 찬 공기가 폐부 안으로 들어오며 정신을 차렸다.
나는 몸을 쭉쭉 늘리며 중얼거렸다.
“오늘 안에는 찾았으면 좋겠는데.”
재생(再生)의 가호.
내가 이 섬에서 꼭 찾고자 하는 가호의 이름이다.
등급은 정령급 가호인 예의 ‘전이의 가호’보다는 한 단계 낮은 수호령급 가호. 급은 한 단계 낮지만, 단독 성능 자체는 전이의 가호 이상이라 평가받던 가호였다.
발현 시 효과는 이름 그대로 육체 손상 및 자상을 빠르게 수복시켜 주는 가호이다. 다만, 팔다리가 잘리는 등의 중상까지 재생시켜 주지는 못한다.
“…그 정도면 거의 마법 수준일 테니.”
말만 들으면 그 수가 극히 드문 치유 및 버프 계열 가호 같겠지만, 실상은 신체 세포 자생력을 삽시간에 증폭시키는 강화 계열 가호다.
거기에 버프 계열 가호와 다른 점은 효과 대상이 시전자 본인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그 활용성은 딱 도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성능일터.
‘하지만.’
전이의 가호의 보유자인 내게는 그 성능의 범용성이 긴요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두 가호를 동시 발현한다면 간단한 타인 치유 정도도 가능할 것이며, 더 나아가 부러지기 십상인 내 무장도 임시방편이나마 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수호령급 가호인 만큼 그 한계선은 명확하겠다만, 당장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도 아니니까. 적어도 사령급인 무통의 가호보다는 낫겠지.
게다가 이 가호는 일종의 히든 피스로 취급되기에 레온의 성장에 제동을 걸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그 자식은 일신의 잠재력이 일반인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라, 나중에 가서는 웬만한 부상은 웃어넘기는 수준으로 성장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난 그 자식에겐 없는 플레이 경험이 있잖아.’
나는 자기 전 잔가지에 꿰어 둔 육포를 씹으며 세워 둔 계획을 되새겼다.
재생의 가호가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려면, 어떤 문양이 그려진 바위를 찾아내야 한다.
위치는 얼추 위그드라실 근방으로 한정 지은 상태고, 발걸음만 재촉한다면 오후 내로 그 근처까지는 도착할 수 있겠지.
적어도 내일까지는 성과를 봐야 했기에 졸음을 쫓아내고 서둘러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 그려 뒀던 약도를 살핀 뒤, 고개를 돌려 슬쩍 옆을 바라봤다.
모닥불 건너편에선 아벨이 털가죽을 이불 삼아 아기 새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어제 그녀는 저녁을 먹은 직후, 긴장이 풀렸는지 금세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피로가 짙게 깔린 듯한 그녀의 몰골을 보건대, 나름대로 다사다난했던 모양.
그래서인지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딱히 없었다, 달리 할 말이 없기도 했고. 그래도 입을 달싹거리는 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내가 사전에 차단했다.
모닥불을 앞에 두고서 도란도란 떠들 만한 사이도 아닐뿐더러, 필요 이상의 유대감 형성은 지양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째 쟤는 나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고.’
하기야, 그녀가 속을 터 놓고 말했던 넋두리를 다 들은 당사자인데, 마냥 편하게 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애초에 아벨의 캐릭터는 차갑고 도도한 아가씨 속성이니까.
나는 잠시 곤히 자는 아벨을 지켜봤다.
뺨에 흘러내린 반짝거리는 머리칼, 고아하게 내려앉은 긴 속눈썹. 자는 모습마저도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 사람을 홀리는 듯한 비현실적인 미모였다.
‘예쁘긴 해.’
사실 어젯밤 아벨과 뜬금없이 마주친 후, 이것저것 호의를 베풀긴 했다.
물론 그녀에게 연심을 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초라한 몰골을 보니 매몰차게 뿌리치진 못하겠더라고.
주린 배를 감싸며 낯 뜨겁게 부끄러워하던 거나, 어디서 다쳐 왔는지 절뚝거리는 발목.
제아무리 작중 메인 히로인인 아벨과 접촉을 피하고 싶다고 한들, 사람 된 도리로서 그런 상태를 못 본 척 넘어갈 순 없는 일이다.
뭐, 선의 한 번 베풀었다고 천지가 개벽하는 것도 아니고. 정사가 조금 비틀릴 순 있겠다 만, 지금까지에 비하면 크게 틀어지진 않겠지.
일방적인 은원보다는 인간 된 도리를 우선하는 것. 앞으로 변수가 창궐할지라도 어쩌면 그것이 내가 관철해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상으론 아벨은 오늘 안에 레온과 감정을 싹틔울 터다.
“…….”
그러자 뒤늦게 몰려오는 허탈한 기분. 이른바 현자 타임이란 것이었다.
“에휴.”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개인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난 섬의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찌르르, 울려 퍼지는 새소리가 섬의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 * *
“우우, 음…….”
산새들이 우는 소리에 아벨의 눈꺼풀이 천천히 뜨였다.
그녀는 눈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졸음을 떨치려 상체를 세웠다. 그러고는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강검마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잠시 자리를 비웠나 싶었으나 무언가 허전한 기분.
순간 아벨은 벌떡 박차고 일어나 사위를 좀 더 자세히 훑어보았다. 말끔히 사라진 그의 짐. 자신이 자는 동안에 먼저 떠난 듯 보였다.
모르는 새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에 허탈함이 일었다.
“…뭐야, 말도 없이 사라진 거야?”
아벨의 눈매가 곱게 휘더니, 뾰로통한 표정으로 다시 풀썩 앉았다.
와중에 보기 좋게 놓여 있는 육포 조각들. 아마 강검마가 떠나기 전, 챙겨 먹으라 내버려 둔 것이리라. 그걸 보자 가늘게 좁혀졌던 아벨의 눈매가 동글동글해졌다.
동시에 발갛게 열이 오르는 얼굴. 여러 가지가 혼재되었던 감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누그러졌다.
곧이어 눈가에 스미는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렀다.
“어?”
순간 당황한 아벨이 급하게 옷소매로 그것을 훔쳤다. 한참을 닦아 내고 나서야 가슴이 진정됐다.
갑작스럽게 흐른 눈물. 그녀 본인조차도 그 이유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작은 흐느낌과 교차하는 고운 속눈썹이 떨렸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다는 것은 아벨에게 있어 생경한 일이었다. 일평생 어떠한 일들이 닥쳐 와도 늘 홀로 타파해 왔다.
큰 벽에 다다랐을지라도 끝끝내 이겨 내고야 마는 그녀였다. 그것이 니벨룽의 이름을 잇는 자의 업이었으니까.
그 중압감에 몸이 짓눌지라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로 가녀린 어깨로 버텨 내 왔다.
어리광은 사치다. 그 말을 되뇌며 굳건히 버텨 왔는데, 아벨은 울지 않으려 맹맹한 코를 훌쩍였다.
“검마, 너는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홀로 남은 곳에서 가만히 앉아 아벨은 두 다리를 가슴에 끌어모았다.
자신에게 이유 없는 선의를 베풀어 준 상대를 여태껏 시기하고 질투해 왔다는 것이 가슴을 깊게 후볐다.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뜨거우면서 표표한 기분이 전신을 훑었다.
한참을 침울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아벨의 시선을 살짝 내렸다.
부목으로 고정된 오른 발목. 능숙한 조치 덕인지 풀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처음 강검마가 신발을 벗겨 줬을 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괜스레 발목을 매만졌다. 단단히 동여진 옷가지의 매듭.
남은 이틀을 생각했을 때, 족쇄처럼 운신에 제한이 있을 터인 부목이지만, 어째서인지 풀고 싶지 않았다.
아벨은 잠시 동안 고민하고는, 옆에 눕힌 검을 들었다.
“그래도 아직 이틀 남았잖아.”
그녀는 잠깐의 말미를 두고는 차분히 매듭을 잘라냈다.
사―락
일 합에 깔끔하게 벗겨지는 천 조각.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와 그가 건넨 털 모포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러모아 챙겼다.
“…돌려주긴 해야겠지?”
그리 말하는 아벨의 입가에 기분 좋은 호선이 그려졌다. 이어서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꼿꼿이 세워도 보고 오른발 끝을 탁탁, 지면에 부딪혀도 본다. 컨디션은 만전이었다.
아벨은 손날을 펴 눈썹 위를 가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에 물든 아벨의 눈동자가 옅은 순금 빛으로 반짝거리고, 섬의 실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그녀는 쭉 스트레칭을 한 뒤, 살포시 발을 떼 봤다.
풀을 밟는 발이 전보다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 * *
그려 두었던 약도를 따라서 한참을 숲길을 이동했다.
솔직히 대충 그려 둔 지도만 봐서는 가호의 위치를 특정 짓기 어렵다.
그렇기에 나는 약도는 그저 참고용으로만 두고, 갈림길이 나타날 때면 직감을 믿고 몸 방향을 꺾었다.
섬의 지리는 변화무쌍하게 바뀌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걷다 보니 나름의 규칙성이 보였다.
마냥 변덕스럽다기보다는 섬 자체가 하나의 생명처럼 태동하는 것 같았다.
“후, 근데 진짜 더럽게 덥네.”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짭조름한 공기가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질척한 흙바닥을 발자국이 움푹움푹 파고 들어갔다.
그렇게 등선을 타고 몇 시간을 걸었다.
“하, 더는 못 가겠다.”
나는 그늘이 진 큰 바위 하나에 걸터앉은 채로, 갑갑하게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윗옷 밑단으로 땀을 닦아 내고서 어제 말려 두었던 육포 조각을 꺼내 씹어 먹었다.
습한 해풍에 저며져 꿉꿉한 맛이 없잖아 있었지만, 가볍게 한 끼를 때우기에는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오늘내일 빨빨 돌아다녀야 하는데, 배는 든든하게 채워야지.
나는 질긴 육포를 씹는 김에 목표도 되새김질했다.
“그래도 가호를 찾는 김에 오브도 몇 개 가져가고 싶은데.”
기본적으로 휴양을 목적에 둔 무인도 생존 훈련이지만, 피 끓는 청춘들을 자극할 경쟁 요소로 아카데미는 섬 곳곳에 오브를 숨겨 두었다.
물론, 내게는 재생의 가호 찾기가 주목적이지만, 아카데미가 제시한 목표를 굳이 못 본 체할 생각은 없었다.
호아킨 아카데미는 노고에 대한 포상이 후하다.
오브를 수거해 제출한다면 성적에 좋게 반영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대장장이 뷜란트한테 팔면 될 터다.
멍하니 한참을 질겅거리니, 어느새 육포는 입 안에서 녹아 없어졌다.
툭툭 엉덩이를 털고 여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불현듯 허전함을 느꼈다.
“아, 맞다. 토끼 모포.”
어제 몇 시간에 걸친 무두질 끝에 비로소 얻어 낸 모포였건만.
아벨에게 덮어 주고 난 뒤, 아침에 떠나기 전 회수하는 걸 깜빡했다.
“…아.”
나름 기념비적인 모포였던지라, 기념품 삼아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잠깐 침음을 흘리다가 곧 머리를 흔들어 털어 냈다.
‘안 그래도 아파 보이는 앤데, 알아서 잘 사용하겠지. 그리고 줬다 뺏는 것도 좀 그렇고,’
어차피 돌아다니다 보면 산짐승 한두 마리 마주치는 건 일도 아닐 거고.
무두질 역시 한번 해 봤기 때문에 두 번째는 더 능숙하게 할 수 있으리라.
애써 짧게 웃어 상념을 떨쳐 내곤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문득 스친 생각.
“설마 그걸 레온한테 주거나 하진 않겠지…….”
한참을 제자리에 서서 탄식을 흘리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어쭙잖은 연애보단, 실리를 추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