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5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58화(58/300)
58화 무인도 생존 훈련 (5)
남녀 한 쌍이 아발론 섬을 같이 배회했다. 스피드 웨폰과 사키 료조.
저벅, 저벅.
선두를 걷는 료조는 꺾은 잔가지를 휘휘 저으며 나아갔다. 그녀는 뒤따라오는 웨폰을 고개만 반쯤 돌려 흘기고서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쯧, 섬까지 와서 만난다는 애가 하필, 스피드 웨폰 너라니… 에고, 내 팔자야.”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한숨을 푹 흘리는 료조. 그러자 웨폰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전투적으로 맺히기 시작하더니 버럭 고함쳤다.
“얌마! 나라고 너랑 마주치고 싶은 줄 알아? 뭐처럼 얼굴 좀 안 보나 했더니, 여기까지 와서 유일하게 본 얼굴이 사키 너인 내 심정을 아냐고오오!”
“그니깐 누가 길치래? 지가 동서남북 헷갈려서 나랑 만나 놓고서 투정은. 풋.”
“…….”
의표를 찌르는 사키의 말에 웨폰은 반박하지 못한 채, 애먼 입술을 비틀었다.
아발론 섬에 도착하기 전, 사키 료조와 오브 찾기로 경쟁을 내건 건 본인이었는데…….
정작 방향 감각을 상실해 제자리만 빙빙 돌고 있는 걸 그녀가 발견했고, 동행했다.
그녀와 만나지 못했다면 오브 수색은 고사하고, 훈련 기간 내내 공복으로 손가락만 빨고 있었겠지.
입술만 달싹거리는 웨폰을 확인한 사키는 별 반응 없이 앞만 보며 걸었다.
웨폰의 시선이 사키의 등에 닿았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숲길을 헤치면 보란 듯이 길이 나타났다.
정말 죽어도 인정하기 싫지만, 사키 이 자식은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하다.
하루 종일 잠만 처자며 나른한 얼굴로 흐느적거리는 주제에 성적은 항상 톱을 달린다. 무력 또한 학년 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말 그대로 지체를 겸비한 천재라 불릴 만했다.
다만 그것도 강검마를 만나기 전까지. 노력을 계속하면 어찌어찌 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사키와는 달리 강검마의 재능은 질투조차 나지 않았다.
본디 넘을 수 없는 존재는 세속적인 감정보다도 경외감을 갖기 마련인 것이다.
게다가 강검마의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인 성향은 같은 사나이로서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검마 걔는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걸으며 생각하던 중, 웨폰은 불현듯 의문이 어렸다. 곧이어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키에게 말을 내뱉었다.
“야, 사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사키. 스멀스멀 짜증이 몰려왔지만, 웨폰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초인적으로 짜증을 누그러뜨렸다.
“넌 강검마 어떻게 생각하냐.”
“뭔 말이야……?”
“아니, 그렇잖아.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맨날 양궁장에서 퍼질러 자기만 하던 애가, 강검마 걔랑 있으면 어울리지 않게 활동적이질 않나. 그리고 너 원래 네트워크 해킹하고 이런 거 귀찮다고 싫어하잖아. 그런 애가 시키지도 않은 걸 척척 해 오니까 좀 이상해서. 설마 너, 검마한테 딴맘 품고 그런 거 아니지?”
그러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키는 오뚜기처럼 우뚝 멈춰 서는 게 아닌가. 잰걸음의 관성 때문에 웨폰의 코가 그녀의 뒤통수에 부딪혔다.
“아 씨, 야! 갑자기 멈추면 어떡해!”
“…….”
놀란 가슴에 뒤로 나자빠지는 웨폰. 그러나 사키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오오오오.
둘 사이에 기묘한 정적이 감돌고, 차게 가라앉는 분위기에 웨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꿀렁였다.
이어서 기이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웨폰을 향해 돌리는 료조. 오뉴월임에도 차게 식은 것 같은 공기가 더해진다.
‘이거 어디서 본 장면인데.’
생각났다. 일본 공포 영화 중 우물에서 긴 머리를 앞으로 쏟아 낸 채 기어 나오는 귀신. 그 괴기스러운 장면이 새삼 현재 사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웨폰은 팔로 바닥을 밀어 뒤로 물러나려 했다. 사키는 음영 진 얼굴에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딱히 무어라 말실수한 것 같지도 않은데, 사키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했던 말을 재빨리 되짚어 보지만, 문맥상 못 나올 정도의 말은 아니지 싶었다.
‘젠장! 대체 왜 저러는 건데!’
조금씩 뒤로 물러나려는 웨폰, 사키는 느릿한 걸음으로 그를 쫓는다. 그러자 웨폰은 입가에 억지웃음을 담고 서둘러 입매를 움직였다.
“진정해. 왜 갑자기 정색하고 그래.”
“…야, 웨폰.”
서늘할 정도로 차게 식은 목소리. 곧이어 사키는 웨폰 코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곤 독심을 품은 눈으로 웨폰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티 많이 나?”
“…뭐?”
예상치 못한 반응에 웨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키를 쳐다봤다. 어느새 발그레한 홍조가 떠오른 두 뺨. 평소의 선머슴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옆머리를 검지로 배배 꼬며 묻는다.
“티 많이 나냐고.”
그 모습이 조금 전까지의 태도보다 더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설마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정신 계열 마법을 다루는 마인한테?
기겁한 기색으로 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힌 웨폰. 그러자 사키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무릎을 펴 일어섰다. 이어서 다시 성큼성큼 걸어 나가더니 곧장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 이거 다른 데 말하면 아주 고슴도치로 만들어 버릴 줄 알아.”
활이 걸린 어깨를 들썩여 보이는 사키. 웨폰은 그저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손짓으로 재촉했다.
“됐고. 저녁 되기 전에 오브도 찾고, 저녁거리도 사냥해야 하니까 빨리 일어나. 아니면 그냥 굶든지.”
새초롬한 콧소리를 내고서 도도하게 앞으로 걸어 나간다. 웨폰은 씨근덕거리는 심박을 추스르며 그녀의 뒤를 밟았다.
* * *
섬의 어둠은 눈 깜짝할 새에 찾아온다. 어제도 느낀 거지만, 몇 시간 이동한 것 같지도 않은데 금세 어둑어둑해지려는 조짐이 보인다.
약도를 참고해서 능선을 따라 뛰다시피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목적지에 어느 정도 다다른 것 같은데.
밤이 드리우면 시야가 좁아져 발이 묶인다. 아발론 섬에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늦기 전에 적어도 생명의 샘이라 불리는 ‘미미르의 호수’까지는 도달해야 한다.
“아⎯ 진짜 다 온 것 같은데. 어디야?”
나는 눈을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봤다. 동쪽이었던 곳은 서쪽이 되어 있고, 남쪽은 북쪽이 되어 있다. 방향은 통일성 없이 중구난방이었다.
“이런, 씨.”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온다. 어째 제자리에서 서성거리기만 한 기분이다. 오롯이 홀로 판단하고 나아가야 하다 보니 판단이 흐려지면 걸음의 진척이 느려진다.
‘이럴 때는 부원들이 그립네.’
혼자 있으니 부원들의 부재가 사뭇 크게 다가왔다. 얼마 전까지는 독고다이로 살아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이제는 허전함을 느끼다니. 나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애들은 뭐 하고 있으려나.”
뭐, 다들 한가락씩 하는 애들이니 알아서 잘들 하고 있겠지. 쓸데없는 걱정이다.
와중에 소슬한 바람이 불어오자 코끝에 달콤한 냄새가 맴돌았다.
‘…무슨 냄새지?’
문득 나는 콧등을 찌푸려 감각을 후각에 집중시켰다.
언뜻 사과 향 같지만 녹진한 꿀 향이 짙게 묻어난다.
“설마.”
그 냄새를 쫓아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섬에 오기 전, 문양이 적힌 바위에 대해 조사했다. 정확한 위치는 불분명하나 추상적인 단서들을 짜깁기해 유추할 순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생명의 과실의 텃밭이다. 참고로, 생명의 과실은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그냥 아발론 섬에서 나는 특이한 과일 정도로 취급된다.
먹어 본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맛은 더럽게 없으면서 한 입만 먹어도 다음 날 복통과 설사에 시달린다는 무시무시한 열매다.
하지만 그 향만큼은 천상의 것과 같아, 암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한다. 알기론 이 세계 최고 하이엔드 명품 브랜드, 케르메스의 특상 향수의 재료로 쓰인다던데.
천상의 향기, 지옥의 맛이라던가.
열매 하나에서 생과 사의 경계가 오간다는 의미로 보자면, 중의적으로 ‘생명의 과실’이라는 네이밍이 썩 맞아 들어간 것 같기도…….
‘팔면 돈 좀 되려나.’
나는 그렇게 향을 따라 한참을 이동했다. 숲길은 따로 없어 굽이진 언덕을 넘고, 한참을 험준한 수풀을 헤집어도 무언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내 발걸음보다 해가 동에서 서로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섬의 지형은 빠르게 변한다.
찰나의 순간에 허사가 되어 버릴 바에 그냥 내 감각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서 나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 분 남짓을 뛰자, 드디어 시야에서 수풀이 걷히고, 황량한 벌판이 나타났다.
“도착했다.”
황금빛 이파리의 나무가 총총하게 들어서 밭을 이뤄, 신비가 깃든 잔향이 은은하게 흩날렸다. 싱그럽기 그지없는 흥취에 취기가 올라와 정신이 혼탁해질 것만 같았다.
전생에는 알아주는 술고래였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텃밭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단서를 취합해 봤을 때, 문양이 새겨진 바위는 분명히 이 틈바구니에 껴 있을 터다.
벌판은 축구장 하나 정도의 면적이었다. 발을 재촉하면 금방 발견하겠다만, 과실의 나무들이 가는 경로마다 틀어막았다.
“쯧.”
마음 같아선 사시미를 꺼내서 시야를 가리는 이 나무들을 전부 썰어 넘기고 싶었다. 근데… 그랬다간 왠지 벌 받을 것 같아서 그 생각은 고이 접어 두었다.
슬슬 바위 찾기가 지겨워져 짜증이 몰려올 즈음이었다.
저 멀리, 유독 두드러지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면 나무와 비슷한 형태이나 그 질감이 투박하고 단단한 게 엄연히 달랐다.
눈을 게슴츠레 좁히자 그것은 한층 더 뚜렷이 포착된다. 상형 문자 같은 그림들이 넝쿨처럼 드리운 바위 하나.
“저거다.”
일순간에 짜증스럽던 마음은 잦아들고,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틀어막은 코를 팽, 풀어내고서 바위 쪽으로 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바위가 좀 더 가까워지자 바위 위에 얹어진 구형의 물체도 망막에 비췄다.
“오브?”
크기도 튼실한 게, 오브 중에서도 특상에 속하는 등급이리라. 뇌리를 빠르게 스치는 행복 회로에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렸다. 가일층 뚜렷해지는 과향.
드디어 운이 따르나 싶다. 하긴, 그동안 너무 내게 박하긴 했어.
양심이 있다면 이 정도 행운은 따라 줘야지.
입가엔 은근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드디어 열 걸음만 내디디면 다다를 수 있는 거리에서 나는 팔을 뻗었다.
그 순간.
스윽⎯
동시에 신형 하나가 나와 엇비슷한 속도로 나타나고.
덥썩.
바위 위에서 내 손과 고이 포개지는 또 다른 손.
내가 아무리 혈안이 되어 있다 해도, 한껏 확장된 감각이 지근거리의 무엇까지 놓치기는 쉽지 않다.
‘뭐지?’
잡념은 찰나였다. 나는 굳은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나 빈손은 사시미를 급하게 찾고 있었다.
“어, 뭐야. 검마, 너였구나.”
“……?”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눈앞에 있다.
레온 반 라인하르트, 그는 도신이 없는 칼자루를 꼬나쥔 채 생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그것부터 놓고 이야기할까?”
그는 눈짓으로 어느샌가 내 손에 들린 사시미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