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62)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62화(62/300)
62화 재앙 (1)
심장이 시끄럽게 요동쳤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이 정수리까지 솟아올라 뒷덜미를 뻣뻣하게 굳힌다.
폐부에 전해지는 숨이 턱 막힐 듯한 감각. 나는 필사적으로 팔다리에 뒤틀어 가까스로 몸을 속박하던 무형의 마력을 털어 냈다.
“커흑”
땅바닥을 짚고 속을 게워 내듯, 헛구역질을 몇 차례 하며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럼에도 무의식중에 몰려오는 역겨움에 이내 입을 꾹 틀어막아 진정시켰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시체들의 핏물이 피막을 이뤄 레이 션을 감쌌다.
그리고 그다음 상황이 이 꼴이다.
처음에는 일견 레이 션의 마지막 발악처럼 보였지만, 반응으로 비추어 보건대 그녀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으리라.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에 침전되는 망자의 그것과도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눈을 살짝 올려 허공에 떠오른 레이 션을 쳐다봤다.
공중에서 팔을 양옆으로 펼치고서 두둥실 부유하는 기괴한 광경.
빨간 피막은 그녀의 귀밑까지 차올라 그녀를 물들여 갔다.
슬슬 희미해져 가는 눈빛은 레이 션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려 준다.
“저건, 뭐야.”
머리가 혼란스럽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거라, ☐☐야. 쓸모없어 보이는 사소한 조각조차 때론, 미래를 비쳐 보는 거울로 쓰인단다.’
⎯새삼 첫 스승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나는 혼란 통에 분산된 정신을 집중시켜 이 상황에 대해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메리트는 바로 ‘기적의 가호 M’ 플레이 당시의 기억.
앞으로의 미래를 엿보고, 일어나지 않은 위기들을 예비하며 준비하게끔 만든 원동력은 틀림없이 유저로서의 경험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두뇌를 굴렸다.
날카로운 마력의 파동에 살갗이 쓸리는 와중에도 몸은 졸아붙는 대신, 도리어 허리를 꼿꼿이 세워 상황을 마주한다.
절체절명의 이 상황에서마저 무서울 정도로 차분히 상황을 반추해 나가는 건 ‘검신의 가호’ 덕이겠지.
이럴 때 보면 가호(加護)라는 이름처럼, 무언가가 나를 살피며 도와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검신의 가호’를 부여한 주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종종 하고는 한다.
나는 상념을 털어 낸 뒤, 그간의 상황을 되짚으며 필름처럼 빠르게 투사되는 장면 중에서 핵심만을 짚어 냈다.
치솟던 동요가 얼추 가시고 차가운 이성이 가슴에 안착한다. 그러고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으로 중얼거렸다.
“반인반마화의 진행?”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로 흉악한 기운을 뿜어낼 만한 존재는 이 세계에서도 손꼽을 정도일 것이다.
공간이 찢기고 사위가 비명을 지르는 이 참상.
여태 있었던 일들을 묻어 버릴 정도로 흉흉한 탁류가, 일대를 뒤덮는다.
마인 머메이드가 내뿜던 마력마저, 이 패악스러운 마력에 비하면 피라미가 펄떡거림으로 느껴진다.
다만, 기억상 반인반마화의 연출은 이렇게 거창하지도 않다.
그리고 이처럼 공간을 일그러트릴 정도로 마력이 넘실거리지도 않는다.
제아무리 군단장급 마족과 계약한 인간일지라도 빌런은 본디 사람이다. 명명백백하게 규정된 강함의 한계선을 계약 한 번으로 뚫을 순 없는 노릇. 레이 션 본인의 비기도 아니고, 의도한 반인반마화의 진행도 아니라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로 좁혀진다.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배어 나온 핏물로 그려진 기이한 오방진과 스멀스멀 레이 션의 전신을 집어삼킨 검붉은 피막.
레이 션과 단원들을 제물로 삼아 군단장급 마족이 직접 강림하는 것.
“…씨발.”
판단이 서자 뒤늦게 감정이 관성을 받아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밀려오는 욕지기가 이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비유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좆돼 버린 상황이 아닌가. 가슴에서 시작된 용력은 절망적인 상황에 한풀 꺾이는 듯했다.
와중에도 짙게 깔리는 마력. 다시금 레이 션을 올려다보자 이제 곧일 것 같았다. 숨은 점점 막혀 오고, 손끝 발끝이 따끔함을 넘어 맵기까지 하다.
“썅― 거, 살아남기 존나 힘드네.”
나는 숨을 흘림과 함께 욕을 뱉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핏방울이 붙은 사시미를 콱 틀어쥐고서 몰려오는 감정들을 칼날을 휘둘러 함께 털어 냈다.
“뭐, 여기까지 왔는데 죽기밖에 더 하겠어.”
마냥 포기할 수만은 없다.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이지만, 마지막으로 발악하듯 칼춤을 춰 볼 수밖에.
‘남은 시간은 9초 남짓.’
언더테이커 녀석들을 썰어 버리느라 41초라는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방심을 안 했다지만, 연이어 절체절명의 상황들이 덮쳐 올 줄을 누가 알았겠나.
…이럴 줄 알았으면 5초라도 좋으니 남겨 놓을걸. 뭐,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늦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의식을 붙잡아야 한다. 도망쳐 봐야 반항 한 번 못 하고 죽을 거란 걸 직감이 알린다. 그럴 바엔 뭐라도 해 보는 수밖에 없다.
콰르르르르릉!
갑자기 마른 구름 사이에서 붉은 벼락이 튀었다. 공기의 하중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위그드라실의 금빛조차 흐려졌다.
‘왔구나.’
이어서 레이 션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반쯤 떴다. 게슴츠레 치켜뜬 눈만 보아도 저것이 더 이상 레이 션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길게 늘어진 붉은 안광.
원래 레이 션이 입고 있던 옷가지 대신 녹여 낸 핏물이 비단처럼 짜여 빨간 드레스 형상이 피부 위를 얇게 둘러싸고 있었다.
시선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충격이 뼛속을 저민다.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감각. 그간의 일들로 다져진 담력이 무색하게 공포가 솟아오르지만.
“후.”
숨을 내뱉었다. 무더운 초여름임에도 새하얀 입김이 피어 비산했다.
사르륵.
부유 중이던 ‘그것’의 발이 지면을 밟았다.
그러자 바람의 흐름, 개천의 유류, 생명의 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소름 돋는 적막만이 일대에 낮게 가라앉는다.
“아…….”
그것은 단음절의 말을 흘렸다. 그리곤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는 입이 찢어져라 실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열락에 찬 웃음소리. 작은 기함조차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인간의 무심한 발걸음에 땅을 기는 벌레가 터지는 것과 일견 차이가 없다.
그 소리를 듣자 고막이 찢겨 핏물이 귓불을 타고 줄줄 흘렀다. 따끔거리는 귀를 틀어막을 손은 없었다. 공포를 떨쳐 내려 사시미를 틀어쥔 손에 크게 힘을 주었다.
한참을 웃던 그것은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어서 그것의 눈매에 고리가 지더니 반갑게 손 인사를 건넨다.
“안녕, 꼬마야?”
“…….”
“음, 이렇게 인사하는 게 아닌가? 마경 밖을 나온 게 700년 만이라서 인간들이 하는 상도를 잘 모르거든.”
미염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것은 바닥을 구르는 시체를 몇 구 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을 뗐다.
“이거, 꼬마 네가 한 거니?”
그것은 내 대꾸는 안중에도 없는 듯 혼자서 말을 덧붙였다.
“대단한데? 어쩐지 나를 이렇게 보고도 맨정신으로 있다는 거 자체가 평범한 인간은 아니라는 거니까.”
그것의 음성이 귓전에서 이명처럼 맴돌았다. 몰려오는 몽롱함에 나는 눈을 크게 끔뻑여 정신을 깨웠다. 그러자 그것은 재밌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와, 정신 마법을 걸었는데 이걸 버틴다고? 너 진짜 보통 애가 아니구나? 어때, 이참에 나랑 계약하는 건? 음, 생긴 것도 보니까 아직 핏덩이긴 하지만 장차 괜찮아질 것도 같고.”
그리 말하며 그것은 붉은 입술 사이로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번뜩거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네. 음, 인간들은 먼저 자기소개부터 하던가. 나는 5군단을 맡은 아고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그럼 그럼, 이제 네 이름을 말해 볼래? 나는 내 노예들 대부분의 이름은 기억하는 상냥한 주인이란다, 얘야.”
그것의 이름을 들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짧은 순간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직접 들으니 생경함을 넘어 현실감이 없었다.
몽마라 불리는 서큐버스들의 군주이자 마왕군 5군단장 아고르.
마법의 5속성 중 화(火) 속성 마법을 다루는 악마. 무력 자체는 초월체에 가까운 군단장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않으나, 군단장 중 정신 계열 마법을 가장 잘 다룬다는 설정이었다.
사실 두드러지지 않는다 뿐이지, 저 괴물 존재 자체가 자연재해나 다름없다. 저것 하나만으로 소국 하나 정도는 멸망시킬 수 있으니, 지금 이 상황에 큰 위안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본능과 욕망이 끌리는 대로 움직이며, 꿈을 촉매로 인간을 현혹해 정기를 빨아먹어 양분으로 삼는 몽마다.
게임을 중간에 접었던 나였으나 그녀는 남자들의 로망인 색기 충만한 서큐버스인지라, 꺼무위키로 설정을 대충 훑었더랬지.
“으흐흐, 내가 직접 이렇게 말을 붙이는 건 700년 만에 처음이니 영광으로 알려무나. 특별히 내 노예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줄게, 꼬마야.”
“…….”
아고르는 장난치듯 허벅지 자락을 슥, 들어 올리며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내면을 흔드는 짙은 농도의 마력이 느껴졌다.
“어차피 너희 인간들도 고상은 척은 다 하면서, 서로를 재단하며 서열을 매기잖니? 각자의 실리를 쫓으며 사람을 죽이고, 고통을 주고. 그럴 바에 나와 같이 영화로운 꿈을 꿔 보는 게 어때?”
발끝으로 언더테이커 시체 하나를 툭툭 치며 아고르는 말을 이었다. 농염한 목소리에 정신이 환각과 현실을 초 단위로 넘나들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아고르의 말이 옳다.
인간은 개인의 실리를 위해 상대를 재단하며 서열을 매긴다. 강한 자는 이권을 취한 채, 약자한테 베풀지 않는다.
불의를 보고 묵인하고, 심지어 실리를 계산해 전쟁까지 일으키는 족속이 바로 인간이니까.
전생에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한순간에 풍비박산 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은행은 빨간딱지를 집구석 이곳저곳에 붙여 댔고, 사회는 우리 집의 자생 기회를 박탈했다.
‘하지만…….’
농염한 목소리. 아니 정신 계열 마법을 칼을 휘둘러 쳐 냈다.
무언가 툭- 끊기는 듯한 감각. 곧바로 선명해지는 정신.
불필요한 상념들을 걷어 내고, 칼자루를 다잡는다.
유혹의 마법도, 밀려오는 공포도 전부 베어 낼 기세로.
“어머, 왜 마법이 안 통하는 거 같지? 조금 전보다 더 상위 계열 마법이었는데?”
“…….”
“설마 이 미천한 몸뚱이 때문인가. 하여간, 징징대서 계약해 줬더니 그 녀석은 일을 이따위로 한단 말이지. 빙의체가 이래서야 어디 활동이나 하겠어? 참나.”
“하, 하하.”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아고르를 앞에 두고서, 나는 들리게끔 짧게 웃었다.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아고르는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너, 설마 웃은 거야?”
“어, 개소리를 길게 하는 게 웃기더라.”
그 말과 동시에 일대 전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고르의 두 눈에 질식할 것 같은 격노가 넘실거렸다.
솔직히 순간의 목숨을 부지하려면 아고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일이겠지.
게다가 살아남자는 내 궁극적인 목적 또한 마왕군에 편승한다면 한결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저것은 악마.
그것도 마왕군 5군단장이자 서큐버스의 여제 아고르.
감언으로 인간을 속이고 양기를 빨아먹는 마족이.
같은 마족조차 미물처럼 대하는 악마가 과연 나를 상냥히 대한다고?
글쎄, 존나 회의적이다.
아마 제 기분에 안 내키면 손가락만 까딱여 죽여 버리겠지.
그렇게 비굴한 종속의 삶을 살 바에 발악이라도 해 보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확고히 굳혔다. 이어 한 뼘쯤 벗긴 사시미를 슥슥 닦으며 말했다.
“네 노예가 되라는 그거 말인데.”
키리리링.
방금과는 달리 소슬한 빛이 사시미 날에 얇게 서렸다.
왜일까, 죽음이 목전인 상황에서 피식 웃음이 샌다.
나는 시선을 아고르를 두고서 말했다.
“좆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