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6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64화(64/300)
64화 재앙 (3)
머릿속이 새하얗다.
아고르와 치렀던 전투의 기억이 파편처럼 쪼개져 있었다.
사시미를 잡고 맹공을 퍼부었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이후론 몰려오는 격통이 뇌를 저미고 의식을 끊었다.
‘…죽은 건가?’
나는 아찔함을 느끼며 실낱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끊어진 의식 속에서 잊힌 몸의 감각을 더듬었다. 그러자 황량한 바람이 뺨을 쓰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 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기분이 이런 건가. 하지만 아직 쾌재를 내지르기는 이르다. 나는 좀 더 감각을 곤두세워 정신을 일깨웠다. 그러자 혈관을 타고 피가 구석구석 도는 것이 느껴졌다.
촉각을 시작으로 미각, 후각, 청각이 순차적으로 되살아났다. 피부를 날카롭게 쓰는 열풍, 혀에 스미는 맵싸하고 건조한 공기, 타는 냄새가 비강을 찔렀다.
다만, 초점이 아직 덜 잡혔는지 눈에 보이는 풍경엔 탁한 회백색이 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에 감각을 불어넣었다. 손마디에 칼자루가 잡히는 맛이 새겨졌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어떻게 무통의 가호가 끝났음에도 격통이 없는 것인지 의문이 서렸다. 격통은커녕 오히려 머리가 통풍이 된 것처럼 상쾌했다.
‘…….’
기시감이 들었다. 예의 클로이와의 대련 중 목검이 부러졌을 때와 비슷하다. 다만, 그때와 달리 정신은 또렷해지고 있었다. 내면에 속삭이던 불길한 소리도 없었다.
상념의 잠긴 와중에 풍경이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상 져 보이던 시야가 이내 또렷한 형태를 갖춰 간다.
“쿨럭, 쿨럭.”
귓전에 닿는 걸쭉한 기침 소리에 나는 눈을 치켜뜨고 정면을 쳐다봤다. 눈에 들어온 것은 검제의 등판이었다.
하지만 검제의 왼쪽 옆구리가 허전했다. 상박까지 사라진 그의 왼팔. 불길이 그의 겨드랑이 옆을 지지고 있었다. 고기가 타는 듯한 불쾌한 냄새가 났다.
“…검제님?”
“쿨럭, 쿨럭. 정신을 좀 차렸나.”
그는 고개의 반만 슬쩍 돌려 쳐다봤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기색을 지우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인다. 잇새로 새어 나온 피가 턱을 타고 흘렀다.
검제의 사라진 팔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제는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뗐다.
“몸을 회복할 동안 좀 추스르고 있게. 사태를 보니 영 말이 아니군.”
“…검제님, 팔이.”
검제는 한쪽 어깨만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괜찮네. 검을 잡는 데 두 손을 다 쓸 필요 있겠나. 괘념치 말고 본인 몸부터 추스르게. 상황이 절망적인 건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와중에도 검제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입꼬리를 좀 더 끌어 올렸다. 그리곤 곧바로 시선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아고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검제와 나를 살피다가 말을 뗐다.
“이상하네. 노친네, 너 말이야.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내 마법을 벤 거야?”
검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남은 오른팔로 검을 움켜쥐며 자세를 취했다. 아고르는 한숨을 폭 흘리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짜증나네. 아무래도 이 몸뚱이랑 내가 상성이 안 좋긴 한가 봐. 핏덩이랑 저딴 다 죽어 가는 늙은이를 상대로 고전하는 걸 보니.”
이어서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는 아고르. 그것이 쯧, 혀를 차자 눈빛에 분노가 번졌다.
이어서 아고르의 팔뚝에 응축된 불이 장갑처럼 휘감겼다.
그러자 일순 수해가 매말라 수증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파스스 소리를 내며 증발해 버린다.
아고르가 살기 어린 마력을 뿜어내자, 그것이 물리적인 형태를 갖춰 몸을 옭아맸다. 등 뒤로 보이는 검제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노친네, 네가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진 모르겠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고르는 발을 굴렀다.
콰과광!
공기가 터지는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검제의 지척에 다가와 팔을 휘둘렀다.
인위적인 억센 바람에 살갗이 쓸렸다.
마음 같아선 검제를 돕고 싶으나, 검신의 가호 반동 탓인지 손끝도 움직이지 않았다.
“⎯죽어.”
사납게 타오르는 불꽃이 검제의 목을 노렸다. 검제는 눈을 부릅뜨더니 칼날을 세웠다. 은빛 괘선이 아고르의 팔을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서겅⎯!
소리는 날카롭고 동작이 간결했다. 춤사위와 같은 움직임.
불필요한 요소를 전부 걷어 낸 극에 달한 검술은 베지 못할 것을 베어 낸다.
이어, 곧 아고르의 팔 하나가 바닥을 굴렀다. 거센 열기에 지면이 용암처럼 녹아내렸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아고르. 그러더니 그것의 얼굴에 살벌한 핏발이 맺히기 시작했다.
“감히 이 벌레 새끼가!”
아고르가 소리를 내지르자 광란이 일었다.
기류가 사납게 용오름치고, 수해를 태우던 불꽃이 거대한 장막처럼 화벽을 세웠다.
대기의 수분이 전부 증발해 순식간에 입안이 바싹 말라 버린다.
그 순간, 검제는 날 끝으로 가뭄 들린 땅을 긁어 냈다. 그러자 건조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고, 검제는 몸을 흙먼지에 묻어 상대의 시야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다.
“이 질긴 쥐새끼 같은 놈이!”
아고르가 검지와 엄지를 튕기자 등 뒤로 수백, 수천 개의 불 창살이 생겨나 곧장 격발됐다.
파바바바바바바박⎯!
불길의 소나기가 검제가 있는 쪽으로 쇄도한다.
타닥!
가볍게 내딛는 발소리. 은신해 있던 검제가 순청색의 오러가 둘러진 검극을 내질렀다. 오러가 파란 채찍처럼 아고르의 급소를 노린다.
맹렬한 기세의 검에는 한 인간의 기술과 재능, 경험이 담겨 있다. 검제가 행하는 일련의 동작과 검날이 내 심상의 영역에서 구체화되어 투사된다.
한 인간이 일평생 이룬 검이 이윽고 아고르의 목을 때린다.
서⎯걱⎯!
‘베었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는 섬뜩한 피륙음.
콰득!
“어… 억!”
지면을 뚫고 솟아난 수많은 불 창살 중 하나가 검제의 배가 꿰였다. 치지직⎯, 살이 지져지는 소리. 바닥을 박차고 거리를 벌리는 검제가 입에서 핏줄기를 왈칵 뿜어냈다.
검제가 눈꺼풀을 살짝 내려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고, 이내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둥글게 구멍이 파인 복강. 압도적인 화력에 지져져, 새어 나오는 핏물과 살점조차 없었다.
“커, 크윽.”
입술을 몇 차례 뻥긋거리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검제. 이윽고 무릎이 땅에 닿더니 눈동자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아고르는 비소를 흘리며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갔다. 잘렸던 팔도 어느새인지 붙어 생채기 하나 없이 아물어 있었다.
인간과 마족의 격차는 비단 운용하는 힘의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아고르는 그 찰나에마저 정신 계열 마법을 시전해 검제의 시각을 뒤흔든 것이었다.
“젠장!”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앞니가 입술을 파고들어 핏물이 흘렀다. 몸이 옴짝달싹 못 했다. 아고르는 나를 곁눈질로 흘겨보고서 도로 눈을 검제에게 돌렸다.
“노친네, 인간치고는 대단한데.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벌레가 제아무리 열심히 물어 봤자 벌레야.”
검제는 숨을 길게 늘어뜨리며 아고르를 응시했다. 그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아고르의 말에 반박했다.
“두려운 게로군.”
“…뭐?”
곱게 휘는 아고르의 눈썹. 검제는 꺼져 가는 숨결을 다듬으며 말했다.
“네 녀석이 마경을 넘어 이곳에 온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보여. 네놈의 눈엔 명백하게 두려움이 깃들어 있어.”
“하, 어이가 없네. 조금 장단에 어울려 줬다고 우쭐하는 꼴 하고는. 야, 벌레. 운 좋게 팔 한 번 잘랐다고 너랑 내가 같은 선상에 있는 게 아니야.”
“하하.”
그 말에 검제가 낮게 소리 내어 웃자 아고르의 입매가 비틀렸다.
검제는 고개를 조금 치켜들어 아고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금안이 형형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친네 너, 그 눈 설마… 아론, 그놈의 후손?”
눈을 가늘게 뜬 아고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차갑게 물었다. 검제는 그저 끌끌 웃으며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웃기는 일이군.”
“…갑자기 뭔 개소리야?”
“천 년을 넘게 산 괴물한테 노친네 소리를 들으니 웃길 수밖에. 내 동료인 할망구도 네 앞에선 파릇파릇한 선녀로군, 그래.”
말하는 검제의 호흡이 가빴다. 새치 한 올이 그의 뺨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는 것이 아닌, 칼날을 땅에 박아 넣으며 지팡이 삼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족은 분명 우리 인간들보다 강하다. 부조리할 정도로 말이지. 그 사실에 젊은 날의 나는 이 세상을 원망했었네.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절망적인 법이니 말이야. 하지만… 이 나이에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어.”
검제는 칼자루를 오른손으로 잡은 채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두 눈을 내 쪽으로 두고서 설핏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시선에 온몸에 이유 모를 소름이 곤두섰다.
“아고르, 네놈도 알 터다. 인간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진보해 나가는 법이다. 그것이 마족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자, 호시탐탐 인계를 침범하려는 이유니까.”
검제는 땅에 박아 둔 칼날을 빼내어 적을 겨냥했다. 노색이 짙어지는 아고르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그러다 곧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진짜 못 들어 주겠네. 다 죽어 가는 노친네가 뭔 거창한 유언을 남기나 싶었는데, 한다는 소리가 결국 그런 거니? 하여간, 칠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너네는 참 진부하네.”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꺾는 아고르. 놈의 발끝이 내 쪽을 가리키자 검제의 얼굴에 당황이 빠르게 번져 갔다.
“네놈의 상대는 나란 말이다!”
“뭐래, 다 죽어 가는 놈이. 난 너 같은 산송장 상대해 줄 생각 없어. 이왕 인세에 머무는 건데, 젊은 아이랑 놀고 싶거든.”
아고르는 코웃음을 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금 적을 두고 등을 보이는 건가?! 그 녀석은 일개 생도란 말이다!”
“야, 아론의 핏줄. 너 지금 인간의 잣대를 나한테 들이미는 거야? 좀 똑똑한 줄 알았더니 그냥 노망난 노친네였네.”
고래고래 소리치던 검제가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고르는 이미 내 눈앞까지 도달했다. 놈이 무어라 주문을 읊조려 영창하자 뻗어 나온 정신계 마법이 신체를 속박한다.
“안 된다! 강검마, 도망치거라!”
팔 한쪽이 사라지고, 배에 구멍이 난 검제의 발걸음은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아고르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흘깃하고는 내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저 늙은이의 말에 동조하는 건 아닌데, 너를 보면 인간은 진화하는 생물인가 봐. 네 몸뚱이는 쓸만해 보이니, 내가 가져갈게, 얘야.”
“…….”
아고르의 음침한 조소와 검제의 간절한 외침이 뒤엉킨 배경음이 귓가에 스몄다.
아고르는 뻗은 손으로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더니, 난데없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이거는 내 마지막 선물.”
이어서 정수리에 손을 얹고서 뿜어낸 마력으로 내 뇌리를 헤집기 시작한다.
“흐흐흐흐, 네 몸은 우리 마족의 염원을 위해 쓰일 거야. 너무 원망하지 말고, 지옥에서 보자꾸나, 강검마.”
그 말을 끝으로 들리던 시끄러운 배경음이 일순 멎더니.
파앗⎯!
[외부의 무단적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일순간, 하얀 그림자가 드리우듯 머릿속에 백지장이 떠올랐다.
삐빅⎯
[외부의 무단적 침입이 감지되어 자체적으로 방비 프로그램을 전개합니다.]그때, 날카로운 단음절의 알림음과 함께 무정한 여성의 목소리가 뇌 내에서 연거푸 울려 댄다.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Error 발생!] [※※예상하지 못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프로그램이 작동되기에는 아직 사용자의 격이 너무 낮습니다.] [프로그램이 작동되기에는 아직 세계선의 격이 너무 낮습니다.] [장소 – Code. Yggdrasil의 촉매로 격의 일시적 상승이 가능합니다.] [프로그램이 억제력을 사용해 세계선 재조정 및 동기화를 진행합니다.]지이잉⎯
[【? ? ?】으로서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점차 정신이 혼탁해져 가고, 이성의 끈을 엄습하는 어마어마한 탈력감.
[사용자의 모든 가호의 격을 강제적으로 상향 및 발현시킵니다.] [무통의 가호 신(神), 재생의 가호 신(神)이 동시 발현됩니다.] [전이의 가호 신(神)이 두 가호를 운용해 세계선의 고통과 찢김을 멎게 합니다.] [세계선의 부하를 고려해 발현 시간이 60초로 제한됩니다.]지이잉⎯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도취감.
이윽고 무언가 툭, 끊겼다.
[검신(劍神)의 가호(假呼)가 해제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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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어살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