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6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67화(67/300)
67화 검제 지크프리트 (2)
병원에서 퇴원하고도 일주의 시간이 흘렀다.
다만, 아직 등교하진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허락하기 전까진 등교를 삼가 달라는 학원장 메디아의 전언 때문이었다.
‘하긴 내가 어디에 얼굴을 비추기만 하면 거짓말처럼 마인이 나타나니, 원.’
보통 사람이면 평생 마주할 일이 없을 마인을 나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조우했다. 심지어 두 번째는 그냥 마족도 아니고 마왕 측 최대 전력인 군단장 중 하나다.
‘진짜 뒤질 뻔하다 살았어.’
그래도 입원했던 이 주 동안 여러모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병원비 걱정도 안 해도 되는 게 크게 한몫했다.
병실의 초침은 느리게 흘러서, 이것저것 기억을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처음 검신의 가호를 발현했을 무렵이나, 중간고사 때와 버팔로 던전에서의 여러 기억들이 뇌리를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아발론 섬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당시의 감각을 떠올리려 노력해도 도무지 상기되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은 또렷했지만 감각은 상실됐다. 무언가 억지스럽게 그 부분만을 도려낸 듯한 불쾌한 기분이었다.
“이제 좀 가닥이 잡히나 했더니……. 더 모르겠네.”
검신의 가호는 불가사의한 힘이다.
내가 사선에 휘몰리면 필연처럼 발현되어 죽음의 경계에서 이끌어 낸다.
이렇게만 보면 무척이나 감사한 가호다.
그러나 발현을 거듭할수록 인간성이 희미해져 간다.
언더테이커들을 도륙 냈을 당시의 기억과 감각을 더듬었다.
그때의 나는 눈살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적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져도 손속에 막힘이 없었다.
오히려 칼날은 생명을 빼앗으며 갈증을 채우는 것 같았다.
’심지어 일말의 후회조차 안 느껴지다니…….‘
나는 골몰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속으로 상태창을 읊조렸다.
파앗―
== ==
[검신(劍神)의 가호]베면 잘릴 것입니다.
◎육신(肉身)의 격 : (9▶12) ▷ 검(劍)의 규격이 완화됩니다.
◎정신(精神)의 격 : (5▶8) ▷ 말과 행동에 위압감이 깃듭니다.
◎무장(武裝)의 격 : (3▶5) ▷ 가호 발현 시 고통이 (1▶2) 단계 경감됩니다.
☆동화율 : 12.7% ▶ 17.9% ▷ 【???】의 선(線) (1) 줄이 읽어집니다.
→[NEW! 동화율 15% 달성하여 해금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
[※ 길이가 (39+1) 센티 이하, 폭은 (10+0) 센티 미만의 검일 때만 가호가 발동됩니다.]
== ==
“상승세가 꽤 가팔라졌네.”
오랜만에 확인한 상태창에선 수치 상승이 있었다. 찔끔찔끔 오르던 상단의 세 가지 격도 두드러지게 변해 있다.
“무장의 격, 고통 경감률도 한 단계 상승했고.”
눈을 살짝 내리자 보이는 동화율은 이미 해금 조건에 달성했다. 나는 검지를 뻗어 문구를 터치했다.
파앗―
== ==
☆동화율 : 17.9%
▷ 【???】의 선(線) (1▶2) 줄이 읽어집니다.
▷ 【???】의 목소리를 미약하게 감지합니다.
→[동화율 25% 달성 시 다음 해금 조건이 충족됩니다.]
== ==
“흠.”
나는 침음을 흘리며 눈을 게슴츠레 좁혔다. 예상대로 붉은 선의 개수를 나타내는 숫자는 가변성을 띤다.
하지만 그중에서 도드라지는 건 새로운 문구였다.
⌜【???】의 목소리를 미약하게 감지합니다.⌟
그 말을 여러번 곱씹었다.
‘목소리를 감지할 수 있다라…….’
처음에 나는 저 물음표 세 개는 일종의 개념 비슷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목소리라는 세 글자는 그간 뇌리에 없던 새로운 경우의 수를 제시한다.
‘저 싸가지 없는 물음표 세 개는 어쩌면 생물이나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직 많은 의념이 머리에서 이리저리 떠다닌다. 나는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한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어젯밤 메디아로부터 기습적인 전화가 있었다.
그녀는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알려 주겠다 말했다.
메디아의 어투가 평소보다 빳빳해, 얼떨결에 익일인 오늘 학원장실에 찾아뵙는 걸로 말을 맞췄다.
“마침 부탁할 것도 있었는데, 잘됐네.”
겸사겸사 검제님도 있다면, 감사 인사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저것 많은 빚을 졌다.
병실을 통째로 대절해 줬다거나, 정신이 없었던 동안 내 병 수발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은이다. 상환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사람된 도리로서 감사를 표할 순 있을 것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서둘러 기숙사를 나섰다.
째깍, 째깍.
벽시계의 초침이 재촉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 * *
그윽하게 음미하면서 찻잔을 홀짝이는 검제. 그를 쳐다보는 메디아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홍차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저 노친네, 팔 하나 없이 잘만 지내네.’
칠성 영웅은 전장의 첨단에 나서는 자들이다. 팔다리 하나 나가떨어지는 것쯤은 상시 각오하고 있다.
절궁 사키 코지마만 해도 애꾸눈이고, 창성 리차 드 뮈라의 등판엔 깊은 자상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도 그렇고.’
메디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단전을 어루만졌다. 오늘따라 괜히 더 묵직하고 저릿했다.
‘저 틀딱은 대체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검제를 흘겨보며 메디아는 속으로 말을 씹었다. 지크가 아발론 섬에서 팔 하나를 잃어 왔을 때, 메디아는 아연실색했다.
인류 최강이라 불리는 그이니만큼 어쭙잖은 마수는 그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
그가 일흔 줄까지 사지가 멀쩡했던 건 강함의 방증이다. 근데 그런 그가 사지 하나가 잘려 왔다. 의아함을 넘어 믿기지가 않았다.
‘근데 생도 보호 차원에서 아발론 섬에 보내 놨더니…….’
고유 가호인 ‘시인의 가호’를 운용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인지를 벗어난 일은 가호에 포착되지 않는다. 예삿일이 아니란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검제는 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처럼 입을 떼지도 않는다. 넉살 좋게 웃으며 강검마가 깨어날 때를 기다리자며 말을 미룬다.
메디아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나올 뻔했다.
아발론 섬에서 검제는 급히 귀환했다. 그는 강검마를 들쳐 업고 있었다.
강검마는 사경을 헤맸다.
눈에 띄는 흉터는 없었지만 속은 한참을 곪아 있었다. 모든 근섬유와 신경 줄이 고무줄처럼 끊겨 있었고, 동공이 혼탁했다.
그날, 메디아는 정신 줄이 끊기는 걸 느꼈다. 그녀는 부속 병원의 모든 의료진과 힐러 영웅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강검마를 살리지 못하면 병상에 눕는 건 그들일 거라고.
‘뭐, 덕분에 우리 검마가 정신을 차렸으니까.’
메디아는 고리 눈으로 검제를 흘겼다.
검제 또한 섬에서 돌아온 직후, 면밀한 검진을 받았다.
혹여 다른 부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검제를 담당한 전문의는 혀를 내두르며 이리 말했다.
-…제가 삼십 년 넘게 숱한 환자를 봐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학원장님. 아, 검제님께 무슨 문제가 생겼단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말끔하십니다. 심지어 기존에 있던 잔병도 청소된 것처럼 없어졌습니다. 신의 기적이라고밖에 말씀을 못 드리겠군요.
혀를 내두르며 말하던 의사. 메디아는 내심 크게 안도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강검마가 넝마가 되어 온 데는 분명 검제의 책임도 있었다. 그럼에도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검제의 이후 행보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고를 털어 병동 하나를 대절했다.
미친 물가의 호아킨 아카데미인 만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다.
‘5만 원짜리 낚싯대도 벌벌 떨며 사는 자린고비가…….’
그뿐만 아니라, 검제는 강검마가 입원한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갖은 병 수발은 물론이고, 곁에서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친자식이 아파도 그 정도로 갸륵한 정성은 보이기 힘들 것이다. 그런 모습에 메디아는 속으로 인내를 새기며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인내심도 오늘로 밑천이 드러나고 있었다.
톡, 톡.
메디아가 다리를 꼬고서 손톱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검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홍차를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음, 메디아 너는 세월이 흐를수록 차를 우리는 솜씨가 느는 것 같군. 이십 년 전만 해도 네가 끓여 준 차만 마시면 복통에 시달렸는데 말이야.”
그리 말하자 고운 관자놀이에 굵직한 혈관이 맺힘과 동시에 메디아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야, 이 틀딱 새끼야! 여기가 무슨 다방인 줄 알아? 이제 곧 검마가 오는데 언제까지 말을 미룰 거야! 나도 상황을 알아야 할 거 아냐!”
“허허, 뭐 그리 급하나. 그 성격 좀 누그러트리게.”
“하! 섬에 정신머리도 팔이랑 같이 두고 왔냐?! 이게 아주 오냐 오냐 해 주니까!”
메디아가 사나운 표정으로 검제를 노려봤다. 그는 별 반응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메디아의 눈살이 좀 더 구겨졌다.
그녀가 탁상에 놓인 휴지 곽을 잡고 던졌다. 검제는 눈도 안 뜨고 그걸 피해 버린다.
“느려.”
“이 노망난 미친놈이!”
그렇게 둘 사이에 화목한 선문답이 몇 분가량 오갔다. 이어서 한풀 꺾인 메디아가 이마를 짚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몸을 한껏 들썩이자 머리가 식었다.
그러자 시간 차를 두고 짙은 피로가 몰려왔다. 이른바 ‘현자 타임’이었다.
“…야, 지크. 진짜 뭔 일이 있었던 건데? 말을 좀 해 봐. 세계 언론사가 얼마나 쪼아 대는지, 내가 너 때문에 요새 잠을 못 잔다고.”
흐느끼듯 중얼거리는 말에 검제가 곁눈질로 바라봤다. 그는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곧 찻잔을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여유도 지워졌다.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네. 섬에서 있었던 일은 나도 이해하는 데 제법 시간이 들었으니.”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느새 시계의 초침은 정오 오 분 전을 가리켰다. 강검마와의 약속 시간이 가까웠다. 검제는 이젠 비어 버린 오른 팔소매를 매만지더니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발론 섬에 5군단장 아고르가 나타났었네.”
“어?”
검제의 담담한 어조. 거짓 따위는 터럭만큼도 묻어 있지 않았다. 메디아의 눈동자에 한순간 미동이 일더니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마, 말도 안 돼.”
검제는 고개를 저으며 메디아의 현실 부정을 부정했다. 메디아의 입술이 파르라니 떨렸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내 팔을 앗아 간 것도 그 녀석이었어.”
“…강검마가 그렇게 된 것도?”
검제는 턱을 끄덕여 긍정했다. 그러자 메디아는 치솟는 탈력감에 몸을 소파에 깊게 기댔다.
정신적인 충격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그녀는 흠칫 놀라서 재차 물었다.
“그럼 아고르는 어떻게 된 건데?”
“토벌당했네. 아직 세상에 공표하기엔 시기상조라 미뤄 놨지만, 내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이견은 없어.”
“지크 너 혼자 토벌한 거야?”
“하하하, 그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그러자 검제는 음영 진 얼굴을 거두며 실소를 터뜨렸다. 쳐다보던 메디아의 뒷덜미가 빳빳해졌다.
‘지크가 드디어 맛이 갔구나.’
아고르는 정신계 마법에 능한 군단장이다. 그 후유증으로 지크가 맛이 갔을 수도 있다. 웃음소리가 짙어질수록 가능성은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지크?”
메디아의 미간이 판판하게 펴지자 검제는 웃음을 갈무리했다.
“……,”
잠시 정적이 일었다. 학원장실의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그러나 메디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검제의 침묵에 의념의 조각들이 천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 설마… 아고르를 토벌한 건⎯.”
그녀가 입을 떼려던 찰나에.
똑, 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학원장실에 스몄다. 메디아는 검제의 얼굴과 문을 번갈아 보았다. 고운 턱선에 끝에 뭉쳤던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벌컥.
누군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학원장실에 들어섰다.
“맞네.”
검제는 초연한 미소로 뒤늦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