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6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68화(68/300)
68화 검제 지크프리트 (3)
학원장실에 들어왔을 때, 나를 반긴 것은 어색한 침묵이었다.
검제와 학원장이 원형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서 나를 응시했다. 메디아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검제는 느긋하게 차만 마시고 있었다.
적막한 긴장감이 벽면에 스몄다. 심상치 않은 공기를 감지한 난 떨떠름하게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침과 분침은 정확히 정오를 가리켰다.
“…제가 너무 빨리 왔나요?”
“어, 어? 아, 아니야! 시간 맞춰 잘 왔네.”
눈썹께을 긁적거리며 말을 내뱉자, 메디아는 급하게 당황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손수 의자 하나를 내어 주며 앉으라 손짓했다.
‘뭔가 이상한데.’
나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여러 의문이 일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심각한 이야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좀 지나, 학원장실의 공기가 얼추 환기되자 검제의 찻잔이 받침에 탁, 하고 놓였다. 그는 이어서 팔짱을 끼려다 팔이 하나임을 자각하곤, 수더분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 좀 적응됐나 싶었는데, 역시 칠십 년을 양팔로 살아오다 갑자기 외팔이 되니 까먹곤 하구만! 종종 변기 물 내릴 때도 헷갈리곤 하지, 하하!”
“…….”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농 섞인 말투였다. 그러나 나는 의례상 미소조차 지어 줄 수 없었다. 왜냐면, 그는 나를 감싸다 이리된 것이니까.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내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맴돌자 메디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얌마, 넌 농담을 해도 무슨 그런 농담을 하니? 검마 당황한 거 안 보여? 그리고 평소에 체통, 체통 하는 인간이 변기 물이 뭐니, 변기 물이.”
“메디아, 너는 유머 감각이 부족하군. 젊은 층 사이에선 이런 블랙 유머가 유행이란 걸 모르나? 젊은이들과 같이 지내는 교육자가 돼서, 끌끌.”
“하, 블랙 유머는 지랄. 너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다, 이 틀딱아.”
“크흠!”
둘 사이에서 격 없는 실랑이가 오갔다. 그녀는 온연해진 검제의 태도가 아직은 낯선 모양이다.
메디아는 이마를 감싸며 깊은 한숨을 푹, 흘렸다. 뒤이어 그녀의 눈길이 내게 머물렀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머뭇거리며 좀처럼 열지 않았다.
메디아는 입가를 쓸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방금 지크한테 들었어. 검마, 네가 5군단장 아고르를 토벌했다고…….”
“…아.”
나는 뭐라 답할지 몰라 생각을 골랐다.
정황만 놓고 본다면 사실이지만 그때의 감각이 몽연한 내 입장에선 선뜻 긍정하기 힘들다.
기억은 분명하다.
다만, 감각이 어렴풋하니 정황을 말하기 망설여졌다. 나조차 납득이 안 가는 걸 남한테 설명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았다.
내가 침음을 흘리자 메디아는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 미안해, 검마야! 나도 참,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애한테 한다는 말이……. 나도 많이 당황했나 봐. 너도 아직 충격이 미처 가시지 않았을 텐데.”
무척이나 미안함이 그득한 표정이다. 사건의 당사자인 나 역시도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메디아의 반응이 일견 이해가 갔다. 나는 잡념을 걷어 내고, 의젓한 어조로 화답했다.
“괜찮습니다.”
내 반응에 메디아는 한차례 눈을 껌벅였다. 그리곤 다소 진정됐는지 경직됐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녀는 검제를 눈짓하고서 흐릿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크, 쟤가 그런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닐뿐더러, 검마 너도 이러니……. 후, 사실 아직도 믿기진 않아. 아, 물론 너를 못 믿는다는 소리가 아니야, 검마야! 그냥 머리가 뒤숭숭해서 그런 거지.”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지.”
묵직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검제가 목청에 힘을 주었다.
“물론 아고르 토벌 당시에 나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강검마 단신의 활약상이었네.”
검제는 홍차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는 기치를 이어 갔다.
“오늘에서야 메디아 네게 아발론 섬에서 있었던 일을 밝힌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메디아. 하지만 잠시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네.”
“무슨 의미야?”
굳센 심지가 깃든 금안에 메디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지금쯤이면 마족 측에서도 이변을 느꼈을 걸세. 메디아, 너라면 알 테지, 현 인류 중 군단장급 마인을 막아설 수 있는 영웅은 없다는 걸. 아고르가 어떻게 인세에 침입했는진 모르나, 그것은 분명한 목적성을 띄고 있었어. 마치 무언가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듯 말이야.”
메디아는 침을 꼴깍이며 경청했다. 고운 피부를 타고 땀방울이 맺혔다.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잠자코 있으면 정세는 더욱 악화할 걸세. 마족은 참을성이 없는 족속이야. 기본적으로 본능에 이끌려 행동하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영악한 지성과 힘을 가졌네. 그들이 이번 일을 눈치챌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검제는 이야기에 텀을 뒀다. 잠깐의 정적 때문에 분위기가 더욱 엄숙했다.
“…추측건대, 수년 안에 그들과 마찰이 일 거다. 반세기 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
조용히 듣던 메디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녀는 신음을 삼키려는 듯,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검제의 말엔 요목조목한 이치가 담겨 있다. 만약 그 일 이후, 검제가 경거망동했다면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몰랐을 터다.
‘아고르의 토벌 사실을 밝혔다간, 마족들이 그걸 명분 삼아 선전 포고 할 가능성도 있다. 그나마 검제가 입조심을 해서 저들도 별다른 반응을 못 하고 있는 거겠지.’
날카로운 통찰력은 혜안과도 같았다.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언행을 보인 것은 메디아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한 의도일 터다.
상시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이지만 수십 년을 같이해 온 전우기에 속내를 헤아릴 수 있는 것. 나는 검제의 심오한 속내에 내심 감탄했다.
인류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가 비단 무력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 그리고 사실 오늘 이 자리에 강검마 자네와 학원장을 모은 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네.”
검제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허전해진 왼팔을 한 번 쓸어 만지자 소매가 힘없이 일렁거렸다. 검제는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난 이제 더 이상 전선에 나설 수 없는 몸이 되었네. 이제 와선 내가 내게 주어진 그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거야.”
검제의 말투는 초연했다. 그러자 메디아가 눈살을 와락 구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지크! 너 갑자기 왜 이러는데! 팔 하나 없어졌다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할래!?”
“팔 하나 없어졌다고 아쉬운 건 하나도 없네. 오히려 잃었기에 얻는 것이 있었지. 그 부분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하네. 신의 은총이나 다름없지.”
검제는 내게 노건한 미소를 짓고서 도로 시선을 옮겼다.
“하나, 장차 있을 문제들엔 인류의 존속이 걸렸어. 언제까지고 나 같은 늙은이가 둥지를 틀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야.”
검제는 메디아를 마주하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더 나은 시대를 물려주기 위해, 올곧은 영웅을 육성하다.’”
시종의 영웅이 아카데미 창립 당시 새겼던 표어의 내용이었다.
“메디아, 네가 학원장을 맡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
이내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꾹꾹 눌러 낸다. 그녀는 휙 등을 돌려 버렸다. 검제는 설핏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나는 조만간에 칠성 영웅직을 내려놓겠네.”
“검제님!”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나는 흠칫 놀라 일어섰다. 메디아는 뒤돈 채로 말없이 어깨만 잘게 떨었다.
“진정하게, 생도 강검마, 갑작스러운 노인의 변덕은 아니니. 자네가 입원한 이 주 동안 작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야. 그리고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나겠단 소리가 아닐세.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뜻이지.”
그 말에 메디아는 고개를 반만 슬쩍 돌렸다.
“…전 세계 언론사에서 지크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뭐, 어차피 근시일 내에 인터뷰에 응할 참이었네. 이참에 몰아서 하는 게 시간 절약하고 좋지 않겠나.”
못 당하겠다는 듯, 메디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우, 너는 어쩌면 나이를 먹고도 오십 년 전이랑 그렇게 똑같니!”
“젊게 산다는 증거 아니겠나, 하하!”
“얌마!”
침체됐던 분위기에 활력이 맴돌았다. 그 장면에 나도 모르게, 기분 좋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새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난 정사의 비틀림만을 막고자, 안간힘을 써 왔다. ‘기적의 가호 M’, 작중 인물들이 변칙적인 행동을 보이면 진땀을 뻘뻘 흘렸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었다.
이들은 일개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닌, 자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말과 행동엔 의지가 깃들어 있다. 이제 그들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상황에 맞게 타파해 나가자.
‘두 눈을 가리고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젖먹이의 어리광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굳힐 무렵이었다.
앙금 없는 말다툼을 하던 와중, 지크프리트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바라본다.
“아, 가장 중요한 말을 까먹을 뻔했군.”
“오늘 들은 것만 해도 수명이 줄어들 것 같은데, 또 뭔 말을 하려고, 이 노친네야!?”
메디아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녀로선 충격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반면, 검제는 차분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의 홍채는 정오의 태양처럼 황옥색으로 반짝였다.
“생도 강검마.”
메디아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은 오로지 내게 꽂혀 있었다.
검제는 한 차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내 칠성 영웅 자리를 자네에게 승계하겠네.”
““…….””
쌉싸름한 정적이 흘렀다. 내 입이 열릴 때까지.
“네?”
* * *
메디아는 멍하니 문을 쳐다봤다. 지크와 검마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
학원장실에 태풍이 휘몰아치고 간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아 후두부가 얼얼할 지경이다.
메디아는 학원장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한낮의 햇살만이 따사롭게 창틀에 스며들었다.
“하.”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메디아는 깍지 낀 두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는 복잡한 상념들을 입으로 꺼내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야만, 뇌리를 맴도는 충격들이 정리가 될 것 같았다.
“일단 마족 측 반응을 살피고, 언론사들이 지크한테 요청한 인터뷰들도 승낙해야 하고……. 무엇보다⎯”
지크가 마무리 짓듯 쐐기 박은 말.
“칠성 영웅을 승계한다니…….”
메디아는 소파에 등을 깊게 묻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고 몸이 반쯤 잠겼다. 검제가 나가기 직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닐세, 준비하는 데만 족히 일 년은 걸릴 테니. 적어도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은 학원 생활을 즐겨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틀딱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순간, 정수리까지 치솟는 빡침에 그녀는 벌컥, 상체를 곧추세웠다.
“노망난 노친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검제의 심중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칠성 영웅에 공석이 생길 시, 영웅 사회에는 파란이 인다. 자칫하면 마족과 외교적인 문제에서 마찰을 빚을 수 있을 정도로.
칠성 영웅의 위명은 인류의 희망이란 상징성에 있다.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나, 그 이상의 명예와 부귀가 따른다.
‘절궁의 지위를 넘겨받고 40년간 종신 총리를 지내는 코지마 녀석만 봐도.’
그렇기에 그 상징성과 자리를 노린 자들이 승냥이처럼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검제가 직접 지명하고 후견인을 자처한다면, 이견은 있겠으나 나서서 반대는 못 할 것이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문제지.’
당장에 절차를 밟는다 해도, 족히 절차만 일 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나머지 칠성 영웅들과 영웅 협회의 동의를 따내야 하니까.
“동창회라도 하게 생겼네.”
검제와는 친하게 지내지만, 나머지 두 명과는 서먹한 관계였다. 그들이 검제에게 동조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다.
히키코모리인 검제와 달리, 창성과 절궁의 입김은 막강하다. 둘이 제동을 걸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아이고, 머리야.”
메디아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재차 몸을 파묻었다.
‘우리 검마…….’
아직 열일곱인 소년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게 아닐까. 마음 같아선 그녀 자신이 나서서 따지고 싶었지만.
‘검마만큼 칠성 영웅에 어울리는 인물도 드물다.’
강검마가 걷고 있는 행보는 충격을 넘어섰다.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이 넝쿨처럼 뒤엉켜 공표는 못 하고 있지만, 그간의 일이 밝혀지면 말 그대로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하늘에서 춤추듯 내려온 천재. 강검마는 전설의 영역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발로르 호아킨.”
선홍색 입술 사이로 불현듯, 시조의 영웅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메디아는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었다. 녹발이 햇살을 받아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
생각이 소강되자 탈력감이 몸에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강검마의 부탁이 뇌리를 스쳤다.
“본인 인적 사항 조사를 해 달라니, 묘한 부탁이네. 뭐, 부탁한 이유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