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7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74화(74/300)
74화 전국 제일의 칼잡이 (3)
오랜만에 힘이 너무 들어갔던 것 같다.
“후.”
데워진 몸을 식힐 겸,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다듬었다.
몰려오는 극심한 피로에 손가락 마디가 저렸다. 나는 가게 앞에 비치된 벤치에 등을 깊게 기댄 뒤, 중얼거렸다.
“…나란 새끼도, 참.”
오랜만에 제대로 칼질을 해 볼 판이 깔린 덕일까.
1분도 채 안 되는 찰나에 생선만 세 마리를 회 쳤다.
쉽게 말하자면, 20초 안에 내장 제거, 석 장 뜨기, 회 뜨기를 한 셈.
속도도 속도지만, 결국 음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맛. 민활한 칼 동작으로 생선의 선도를 살려 낸다.
그 결과, 손님들의 무수한 찬사와 악수 요청을 받아 내다 지쳐,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죽었던 생선을 되살려 냈다며, 나를 메시아라 불렀더랬지.
“의미가 극찬인 건 알겠지만…….”
나는 설핏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손맛이 좋다.
지금 이 감각이라면 눈감고 쌀 한 톨도 벨 수 있으리라.
맨날 마수나 사람 같은 불쾌한 것들만 썰어 대다, 생선을 잡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재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해 보니 금방 손에 익었다. 오히려 전성기를 갱신하지 않았나 싶다.
“졸업하고 진짜 횟집이나 차릴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 돌려 누군지 확인했다. 뜻밖의 인물, 녹스였다.
“어, 뭐야. 바쁜 거 아니었어?”
“음식은 검마 네 덕에 다 나갔다. 마무리는 사장님이 짓겠다더군. 서빙은 네 친구가 봐주고 있다. 나는 클로이가 네게 가 보라 해서 나왔을 뿐이다.”
녹스는 그리 말하며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머리에 동여맨 두건을 풀더니 머리를 흔들어 땀을 털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녹스는 땀으로 젖은 것과 별개로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예의 탁했던 동공에는 이제 이채가 머물러 있었다.
‘왠지 뿌듯하네.’
내가 빤히 쳐다보자 녹스는 두건으로 땀을 닦다 말고, 흠칫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말투는 여전히 사극 톤으로 딱딱하다. 하지만 적의는 완연히 걷힌 목소리였다.
“그건 그렇고, 넌 갑자기 무슨 알바를 하냐?”
“…강검마, 네가 말하지 않았나. 땀 흘려 일하다 보면 얻는 것이 있을 거라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곧 내가 했던 말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맞다. 그런 말을 했었지.”
“너 설마 기억이 안 나는 거냐?”
어이없어하며 묻는 녹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연히 기억나지. 자식,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네.”
녹스는 뻘쭘하게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입꼬리가 눈에 보일 정도로 씰룩였다. 내 시선이 느껴지는지, 녀석은 흐릿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흠, 흠. 강검마, 네 말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얻는 게 있더군.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값짐을 알았다.”
“거, 다행이네.”
녹스의 말이 전보다 많았다. 그는 내게 일에 관련해 여러 질문을 던졌다. 꽤나 적극적인 태도에 나도 성심껏 화답했다.
대부분이 일하다 겪은 소소한 경험담이었다. 그러나 녹스는 귀를 세우며 집중했다.
“난 아직도 네가 나와 같은 또래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너, 혹시 나이를 속이고 그런 건 아니겠지?”
“…그냥 사회 경험 많다고 말하면 덧나냐.”
그리 말하자 녹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이야기가 얼추 끝난 것 같아 일어서려던 순간.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 나는 엉덩이를 도로 붙였다.
그는 입술을 한 차례 달싹이다 말을 이어 갔다.
“원래라면 가문의 일을 외부에 발설하는 것은 큰 중죄다. 그래서 클로이를 통해 전달하려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더군.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녹스는 길게 숨을 집어삼켰다. 결의를 삼킨 동공은 흔들림 없이 잔잔했다.
“아디토레에서 네 조사가 끝났다. 다행히, 의심되는 정황은 없더군. 따라서 아카데미 원로단이 사주한 의뢰는 우리 선에서 취소했다. 오히려 당주님께선 역으로 원로단의 조사를 시작하셨지. 의뢰의 날조는 우리로선 기만이니까. 아디토레는 그들의 사냥개가 아닌, 엄연히 질서를 위한 집단이니.”
조용히 경청했다. 짐짓 심각한 내용이었다.
녹스는 미간을 세우며 재차 입을 뗐다.
“아마 역대 규모의 조사단이 꾸려질 거다. 대상이 대상인만큼 철저하게 이루어지겠지. 물론 나도 그 조사단에 손을 보태기로 했다. 이야기가 길어졌군. 아무튼, 이 말을 전해 주고 싶었다.”
“…….”
말끝과 함께 나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했다. 결론은 아디토레가 내 목을 노릴 일은 없다는 것. 아디토레가 원로단의 권력에 굴복할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던, 귀찮았던 일 하나가 해결된 듯하다.
뭐, 아디토레가 원로단을 조사한다는 더 큰 규모의 사건이 벌어질 테지만.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까. 상념을 마친 난 녹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말해 주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잠시 내 손을 빤히 응시하다 이내 맞잡았다.
“내가 한 일은 딱히 없다. 오히려 내 쪽에서 고…….”
녹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조금 전까지, 가게 안에서 클로이와 녹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매라 그런지, 합이 척척 맞는 것이 서빙과 주문을 금방금방 받아 냈다.
‘클로이랑 사이가 조금은 개선된 모양이네.’
나는 소리 없이 웃고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는 민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떨궜다. 뒤이어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난 먼저 들어간다. 더 쉬었다 들어와 ̄ 아, 맞다.”
가게 문을 반쯤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돌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초장부터 존칭을 붙이진 않았다만, 녹스는 내 위 학년 선배다.
게다가 아디토레 가문의 일원으로서 범 클래스에 속해 있다. 나는 뇌리를 떠도는 의문을 이참에 덜어 낼 겸 입을 열었다.
“녹스, 너 하나 선배 아냐?”
“산하나 말하는 건가?”
녹스는 어슴푸레하게 되물었다. 나는 끄덕여 긍정하고서 말을 더했다.
“어, 이번에 우리 동아리에 들어온 게 하나 선배거든. 아무래도 녹스 너랑 같은 클래스니까 알까 싶어서.”
“네가 남한테 관심을 두다니 별일이군.”
“…너한테 난 그런 이미지냐.”
“지금껏 봐 왔던 넌 그다지 남을 살피지 않는 편인 것 같아서 말이다. ‘이기적이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뭐랄까, 혼자 다른 곳에서 온 그런 느낌이다.”
순간 뜨끔했다. 작은 치부가 들춰진 듯한 기분이다. 그걸 몇 번 보지 않은 녹스에게 들켰다는 것이, 나로선 썩 어색한 일이었다.
‘암살자 출신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군.’
아니면 나를 조사했을 무렵, 위화감을 느낀 것이겠지.
강검마, 그러니까 나에 대한 과거는 깔끔히 말소되어 있다.
아디토레의 정보력으로 그 부분을 놓칠 리는 없었을 터다.
조금 전부터 의문부호가 떠오른 얼굴로 나를 응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내가 애써 기색을 숨기니 녹스로서도 묻지 못하는 거고.
그래도 입이 근질거리는지 녀석은 나를 흘깃한다.
잠깐의 정적. 미묘한 기류를 먼저 끊은 건 녹스의 음성이었다.
“어쨌든, 산하나는 같은 클래스이니 알고 있다. 클래스 내에서도 조용히 책만 읽는, 큰 특색 없는 여생도지.”
“특색은 없어도, 사람마다 특이사항은 있을 거 아니야. 그런 건 없어?”
그리 묻자 녹스는 턱을 매만지며 골몰히 생각했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흐음, 그래도 네가 물어서 좀 생각난 게 있다. 특이점일까 싶다만……. 산하나는 클래스에서 항상 중간점에 있는 생도다.”
“중간점? 그게 무슨 말인데.”
“말 그대로의 의미다. 필기, 실기, 실습, 훈련 등등 모든 분야에서 항상 중간등수에 있지.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기는 힘들 텐데 말이야.”
“그렇군.”
말하던 녹스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 외에는 더 말해 줄 게 없다는 몸짓이었다.
고개를 살짝 틀자 녹스와 눈이 마주쳤다.
의문이 낀 눈동자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대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다. 곧이어 녹스의 입술이 움직였다.
“…강검마, 너는⎯.”
하지만 나는 몸 방향을 홱- 틀었다. 여향으로 작은 밤바람이 불었다.
“아무튼, 말해 줘서 고맙다. 먼저 들어갈게.”
“…….”
고마운 것과 별개로 필요 이상으로 나에 대해 밝힐 이유는 없다.
냉대가 아닌 지극히 실리적인 판단. 입을 가볍게 놀려 위화감을 조성하고 싶지 않았다.
시선을 무시한 채 가게 문을 열었다. 얼큰한 알코올 향이 코끝을 휘감았다.
* * *
자정에 가까워져서야, 한국 초밥의 조명이 소등됐다.
부어라 마셔라 해 대던 손님들은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하나둘 가게를 벗어났다. 그중에서도 맨 처음으로 회를 시식한 노신사는 내 손을 연신 움켜쥐며 말했다.
“젊은이, 꼭 연락하게나. 내 섭섭지 않게 대하겠네.”
“아, 네. 시간 될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상체와 머리를 숙였다. 그제야 노신사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광이 번들거리는 검은색 세단은 그의 금력을 얼추 짐작게 했다.
소란 통이 가시자 사장 만수르가 먼저 다가왔다.
“스승님, 오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답례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걸 받아 주십쇼.”
그는 잘 손질된 사시미 한 자루를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미간을 찡그리면서 낮게 말했다.
“칼잡이한테 칼은 생명입니다. 그걸 남에게 이리 쉽게 넘겨도 됩니까, 사장님.”
만수르는 의표가 찔렸는지, 손사래 치며 입을 열었다.
“아, 아,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스승님. 다른 뜻이 아니라, 이 칼은 제 분에 맞지 않아서 말입니다. 항상 칼만 갈고 닦았지만, 스승님을 만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고수는 장비보다 자신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만수르는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을 곱씹었다. 그는 겸양 있는 태도로 두 손으로 칼을 들이밀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서, 끄덕였다.
“뭐, 그런 의미라면 마다하진 않겠습니다.”
그리 말하자 만수르는 허리를 여러 번 접었다 폈다. 눈망울이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했다.
“아, 제 칼을 받아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스승님!”
“…그, 스승님이란 호칭은 어떻게 안 됩니까.”
“어휴, 스승님을 만남으로써 칼밥 인생을 다시 시작했는데. 어버이로 모셔도 모자랄 판에⎯.”
“그냥 원래대로 부르시죠.”
주접이 과한 스타일은 언제나 피곤하다.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린 뒤, 시선을 사시미에 두었다.
칼날에선 빛이 흐르는 것이 누가 봐도 고가의 물건이다. 오히려 만듦새로만 보자면 무장에 가까웠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칼잡이는 좋은 칼을 갈망하기에. 나는 헛기침을 하고서 칼자루를 쥐었다.
“흐음, 흠.”
조금 전까지, 열심히 회를 친 칼이다. 근데 내 것이라 생각하니 감각이 생경하다.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잡자 첫 스승님이 떠올랐다. 그는 칼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내였다.
‘나한텐 고수는 장비탓 하지 않는다, 열심히 떠들어 놓고선.’
스승님은 어디에서 번쩍번쩍한 회칼을 구해 오면, 꼭 이름을 붙여 주었다. 당시에 내 물음에 그는 이리 대꾸했다.
― 좋은 칼은 요리사의 분신과 같은 것. 이름을 붙이면 그자의 각오가 실리는 법이다.
그리 멋들어지게 말하며 회칼에 ‘지존 사시미 머신’ 따위의 작명을 했더랬지.
그때는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었지만…….
“저기, 스승님. 무슨 일입니까? 혹시 칼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닙니다. 그냥 붙여 줄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는데, 역시 스승님은 다르십니다.”
만수르는 입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나는 쓰게 웃었지만, 한참을 혼자서 고민했다. 뇌리에 여러 낱말이 부유했다.
“…서리.”
문득 중얼거렸다. 이곳에 부모님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불현듯, 떠오른 단어는 강검마의 본관이었다. 마음을 굳히자 움켜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만년서리.”
나는 씩 미소를 지었다. 붙인 이름이 만족스러워서는 결코 아니고.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이 있듯, 스승님의 작명 센스를 힐난하던 자신을 반성했다.
더불어 강검마라는 이름을 지어 주신 이곳의 부모님께 속으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