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75)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75화(75/300)
75화 작당 (1)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천장을 보고 있자니, 새삼 아카데미의 시간이 빠름을 느낀다.
처음 입실했을 때는 새하얬는데 어느새 누렇게 생활의 흔적이 남았다.
이마 선을 따라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 밤에는 쌀쌀했던 초여름은 가시고 열대야의 무더위가 잠을 못 이루게 한다.
“하, 뭔 놈의 기숙사가 에어컨도 없어.”
나는 더운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몸 선을 따라 축축해진 침대보.
윗옷은 벗어 빨래통에 던졌다. 바구니에 골인한 천에서 철퍽- 하는 불쾌한 소리가 났다.
“덥다, 더워.”
밤새가 놀리듯 찌르르 울어 댔다. 소리가 두 개다. 야밤에 짝짓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나는 짧게 혀를 차고서, 책상 앞에 앉았다. 검지와 엄지 위에서 연필이 바람개비처럼 핑그르르 회전했다.
책상이 익숙해진 것이 이젠 영락없는 학생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가 중요한데.”
펼쳐진 공책에 적힌 낱말들. 짬짬이 생각의 파편들을 적어 놓았다.
『아카데미의 원로단. ☐』
『정체 모를 여교관. ☐』
——————-
『검의 신. ☐』
『G.M. ☐』
연필을 자주 놀리는 편이 아니라 그 수가 적었다. 그래도 요점만 간략히 있으니 보기에는 편했다.
나는 활자의 질감을 곱씹듯 천천히 눈을 움직였다. 중간에 쳐 놓은 점선은 사고를 분리시키는 경계다.
위는 현실, 아래는 꿈.
쿨하게 아래는 제낀다. 열대야에 잠도 포기한 시점에 추상적인 단어는 나중으로 미뤄 두기로 했다. 나는 시선을 도로 위로 올리고서 중얼거렸다.
“원로단은 아디토레에서 알아서 조사해 주기로 했지.”
같은 귀족들이라도 선민사상의 농도가 달랐다. 그 사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원로단이다. 그들 눈엔 질서의 가문 아디토레조차 일개 치들로 여길 터다.
하물며 별 명분도 없이 생도 하나를 죽여 달라? 자신들을 사냥개 취급한 것에 아디토레가 화가 뻗칠 만도 하다.
덕분에 난 의도치 않게 아디토레라는 조력을 얻었다.
“걔네만큼 든든한 아군도 또 없지.”
유저였던 난 아디토레와 척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다.
스토리 중후반부 즈음에 아디토레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경위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대충 기억을 더듬자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원로단이 주인공 레온에게 뒷공작을 펼치다 아디토레한테 딱 걸렸었나? 아무튼 그렇게 딱 한 번 그들이 그림자를 벗고 일선에 나선 적이 있었다.
처음에 원로단은 코웃음 쳤다.
손에 피를 묻히는 더러운 가문이 자신들을 감히 쑤실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했겠지.
그러나 질서를 위시하는 집단의 손속엔 위아래가 없었다. 결국엔 원로단을 넘어 그 밑의 귀족들까지 줄줄이 목이 잘렸다.
덕분에 후반부에 들어서 레온에게 제동을 거는 인간은 없었다. 권력의 수괴인 원로단이 숙청된 마당에 어떤 멍청이가 개기겠는가.
원로단이 아디토레에게 숙청되는 건 게임사가 점지한 나름의 사이다였다.
유저를 대변하는 레온이 사람의 피를 보는 것을 아디토레가 대신한다. 그런 게임사의 친절한 배려.
그리 생각하니 문득 심사가 뒤틀린다.
‘이, 씹. 나는 개고생 중인데.’
미간이 찌푸려진다. 푹푹 찌는 더위에 정수리가 뜨거웠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열을 털고서 연필을 끄적였다.
『아카데미의 원로단. ☑』
귀찮은 시름 하나가 덜어진 것에 만족하자. 아디토레가 나섰으니 진상은 금세 규명될 것이다. 배후가 누군지는 그때 돼서 알게 되겠지.
“남은 하나는…….”
『정체 모를 여교관. ☐』
원로단과 달리 밝혀진 내막이 전혀 없는 인물. 인상착의만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이 또한 정확하진 않다.
심증뿐이나 나는 그 여교관을 빌런이라 예단했다. 무인도 생존 훈련 이후로 윤곽이 잡혔다.
― 하여간, 징징대서 계약해 줬더니 그 녀석은 일을 이따위로 한단 말이지.
5군단장 아고르의 말이 그 방증이다.
여교관이 빌런이 맞는다면 마력으로 겉모습쯤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나, 그 요행에도 뚜렷한 한계는 있으니.
“성별과 눈동자 색은 바꿀 수 없지.”
마법이라 해도 외형의 가변성이 천변만화하진 못한다.
플레이를 통한 경험으로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다.
다행히 내가 기적의 가호 M을 접었던 시기가 첫 빌런이었던 레이 션의 등장 때와 맞물렸었기에 기억한다.
레이 션은 레온의 여자 지인으로 변장해 뒤통수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홍채 색이 다름을 간파당해 정체가 탄로 났었다.
“자색 눈동자에, 여자인 건 확실한데.”
그 수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가호의 감응력을 운용해 상대를 가늠하고 싶지만, 아직 내겐 마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마법 관련 개론서들을 뒤척일 생각도 없고 시간도 부족하다.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셨지만.
적을 알기 위해 터득해야 할 학문의 폭이 너무 방대하다. 이순신 장군께서도 마법이란 개념을 아셨다면 저 말씀을 철회하시지 않았을까?
“공부나 하자고 이 지랄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머릿속이 혼란하다.
‘그냥 아싸리 적이 올 때까지 대기 탈까?’
어쩌면 상대가 먼저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다. 요컨대 존버.
기다리다 보면 제 발 저려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늠키 힘든 상대다. 괜히 벌집을 들쑤셨다가 침에 쏘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오히려 선수를 치는 것보다, 때를 노리는 것이 경험과 객관으로 연단된 ‘어른식’ 일 처리니까.
“어쩐다.”
밤이 깊어 간다. 잡념의 무게에 머리가 무거웠다. 창 틈새로 달이 아련하게 빛났다.
콕, 콕.
나는 연필로 공책을 찌르며 정리했다.
사고의 연장선은 길게 늘어졌다.
뇌리에 하나 스칠 때면, 무의식이 점 하나를 그린다. 그렇게 빈 페이지가 희고 검은 점들로 채워졌다.
『◎●○●○●●○○●●○○○●』
사고를 정리한 흔적.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 문양인데.
찌르르를르르⎯!
열띤 새들의 쾌락성이 귓속에 내다 꽂혔다. 여름은 청춘 사업의 서막.
저 새 새끼들은 그에 일조하듯 성욕과 흥분에 차 울었다.
나는 실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짜증도 났지만, 덕분에 상념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체 모를 여교관. ☑』
연필을 한번 끄적이고서 공책 위로 툭 던졌다.
안착하지 못한 연필이 데구루루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내가 언제부터 연필을 굴렸다고.”
때를 기다리는 게 어른들이 말하는 현명한 방식이라지만. 지금의 내 몸엔 어린 피가 혈관 구석구석에 흐른다.
치기와 용기는 한 끗 차이. 지금은 용기를 돋울 차례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객들에게 허리를 접어 폴더 인사를 했으며, 싫은 소리도 태연자약하게 넘겨야만 했다.
그게 습관이 됐는지 이 세계에서마저 매사에 수동적인 태도를 내비친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먼저 두드려 볼 생각이다.
허를 찌르는 것. 판세를 뒤집어 볼 찬스다.
“조만간에 데미안 교수님을 찾아가 봐야겠네.”
가호학과 데미안 교수님. 일전에 궁금한 게 있으면 연구실로 찾아오라 했었지.
왠지 모르지만, 내게 썩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교수님이다.
부족한 지식에 보탬을 주겠지. 안 굴리는 머리로 고생하지 말고 전문가에게 의탁하자.
찌르르리리리릿⎯!
열락의 울음소리. 아까부터 쉴 새 없이 귀를 때린다.
“이 새 새끼들이 1절만 해야지.”
며칠 전, 만수르에게 받은 만년서리를 잡았다. 지은 이름 덕인지 일시에 무더위가 가시고 새소리가 뚝 끊겼다.
* * *
소리가 멎은 호아킨 아카데미의 새벽.
검은 후드를 푹 뒤집어쓴 열 명 남짓이 폐건물에 한데 모였다.
곰팡내 나는 으슥한 장소에서 수상하기 짝이 없는 밀회의 현장. 후드의 음영에 얼굴을 숨긴 이들이 원처럼 빙 둘러서 있었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눈자위들만이 움직였다.
흙이 덕지덕지 묻은 정원사, 교관복을 입은 자들부터, 교수가 입는 하얀색 가운까지. 그들은 말없이 복색으로 각자의 위장 신분만을 어림잡았다.
저벅저벅.
교수복을 입은 사내가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그는 한 차례 인원수를 훑더니 입을 열었다.
“모쪼록 다들 바쁘실 텐데, 어려운 자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편하게 ‘교수’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사내의 목소리엔 격조가 녹아 있다. 언뜻 타이르는 것처럼 들렸다.
“됐고. 교수 양반, 무슨 일인데 갑자기 호출하고 지랄이야?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다가 누구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댁이 책임 질 거유?”
후드 아래로 턱수염이 삐져나온 사내가 날카롭게 말했다. 다른 이들도 침묵으로 그의 말에 동조했다. 교수를 째려보는 시선들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교수가 폭소를 터뜨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공동에 탁한 메아리를 만들었다.
“야, 이 새끼야! 미쳤어?! 갑자기 웃고 지랄이야!”
턱수염 사내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음영 진 얼굴에서 살의가 번뜩였다.
빌런은 인간성을 팔아넘긴 존재들. 진즉에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까먹었다.
그는 곧장 소매를 걷어붙이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팔 근육에 날카로운 돌 가시들이 돋아났다.
“갑자기 불러 놓고는 낄낄 쳐 웃어? 오냐, 안 그래도 손이 건조했는데. 간만에 피나 묻혀 보자, 씨팔!”
기세가 살벌하다. 강타 한 번이면 전신에 바람구멍이 여럿 뚫릴 터다. 하지만 교수는 턱을 쓸며 관찰했다.
“호오- 4군단장 퍼머쉬 님의 심복이시군요, 지(地) 속성 마법은 아무래도 흔치 않은데. 하지만 우둔하군요. 이참에 제 표본이 되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세요.”
교수가 능청스레 웃었다. 나머지는 상황을 지켜보려는 듯 관망했다.
“뭐라는 거야, 교수 코스프레 새끼가!”
콰앙⎯!
턱수염 사내가 발을 구르자 바닥이 터졌다. 튀겨진 파편이 자석처럼 그의 몸에 둘렸다.
‘저 새끼의 마법이 뭔진 모르겠다만.’
돌 투구 사이로 눈을 좁혔다. 교수의 태도가 너무나 여유로웠다. 하지만 사내는 자신 있었다.
‘최선의 방어는 절대적인 공격이지.’
한낱 돌덩이라도 지 속성 마법과 맞물린다면, 다이아몬드의 경도에 버금간다.
머릿속으로 대략적인 계산은 끝났다.
‘그냥 들이받는다.’
굉음이 일겠지만, 누군가 들이닥친다 해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되는 일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단순하게. 충동과 자극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것이, 빌런의 방식이다.
사내의 발이 재차 땅을 파냈다.
콰과과광⎯!
사내가 파공성과 함께 잔해를 쓸며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흙바람에 몇몇의 후드가 펄럭였다. 그들은 멀찍이 거리를 벌렸다.
“상판에 바람구멍을 내 주마⎯!”
참으로 악당다운 대사와 함께 그가 교수를 들이박는다. 가시가 총총하게 둘린 주먹이 지근거리에 닿았다.
이윽고 교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검붉게 일렁이는 동공과 비릿한 미소. 그것이 사내가 이승에서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팡!
간결한 파공음. 곧이어 턱수염 사내의 육신이 힘없이 미끄러졌다.
지켜보던 눈들이 휘둥그레 커졌다. 한순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가셨다.
쿵- 하는 소음과 함께. 머리통이 있어야 할 어깨 위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다.
“후.”
교수는 호흡을 다듬었다. 이어서 참상의 목격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대뜸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상황에 맞지 않는 격식이었다.
“자기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본론을 말할까 하는데, 다들 동의하십니까?”
그 말에 일동은 침묵했다. 불쾌함이 입매에 드러났지만,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교수가 보인 마법으로 하여금 공통된 이름을 떠올렸다.
‘2군단장, 쿠아른.’
등골에 전원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교수가 입꼬리에 비릿한 호선을 머금었다.
“이해력이 좋으셔서 다행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다들 아시겠지만, 5군단장 아고르 님의 서거 때문입니다.”
그가 표정을 굳히며 교관복을 입은 여인에게 손짓했다.
“나와 주세요, 생도, 아니 교관님. 교편을 오래 잡다 보니 생도 소리가 입에 뱄군요. 아무튼, 자세한 사정은 저분이 설명 해 주실 겁니다.”
그리 말하곤, 교수는 여교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정중앙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의 입이 바로 열렸다.
“…요점만 딱 말하겠습니다.”
바라보는 눈빛엔 날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반쯤 체념한 기색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세간의 소식과 달리, 제 주군은 검제에게 죽지 않았습니다.”
“…….”
그녀는 시선은 교수에게 머물러 있었다. 등을 벽에 기댄 교수가 작게 끄덕였다.
“아고르 님은 한 생도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름은⎯.”
여교관은 뜸을 들였다. 말의 여백이 묵직하다.
“⎯레온 반 라인하르트, 차기 용사입니다.”
교수가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