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8)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8화(8/300)
8화 엑스트라는 살고 싶다 (1)
“우움…….”
클로이는 햄스터처럼 반쯤 뜬 눈을 비볐다.
“응? 검마 군은 어디 갔지?”
잠시 기절한 사이에 검마 군은 사라진 모양이다.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오던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던 중 클로이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설거지를 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단절된 듯 뚝 끊겼다.
분명 강검마가 창가에 걸터앉아 있는 걸 설거지하면서 살금살금 구경했던 건 기억나는데…….
싸늘한 냉기만 가득했던 집안 사람들과 달리,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몸을 던져 준 사람. 그를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다.
욱신거리는 후두부를 살살 주무르던 중, 클로이는 반사적으로 카타나를 찾았다. 먼젓번처럼 흰 벽에 기대고 있는 칼몸.
그녀는 작게 솟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안의 사람들에게 잠꼬대가 좀 심한 편이란 말을 종종 들었기에 내심 불안했는데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던 모양이다.
언제부터였을까, 혹독한 아디토레식 암살 훈련 때문인지 이따금 그녀도 모르게 정신을 잃을 때가 자주 있었다.
어째서인지 항상 정신을 잃고 난 직후, 아디토레의 가문 사람들은 평상시와 달리 클로이를 만족스럽다는 듯한 태도로 대했다.
아디토레의 가문 사람들은 그녀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지만.
본연의 자신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되도록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덤으로 그때마다 자신을 향하는 가문의 고무적인 시선에 불안 섞인 찝찝함이 속 깊은 곳에 겹겹이 가라앉았다.
“클로이! 이 바보, 멍청이! 왜 그 타이밍에 기절해서!”
잡념을 마치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이내 클로이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투닥투닥 두드리며 자신을 타박하며 중얼거렸다.
“검마군…….”
그녀는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종종 기억을 잃을 때는 있었지만, 그게 하필 검마 군과 함께한 시간이라니.
그러다 불현듯 평소와는 다른 위화감에 빼꼼 고개만 살짝 들었다. 뭐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클로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나 주변을 살폈다. 몇 없는 가구들도 그대로고 굳이 달라진 게 있다면 바닥에 커터 칼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클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제야 클로이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귀밑까지 오던 머리카락이 짧아졌다. 손으로 더듬어 보니 옆머리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짧게 쳐져 있었다.
클로이는 우두커니 서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머리도 기분전환 삼아 자른 모양이다.
‘커터 칼은 그때 쓴 건가?’
쓰레기통에 머리카락이 버려져 있는 걸 보니, 그 와중에도 검마 군이 청소해 주고 간 모양이었다.
“검마 군도 참, 너무 상냥하다니까.”
혹시 기억을 잃었을 때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말끝이 흐려진다. 부끄러운 마음에 뺨이 더 빨개졌다.
손을 가슴에 모아 작게 도리질한 후 클로이는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귓바퀴 뒤로 머리를 넘겨 보자 부스스했던 머리칼보다 한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조그마한 고사리손이 펜을 끄적끄적 움직였다.
『검마 군, 사랑해.』
소녀다운 수줍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 * *
입을 틀어막고 기숙사 밖으로 달려 나온 후 건물의 벽을 짚었다.
“우우- 욱―”
속이 뒤틀리고, 시신경을 쥐어짜는 듯한 격통에 기분 좋게 먹었던 저녁 식사를 전부 게워 냈다.
9초에서 딱 5초를 넘겼는데 이 모양이다.
나는 적당히 속을 게워 낸 뒤 눈앞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해 보니 이 벤치는 내가 처음으로 ‘검신의 가호’를 발현했던 곳이었다. 묘하게 불안감이 들어 나는 팔로 목을 받치고 눕듯 등을 기댔다.
풀벌레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격앙됐던 심장이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나는 피곤함을 추스르며 눈을 반쯤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클로이, 걘 대체 뭐지?’
일반적으로 검술은 상대의 목숨을 단칼에 끊거나,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클로이가 부리는 검은 집요하게 급소만을 찔러 왔다.
전면전이 아닌, 마치 암습에 특화된 듯한 연격. 다시 생각해도 용케도 그 속공을 잘 흘렸다 싶었다. 오밤중에 기습당했다면 영락없이 목이 따인 건 나였으리라.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노렸다. 다행히 칼이 짧아서 머리카락을 베는 것에서 그칠 수 있었다.
‘뒷정리 정도는 하고 나왔으니까, 뒷말은 없겠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주간 벌어진 일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니, 내가 얼마나 정신 나간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말았는지 실감이 난다. 애써 현실을 부정해 보려 했지만,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의 변수는 생사가 걸린 것임을.
‘평이, 무탈, 안전.’
나는 입학식 때 스스로 세운 방침들을 중얼거렸다.
평범하기가 가장 힘들다는 말이 있었지만, 도를 벗어난 비현실은 피부를 따갑게 꼬집었다.
사실 처음 이 파렴치한 게임에 내던져졌을 때도 야망이 없던 건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사시미 하나로 정점에 군림해 본 나에게 사나이의 낭만을 떨치는 건 쉬운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개인마다 맡은 배역이 있는 법이다.
‘기적의 가호.’
게임의 이름이자, 아직 마주친 적 없는 이 세계 주인공의 고유 가호.
시조의 영웅, 발로르 호아킨의 가호와 더불어 게임에 딱 두 개 있던 전설급 가호였던 걸로 기억한다.
가호의 문구는 내 것과 마찬가지로 간결했지만, 그 내용은 지극히 직관적이었다.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구해 주세요.’
무엇보다 주인공은 성검인 동시에 마검인 ‘발뭉’에게 선택받는다.
그에 반해 나는 쇠젓가락만 한 사시미밖에 못 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손아귀에 바짝 힘을 줘 뺨을 짝짝 때렸다. 어려서부터 정신을 차려야 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여러 가지 비현실적인 일뿐이었다. 한국이 배경인 게임이었기에 안일하게 생각했던 탓일까.
입학식 때 세운 삼 신조를 관철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유약한 나 자신을 버려야 한다.
나는 착잡함도 환기할 겸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몸을 서서히 일으켜 벤치에 등을 기대앉아 느긋하게 밤하늘을 쳐다봤다.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거리는 별 무리.
지구에서는 볼 수 없던 생경한 밤하늘이었다. 금빛 실을 그리며 떨어지는 혜성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내일은 도서관을 가 봐야겠네.’
게임 내 중요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이 세계 자체에 대한 내 이해도가 상당히 뒤처져 있다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벌써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일주일 남짓이다. 스토리상 슬슬 주인공이 가호를 발현하고 뒤늦게 입학 수속을 밟고 있을 타이밍.
나름대로 준비해 놔야,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다. 대략적인 서사의 줄기는 알고 있다.
물론 최후반부의 일까지 알고 있다면 좋았겠다 만.
더 이상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도 중반까지 스토리의 ‘정사’를 파악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메리트였다.
뭐가 되었든, ‘정사’를 따라가자. 온갖 것들에 연관된다면 그나마 있는 메리트마저 스스로 차 버리는 꼴이니까.
문득 게임 시나리오의 중반까지만 플레이하고 접었던 이유를 떠올렸다. 발랄한 아카데미 생활의 종막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십 대 시절 누려 보지 못했던 청춘 라이프의 아기자기함을 추구했던 나는 그 부분에서 흥미가 식어 과감히 게임을 지웠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3학년 막 학기를 기점으로 스토리는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용사의 탄생을 눈치챈 마족들은 군단장을 필두로 세력을 단합해 준동하고 아카데미를 위협한다. 결국 스케일은 점점 장대해져 마족과 인류 간의 세계 대전이라는 전형적인 양판소식 줄거리가 됐다.
다만, 막상 인세의 지옥도가 내가 사는 세계에 펼쳐진다 생각하니 소름이 빠르게 전신을 훑었다.
나는 상념을 떨치려 거의 흔들다시피 머리를 헝클었다.
아직 3년에 가까운 유예기간이 있다. 내게는 현실 도피적인 삼 신조보다 현실적인 목표가 필요했다.
강해져서 살아남는 것.
어차피 양산형 게임들의 서사는 대개 해피 엔딩이고, 세상은 주인공이 구해 줄 터. 괜한 영웅 심리에 휘둘려 명을 재촉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주인공처럼 세상을 구하는 고결한 강함이 아닌, 내 한 몸 건사하기 위한 힘이 필요하다. 언제 쓸려 버릴지 모를 가을 낙엽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스스로를 단련하자. 혹여 눈에 띄기라도 하면 차출당해 마족들과 싸우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불상사는 극구 사양이다.
또한 ‘검신의 가호’라는 극단적인 특성은 양날의 검으로 다가올 염려가 있었으니 사용에 절제가 필요해 보였다.
항상 필요에 의해서 사시미를 잡았지만, 가뜩이나 잘 먹지도 못하는 몸이 서서히 붕괴하는 게 느껴졌다.
‘분명 성능은 확실한 것 같은데…….’
나는 ‘상태창’을 띄웠다.
파앗―
== ==
[검신(劍神)의 가호]베면 잘릴 것입니다.
◎육신(肉身)의 격 : 2 ▷ 검(劍)의 규격이 완화됩니다.
◎정신(精神)의 격 : 3 ▷ 말과 행동에 위압감이 깃듭니다.
◎무장(武裝)의 격 : 1 ▷ 해금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동화율 : 1.5%
★【???】
[※ 길이가 32센티 이하, 폭은 6센티 미만의 검일 때만 가호가 발동됩니다.]== ==
확연히 변해 있는 상태창의 메시지들. 다행히 이 세상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은 것 같다. 배경 인물이지만, 그래도 발버둥 치며 살아남아 보라는 식으로 성장적 요소를 부여한 게 아닐까.
나는 턱을 매만지며 상태창을 면밀히 살펴봤다.
아마도 저 육신, 정신, 무장 끝에 적힌 격이라는 건 일반적인 게임에서 말하는 레벨을 대체하는 개념일 것이다.
당연히 육신은 신체적인 성장일 거고, 정신은 조금 전 상황으로 비추어 봤을 때 기지 혹은 지성에 관련되는 듯하다. 마지막 무장은 말 그대로 무기의 성능.
문제는 하단에 적힌 동화율과 ‘???’라는 문구.
동화율은 상단의 문구들과 다르게 퍼센트가 적혀 있다. 옆에 한 자라도 적혀 있으면 유추라도 해 볼 텐데 별다른 설명도 없다. 게다가 1이나 2 둘 중 하나일 것이지 소수점일 건 또 뭐람.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내 호기심을 유발하는 건 꼴랑 물음표만 세 개 적혀 있는 문구였다. 손으로 연신 터치해 봐도 삑- 하는 신경질적인 알림음과 함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접근이 불가합니다.’라는 건조한 폰트만 망막에 떠오를 뿐이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머리를 굴렸다. 안 그래도 의문투성이인 가호인데, 또 다른 의문이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문신처럼 몸에 각인된 능력인 만큼, 알아 둘 필요성은 분명해 보였다.
다만, 아무런 정보도 없이 골머리를 싸매 봤자 가설 정도만 가지를 칠 뿐, 명쾌한 해답은 되지 못한다.
뭐,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일단 생존을 위해 신체는 필수로 단련해야 했고, 빠르게 이 세상에 녹아들기 위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운 좋게도 다음 달에 있을 중간고사를 대신하는 실전 토벌 훈련의 보상이 무라사메라는 장검이다.
등급은 B급, 능숙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아카데미 졸업까지 무장은 그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리스크가 심한 검신의 가호의 발현 조건에서 벗어난 규격이니만큼 주 무장으로서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무통의 가호’ 30초에만 의지할 수는 없을 터. 가호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검으로 검술도 단련해 놔야 한다.
‘생각보다 할 게 많네.’
그렇게 한참 별들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저기, 거기 내 자린데.”
티 없이 맑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단정하게 빗긴 푸른빛 머리칼과 미려함을 넘어 신비함마저 느껴지는 외모.
밤하늘 은하수를 배경 삼아 서 있는, 눈동자에 별을 담은 소녀.
아벨 폰 니벨룽.
서사가 바뀌는 순간은 풀벌레가 지저귀는 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