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84)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84화(84/300)
84화 축제: 만남 (2)
“어떻게 눈치챘나?”
알’타이르가 껄껄 너털웃음 지으며 물었다. 나는 기색을 숨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생에 봤었습니다, 라고 말할 순 없겠지.’
정확하겐 이 노인의 얼굴이 아닌, 저 지팡이를 기억한다. 언뜻 평범하기 그지없는 작대기지만 S급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장, 케인 소드 신디케이트(Syndicate).
저 나무 지팡이의 속살엔 시퍼렇게 벼려진 검날이 숨어 있다. 실로 암살자다운 무장에 인상 깊은 외관 때문에 유저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었다. 그 덕에 이 노인이 누구인지 특정 지을 수 있었지.
나는 천천히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기적의 가호 M’에선 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카리스마가 철철 넘쳤는데.
게슴츠레 감긴 눈과 가슴팍에 ‘Love & Peace’라는 문구가 박힌 하와이안 셔츠. 드X곤볼의 무X도사가 연상되는 인상착의다. 차이점이라면 선글라스는 안 썼다는 것 정도?
‘최강의 어쌔신이라 불리는 자가 이런 변태 노인이었다니…….’
내가 침음을 흘리고 있자, 알’타이르는 짐짓 알겠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기척 감지를 역이용했구먼, 젊은이.”
“……?”
나는 눈만 한 번 끔뻑거렸다. 알’타이르는 입꼬리를 좀 더 끌어 올렸다.
“까마귀 가호로 기척을 완벽히 차단했네. 아무래도 일평생을 암살자로 살다 보니 살기가 배어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오히려 자네는 내게서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에 눈치챘던 거겠지. 거기에 녹스를 통해 자네를 불러내려 했으니, 시기 역시 적절하지.”
뭐라는 거지? 나는 그냥 이 노친네가 짚고 있는 지팡이로 알아챈 건데?
애초에 한껏 늘어져 있었던지라 가호의 감응력도 곤두세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작정하고 기습했으면 반응이 늦어졌을 것이다.
나는 눈만 멀뚱멀뚱 떴다. 알’타이르는 일견 알겠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읊조렸다.
“어린 나이에 무서울 정도의 통찰력이구먼.”
무어라 반문하려다 말았다. 알아서 자문하고 자답하시는데 굳이 설명을 덧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새삼 말에 여백을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입 다물고 있으면 반은 간다는 소리는 이럴 때 쓰는 말이군.’
나는 그리 생각하며 침묵을 유지했다. 알’타이르는 씨익 미소 지었다.
“내가 젊은이를 왜 찾았는지도 얼추 알고 있겠지?”
“네, 뭐.”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른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구먼. 노인에겐 내일이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쓸데없는 시간을 절약하게 해 줘서 고맙네.”
그는 손수건을 갈무리하고서 두 손을 지팡이 윗동에 포개 올렸다. 사뭇 무거워진 공기. 녹음의 그림자가 바람의 흐름에 맞춰 흔들렸다.
“얼마 전 원로단에서 그대의 암살을 사주했었다, 라는 것 때문에 온 건 아니야.”
“예?”
내가 살짝 당황하자 그는 설레설레 고개 저었다.
“가문의 일은 가문이 알아서 하는 법이지. 매듭이 지어진 일을 재차 꺼내 뭐 하겠는가. 고작 그런 것 때문이라면 시칠리아 섬에서 한국까지 오지도 않았어. 내가 자네를 찾은 건, 더 중요한 일 때문이야.”
“…….”
아디토레는 원로단의 졸속한 사주를 쳐 냈다. 어떠한 물증도 없이 생도 한 명을 묻으라는데 순순히 수주할 리가 없으니.
그러나 아디토레에선 그 사주로 인해 나를 주시했을 터다. 게다가 엊그제 내가 심상의 영역을 다루고, 마오 랑을 꺾었으니. 의념은 가일층 짙어졌을 것이고, 그 때문에 나를 호출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알’타이르가 눈을 얇게 떴다. 핏빛 동공에 이채를 넘어 광채가 맴돌았다.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젊은이…….”
낮게 가라앉는 음성. 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의 사시미를 더듬었다.
여차하면 바로 뽑아 들 수 있게끔. 알’타이르 역시 지팡이의 손잡이를 굳게 꼬나쥐었다.
촌스러운 복색의 노인이지만 상대는 최강의 어쌔신. 찰나의 방심은 곧 목숨과 직결된다.
후우웅.
바람이 더위를 쓸고 지나갔다. 긴장이 전신에 스민다. 알’타이르가 검지로 지팡이 윗동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내 손녀딸과 무슨 관계인가?”
“…….”
주머니를 더듬던 내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자 그는 헛기침하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둘이 사귀고 있나?”
* * *
나는 10분가량 클로이와의 관계를 똑바르게 설명해 주었다. 턱수염을 쓸어 만지며 귀를 쫑긋 세우는 알’타이르. 귀가 발그레한 게 영락없는 변태 노인이다.
“그냥 친구, 그 이상은 절대 아닙니다.”
“음음, 그렇구먼.”
알타이르는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이제야 의문이 풀렸는지 이를 드러내며 맑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내심 실망했다.
‘…암살자 가문의 당주가 이런 사람이었다니.’
게임에선 대사가 항상 ‘…….’인 간지 나는 인물이었는데, 실상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노인네였다.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속내를 숨겼다.
‘그래도 조금 전 무게를 잡을 때 위압감이 대단하긴 했으니, 예사 인물은 아니지.’
알‘타이르는 손수건을 다시 꺼내 얼굴을 문지르며 일어섰다.
“아무튼 궁금한 점은 해결됐으니, 나는 이만 물러가겠네. 그럼 내 손녀딸 좀 ‘친구’로서 잘 좀 부탁하네. 알다시피 무른 성격이라 말이야. 자네랑 같이 지내다 보면 클로이도 변할 수 있겠구먼.”
알’타이르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 이윽고 입을 뗐다.
“…당주님께선 꼭 클로이가 암살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십니까?”
남의 가정사에 참견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요 이틀간 클로이의 얼굴이 괜스레 떠올랐다. 뿌듯함과 기쁨이 번진 표정으로 재료를 손질하던 모습. 그녀의 성정은 본디 그런 소소한 것들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내 물음에 알’타이르는 우두커니 서 있다 끌끌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도리어 툭 말을 내뱉었다.
“클로이의 다른 모습을 본 적 있겠지.”
얀데레 모드의 클로이.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타이르가 옅게 웃었다.
“그게 손녀딸의 본모습일세. 맹수에 한없이 가까운 야성. 자네 같으면 그런 녀석을 양지에 풀어 둘 수 있겠나.”
“그건 아디토레식 교육의 산물 아닙니까.”
날 선 목소리로 말하자 알’타이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세간에 퍼진 것만큼 콩가루 집안은 아니네. 물론 암살이 주업이니 교육 방식이 남다른 건 인정하네만, 우리는 그 이전에 가족이야.”
그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클로이는 오히려 그 반댈세. 가문에선 클로이의 그 내면을 가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네. 다년간 힘쓴 덕에 이성을 주입했지만, 감정이 격해질 때 이빨을 드러내네.”
“…….”
“자네가 친우로서 클로이를 염려하는 건 잘 알아. 다만, 내 손녀에게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클로이를 너무 가까이하진 말게나.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니.”
얼핏 일리가 있고, 노파심이 느껴지는 말들이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듣다가 나지막이 입을 뗐다.
“연기는 거기까지 하십쇼.”
“연기라니, 무슨 소리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알’타이르. 나는 깊게 찌른 팔짱을 풀며 일갈했다.
“걱정해 주는 척하는 것까진 좋습니다. 근데 말에 거짓말을 섞을 거면 잘 숨겼어야지.”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머니에서 무라사메를 뽑아 들었다.
스릉⎯!
파스스, 파스스, 파스스.
파스스, 파스스, 파스스.
곧바로 파르라니 떨리는 나뭇잎의 틈바구니에서 다발의 신형들이 나타났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이들이 저마다 날카로운 암기(暗器)를 꺼내 들었다.
‘아디토레의 암살자들.’
그들의 후드 아래에선 양안이 빨갛게 번들거렸다. 기세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다. 알’타이르는 얼굴에서 표정을 완연히 지우고서 기계적인 음성을 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건가.”
빙 두른 대열이 나를 조이듯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들의 안광엔 지독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차분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까 당신이 내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감이 좋다고. 비슷한 맥락입니다.”
“…….”
잠시 미동도 없이 나를 바라보던 알’타이르가 곧 한 손을 치켜올렸다. 한 번의 손짓과 함께 그의 휘하들은 그림자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인기척이 완전히 없어지고 살벌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이어서 알’타이르가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자네, 기대 이상이로군.”
나는 무라사메를 주머니에 도로 찔러 넣고서 응답했다.
“전 기대 이하였습니다.”
* * *
저벅, 저벅.
알’타이르가 느긋한 걸음으로 가로수길을 가로질렀다.
암살자로서 감정이 메말라 버린 지 오래였으나, 어째서인지 얼굴엔 즐거움에 가까운 감정이 머물러 있었다.
아디토레의 당주이자 고금 최강의 암살자로 살아온 지 어언 육십 년 남짓. 알’타이르는 문득 주름 잡힌 손으로 가슴께을 매만져 본다.
숱한 살생으로 마모되어 버린 지 오래였을 터. 건조하기 그지없던 심상에 감정이 샘솟고, 고동이 일었다.
‘강검마라…….’
자신을 앞에 두고도 전혀 오시되지 않는 태도.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심상의 영역을 다루는 재능. 일천한 경험을 상쇄해 버리는 통찰력까지.
천재라는 일반적인 단어로는 수식할 수 없는 자이지 않은가. 알’타이르는 되새김질 하듯, 조금 전 소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뚝.
한참을 걷던 알’타이르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가 시선을 살짝 틀었다. 가로수의 응달에서 인영 하나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녹스.”
“네, 당주님.”
녹스는 시선을 바닥에 고정했다. 그러나 미약하게나마 당주님의 감정이 닿아 몸을 움찔했다. 철혈의 어쌔신인 당주님께서 진심을 담아 웃고 있었기에.
“멀리서 온 보람이 있더구나.”
“…만족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알’타이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처음이었다.”
“네? 어떤 부분이……?”
당황한 기색으로 말꼬리를 길게 내빼는 녹스. 알’타이르는 낮게 소리 내 웃었다.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껴 보는 게 말이다.”
녹스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깨만 잘게 떨며 몰려오는 혼란을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조만간 그 친구를 또 보고 싶구먼.”
“…….”
알’타이르는 재차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아까와 달리 지팡이로 땅을 짚는 대신,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손잡이엔 땀이 흠뻑 배어 있었다.
* * *
몇 분 뒤.
“어, 검마 군! 많이 기다렸죠!?”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클로이. 급하게 나왔는지 머리가 조금 젖어 있다.
“아니야. 나도 금방 왔어.”
“헤에-.”
클로이는 눈을 초롱초롱 반짝였다. 입가엔 기분 좋은 감정들이 만연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클로이네 당주를 만났다는 건 말 안 하는 게 좋겠지?’
이제 막 녹스와 관계 개선의 기미가 보이는 그녀였다. 짐작건대, 녹스와 클로이는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아닌 가문의 풍조 때문에 멀어진 것이리라.
그런 의문은 알’타이르와의 만남으로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말에 거짓을 잔뜩 섞어 내게 혼선을 주려 했다.
예상보다 감정 표현도 다양하고 복색도 느슨해서 순간 넘어갈 뻔했지만. 그와 조우 직후부터 가호의 감각권을 되살리니 뾰족한 살기들이 피부를 찔러 댔다.
그들은 기척 차단 가호인 ‘까마귀의 가호’를 운용했다. 사실 무라사메를 안 챙겨 왔다면 전혀 눈치 못 챘을 것이다. 그러나 미약한 살기일지라도 겹겹이 쌓이니 뚜렷하게 감지됐다.
‘참 가증스러운 노인이었어.’
나는 상념을 마치며 마음을 굳혔다. 말하지 말자.
숨길 생각은 없지만, 한껏 기분 좋아 보이는데 구태여 말을 꺼내 그녀의 기분을 초 치고 싶지 않았다.
“저희 뭐 할까요?”
클로이가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음, 아까 일정 보니까 저녁쯤엔 퍼레이드. 해가 완전히 떨어지면 불꽃놀이를 하던데. 순차적으로 보는 건 어때?”
“네, 좋아요!”
클로이는 고개를 크게 주억이며 긍정했다. 그 모습에 나는 설핏 웃었다.
“부장! 클로이!”
저 멀리서 우리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가슴팍에 기념품들을 그러모은 스피드 웨폰. 그 옆에는 무미건조한 얼굴을 한 료조와 조용하게 동행하는 하나 선배가 보였다.
갑작스러운 부원들의 어샘블에 당황하는 클로이. 곧이어 그녀는 뺨을 부풀리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못마땅해 보이나 그렇다고 밀어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근데 다 따로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왜 같이 뭉쳐 있어?”
내가 묻자, 오히려 웨폰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엥? 부장이 문자 보냈잖아. 여기서 4시까지 보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폰을 내게 보이는 웨폰. 액정엔 정말로 내 번호로 찍힌 수신 문자가 있었다. 당연히 난 보낸 적이 없었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애는.’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서 료조를 흘깃했다. 그녀가 앙증스레 혀를 빼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