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86)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86화(86/300)
86화 축제: 계약 (1)
“후, 이제 좀 살 만하네.”
산등성이 너머로 태양이 저무니 더위도 한풀 꺾였다. 그럼에도 인해의 틈바구니는 여전히 후덥지근하기에 나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다.
위치는 내가 즐겨 앉던 벤치. 아벨을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였다.
그날 이후론 찾지 않던 곳인데. 오가는 사람도 적고 굽이진 길 위에 있어 불구경하기엔 제격이라 생각했다.
이런 꿀 자리에 부원들을 놔두고 혼자 온 게 마음에 좀 걸리긴 했지만……. 얼핏 보니까 나 없어도 잘들 놀더라고.
맥을 끊고 싶지도 않고, 원래 혼자 다니는 게 적성이니까. 어디 갔었냐고 하면 화장실 갔다고 대충 둘러대면 될 일이다. 그리고 처음엔 뾰로통하던 클로이도 분위기에 감화되었는지, 표정이 밝아 안심했다.
나는 벤치에 풀썩 몸을 기댔다. 삼일간의 긴장과 피로가 일순 탁 풀리는 기분.
뻐근한 목을 주물럭거리며 중간 점검 겸 상태창을 띄웠다.
파앗⎯
== ==
[검신(劍神)의 가호]베면 잘릴 것입니다.
◎육신(肉身)의 격: (12 ▶ 14) ▷ 검(劍)의 규격이 완화됩니다.
◎정신(精神)의 격: (8 ▶ 10) ▷ 말과 행동에 위압감이 깃듭니다.
◎무장(武裝)의 격: (5 ▶ 6) ▷ 가호 발현 시 고통이 2.5단계 경감됩니다.
☆동화율: (21.3 ▶ 24.7)%
▷ 【???】의 선(線) 2줄이 읽힙니다.
▷ 【???】의 목소리를 미약하게 감지합니다.
→[동화율 25% 달성 시 다음 해금 조건이 충족됩니다.]
★【???】
[※ 길이가 39cm 이하, 폭은 10(+1)cm 미만의 검일 때만 가호가 발동됩니다.]==
“어째 날이 가면 갈수록 길어지는 것 같냐.”
첫날의 ‘베면 잘릴 것입니다.’라는 간결한 문구에 살이 이것저것 붙으니, 일견 게임다운 인터페이스가 떠오른다.
성장성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으니, 고취감이 배가된다. 어떤 방식으로 게임사가 유저의 성장 욕구를 자극하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나만 해도 내심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가 올라가니까.
“동화율은 그새 또 많이 올랐네.”
언제나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동화율. 아마 마오 랑과의 대련이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자그마한 사건 하나에 연루되기만 해도 해금 조건이 충족될 정도로.
동화율이 동아줄일지 독이 든 성배일지는 아직 모르나, 확실한 건 검신의 가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에 꿈을 꿨을 때도 올랐었지.’
나는 한참 동안 상태창을 응시했다. 육신과 정신의 격도 고루 상승해 있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무장의 격도 만수르에게 받은 ‘만년서리’ 덕에 올랐다. 다이쏘와 명품은 격이 다르다 이건가…….
“이대로만 하면 되는 걸까.”
지표는 지금껏 해 온 것처럼 해도 된다 말하는 것 같지만, 왠지 그 점을 ‘누군가’가 유도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 쭉쭉 성장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해야 하나.
“…….”
나는 상태창을 닫아 버리곤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주홍빛은 지평선 뒤로 완전히 사라지고, 퍼레이드의 소란스러움도 조금 잦아들었다. 그러나 수많은 눈동자엔 설렘이 감돌았다.
“이제 곧 불꽃놀이 시간인가.”
복작한 퍼레이드와는 달리 불꽃놀이는 내심 기다려졌다. 이조차도 관심 없었다면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 잠이나 잤겠지. 밤하늘에 축포가 터지는 건 어른에게도 두근거리는 일이다.
‘요새 내 진짜 나이가 헷갈리긴 해.’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쳐다봤다. 태양에 가려졌던 별들이 스멀스멀 빛을 발아하고, 아스라했던 달은 또렷한 형태를 잡아 간다.
괴물, 초능력자, 마법이 판치는 이 세계에서 그나마 지구랑 비슷한 풍경. 지금 와서 딱히 지구가 그리운 건 아니다. 괜찮은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다고 하기에는… 글쎄.
오히려 풍파가 잦은 인생이었다. 전국 제일의 칼잡이로 불렸으나 결국엔 칼 좀 다룰 줄 아는 소시민, 아니 그 이하였다.
심사가 튀틀리면 생선 백정이라며 뇌까리던 진상들부터, 툭 하면 돈 달라 보채는 가족들까지.
사실 내가 빠르게 이곳에 정을 붙인 데엔 그 영향들이 컸다.
현실이 좆같은데 정이 붙을 리가. 거기에 이렇다 할 인간관계도 첫 스승님밖에 없기도 했고.
“생각해 보니까 그 아저씨 안 본 지도 이십 년이 넘었네.”
첫 스승님은 내가 어느 정도 칼을 다루게 됨과 동시에 내쳤었다. 하달받은 가르침엔 한계가 뚜렷하다나. 실전보다 값진 수업은 없다며 추천장 하나 없이 쫓아냈다.
영문을 몰랐던 당시엔 부아가 치밀었지만, 팔도를 떠돌다 보니 그 의미를 저절로 깨달았다.
기술의 터득보다 중요한 건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 현장감 넘치는 실전보다 좋은 교습소는 없다. 덕분에 자립성과 침착함이 새겨졌고 이 세계에 잘 녹아들 수 있었다.
‘실전 지향인 건 이 아카데미나 그 배불뚝이 양반이나 똑같네.’
…그래도 짐가방 하나만 떠넘기고 쫓아낸 건 좀. 명색에 제자인데 노잣돈이라도 좀 쥐여 주든지. 세속에 밝고 약삭빨라 곗돈도 두둑할 양반이 말이야. 심성이 그렇게 쪼잔하니 모발이 점점 얇아지지.
그렇게 벤치에 앉아 홀로 투덜거릴 때.
“…….”
돌연 느껴지는 스산한 기척. 아직 축제 기간이고 외부인이 많아 이상할 건 없지만.
사람인 것 같으면서 아닌 것 같은 상당히 이질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감각이다.
‘머메이드를 마주쳤을 때랑 비슷하다.’
다만 마력이 감지될 때 뒷덜미가 빳빳해지는 특유의 자극이 미미했다. 마치 그 기력이 쇠한 것마냥. 인적이 드물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전이의 가호’를 발현해 흙바닥을 매질로 삼아 감각을 흩뿌렸다. 검신의 가호로 벼려진 감응력은 가호로 인정되어 전이가 가능했다. 유저 시절 비슷하게 활용했던 기억이 있어, 나름 응용해 봤는데.
귀에서 초음파라도 나오는지, 사방 30M 내의 일대 전부가 또렷한 형상으로 뇌리에 새겨진다. 비유하자면, 머릿속에 입체 도면이 실시간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미쳤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효과는 대단했다. 오감을 초월하는 듯한 감각. 육감을 개화시킨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놀라기도 잠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인영이 감지됐다.
나는 곧장 칼자루를 움켜잡았다.
오른손엔 무라사마, 왼손엔 만년서리.
손목만 살짝 털면 바로 쇠를 드러낼 수 있게끔 역수로 고쳐 잡았다.
‘가까워진다.’
예의 아발론 섬이야 지형의 변칙성 덕에 증거 인멸이 수월했지만, 이곳은 호아킨 아카데미.
학내에서 섣불리 행동할 순 없는 노릇. 확실한 증거가 없는 유혈 사태는 추후 내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퇴학, 나쁘면 영웅 법정에 회부된다. 최대한 신중히 움직이는 게 맞다.
‘…라고 원래라면 생각하겠지.’
신중은 확신이 없을 때의 차선책. 두 가지 가호를 동시 발현한 덕에 대상의 특징을 정확히 꼬집어 냈다.
‘자색 눈동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신경을 한 곳에 집중시키며. 그리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망막의 귀퉁이에 떠오르는 그림자.
나는 발을 가볍게 내디뎠다.
파앙-!
하는 파공음이 일고, 서 있던 자리엔 인영만 덩그러니 남았다.
키리리릭⎯!
쇠붙이에 공기가 찢기는 소음. 일순간에 지근거리로 좁혀지자, 동그랗게 수축된 동공이 보였다. 탁한 자색이 낀 눈동자와 얼빠진 얼굴을 한 여인.
“자, 잠까⎯!”
여인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적의가 없음을 보이는 그녀. 무방비 그 자체였으나.
푸욱!
관성이 실린 칼날이 살덩이를 쭉 찔렀다.
내 눈과 자신의 배를 번갈아 보는 여인. 그녀의 동공이 열리기 시작했다.
“꺼억!”
단음절의 비명. 그녀는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아이고오오오, 나 죽네에!”
“…….”
나는 당황했다. 역습을 예상했는데 그녀의 급정지로 인해 배에 칼침을 찔러 버린 상황.
일반인인가 싶었지만, 그녀가 흩뿌리는 보라색 피로 보건대 빌런이 확실했다.
빌런들은 마족과 인류 양측에서 아종 취급이라 피의 색이 다르다. 게다가 조금 전의 일로 생긴 자상도 아물어 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은 절대 아니야.’
다만, 재생 속도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뎠다. 한바탕 흙장난을 마친 여인이 시근덕거렸다.
“진짜아-! 아무리 그래도, 칼침부터 놓는 사람이 어딨어!”
뭐지? 빌런임이 분명한 작자가 도리어 역정이라니.
“대화가 좀 통하나 싶어 왔더니. 이 손속에 아고르 님도 당하신 건가…….”
여인은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린다. 나는 눈만 살짝 내려 쳐다봤다.
그녀는 어깨를 잘게 떨었다. 시선은 내 사시미에 고정한 채. 척 보아도 지레 겁을 먹은 듯했다.
“저기, 그것부터 내려놓으면 안 될까… 요? 검마 씨?”
여인은 친근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불쾌한 기분이 샘솟아 눈을 사납게 치떴다.
“제 발로 찾아온 놈이 혀가 길군.”
칼끝을 겨누자 몸을 뒤로 내빼는 여인. 그러다 곧 체념했는지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거래?”
여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턱짓으로 발언을 허락하자, 그녀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살려 주시면 검마… 님을 노리는 놈들의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 * *
팔짱을 끼고서 벤치에 앉은 강검마. 바로 앞엔 빌런 최설아가 무릎 꿇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강검마의 발끝만 힐긋하며 생각했다.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야.’
최설아는 강함에 기생하며 살아왔다. 빌런이 된 것도 그 이유였다.
약자로서 강자에게 먹힐 바엔, 인간성을 대가로 강자가 되리라.
마법을 다룰 수 있다면 인간성쯤이야 값싼 대가니까. 그 덕에 고위 인사인 원로는 그녀의 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돈을 갖다 바쳤다.
소기의 권력. 딱 거기까지가 최설아가 원했던 것. 악의에 가득찬 사상이 있지도, 인류를 향한 거대한 원망도 있지도 않았기에.
하지만 얼마 전, 그녀를 지탱하던 힘은 모시던 주군과 함께 사라졌다. 태생이 인간인 빌런은 계약을 통해 군단장에게 마력을 빌린다. 따라서 마력의 주체가 죽으면 그 아랫것들도 자연히 힘을 잃는 게 수순.
마력에 의탁해 입지를 다져 왔는데,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렸다. 그것도 바로 눈앞의 생도에게.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오!’
그녀가 접근한 건 나름대로 도박수였다. 빌런 쪽에서 입지를 상실했기에,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다.
‘그 교수는 그냥 죽여 줄 것 같지 않아.’
그럴 거라면 차라리 강검마에게 목숨을 구걸해 보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보자마자 배에 구멍이 뚫릴 뻔했다.
최설아는 곁눈질로 눈치를 살폈다. 강검마는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교수 새끼 관련된 것 빼곤 아는 내용은 전부 토해 냈어.’
강검마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더니 입을 열었다.
“네 말은 아카데미 곳곳에 빌런들이 숨어 있다는 건데.”
“예, 맞아요!”
“그 정도 정보로 목숨을 구걸하기엔, 너한테 죽을 뻔한게 한두 번이 아닌데?”
사나운 눈빛으로 최설아를 쳐다보는 강검마.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두 손을 비볐다.
“저도 그런 짓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아니 뒈져 버린 그 악마 놈의 꾐에 넘어갔나 봐요. 진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최대한 비굴하게 저자세로 밀고 나가자. 어차피 여기까지 온 것도 도박이었다.
그리 말하자, 눈을 가늘게 좁히는 강검마. 그는 칼자루 밑동을 살포시 잡고서 칼날을 흔들어 보였다. 눈앞에서 좌우로 진자 운동 하는 사시미. 조금 전 후끈했던 복강의 통증이 되살아난다.
‘그래도 아카데미 부지 내니까 무턱대고 죽이진 않을 거야.’
이윽고 강검마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마지막 말 빼고는 딱히 거짓말은 없어 보이네. 여기서 슥삭 해도 상관없겠지만. 네가 해 왔던 짓거리를 생각하면 그건 너무 약하고.”
“…….”
“살고 싶냐?”
“네? 아, 네, 네.”
최설아는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호소해야만 한다.
그러자 강검마가 돌연 칼끝으로 그녀의 왼쪽 귀를 가리켰다. 물방울만 한 담홍색 결정이 달린 귀걸이가 치렁거렸다.
“그거, 나한테 넘겨.”
최설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기색을 애써 숨기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예? 이 귀걸이요? 이거 여자들이나 하는⎯”
“내놔.”
강검마는 단칼에 말을 끊어 냈다.
“목숨은 살려 줄게. 대신 그건 놓고 가라.”
“…….”
희번덕한 안광에 몸을 달달 떠는 최설아. 강검마는 칼끝을 정확히 귀에 겨누며 말했다.
“종마의 증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