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87)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87화(87/300)
87화 축제: 계약 (2)
“음, 생각보다 별거 없네.”
담홍빛의 물방울 결정. 나는 그것을 손 위에서 이리저리 굴려 보고 있었다.
치장품 관련해선 잘 모르는 나지만, 얼핏 봐도 싸구려 같은 만듦새. 좋게 매겨 줘도 중상품 정도.
“저기…….”
무릎을 꿇고서 머리채를 푹 늘어트린 여인. 조금 전, 자신이 밝히길 이름은 최설아란다.
“돌려주시면 안 될까요……?”
최설아가 살살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겸양이 잔뜩 낀 말투. 강제로 끌어 올린 입꼬리에는 비열함이 묻어 있었다.
‘이 새끼가.’
내가 안광을 찌푸리자, 그녀는 히익-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말았다. 무릎에 얹은 주먹이 발발 떨리는 게, 분한 건지 겁먹은 건지 둘 중 하나일 거다.
나는 한숨 짓고서 다시 보석에 시선을 두었다.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가로등 불빛으로 빛깔도 살펴보았다. 반투명한 호박석이랑 거의 똑같게 생겼다.
‘종마의 증표라고 해서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종마의 증표, 빌런이 군단장급 마족과 계약을 맺을 때 생성되는 결정. 그들은 이걸로 어느 군단장 산하의 빌런인지를 증명했다. 빌런 사회에선 사원증과 비슷하게 통용된다지.
‘하지만 거기까진 사람들한테 퍼진 정보고.’
본용도는 군단장이 자신의 빌런들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조약돌처럼 생긴 이 보석에는 계약 당사자의 생명력이 담겨 있다.
계약을 맺음과 동시에 결정은 두 개가 생기는데, 군단장과 피계약자가 각각 소지한다. 고용주인 군단장의 증표는 마력 송신용, 노예인 빌런의 증표는 수신용으로.
그렇게 군단장은 자기 노예들의 심장을 품 안에 넣어 두니, 그들을 언제든지 부려 먹을 수 있는 것. 직관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목줄이었다.
그러면 혹자는 왜 내가 수신용에 불과한 이 결정을 빼앗았는지 궁금할 것이다.
아고르는 이미 죽어 없어져 증표는 제 기능을 못 하고, 마력도 없는 내겐 하등 쓸모없어 보이니 말이다.
게다가 생명력이 담겨 있다고 해 봤자 눈앞의 빌런의 것이라 무가치해 보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유저였던 나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지.’
나는 옅은 미소를 흘리고는 증표를 갈무리했다. 최설아는 눈알을 역동적으로 굴려 댔다. 그녀의 반응이 내가 한 선택이 옳다는 걸 알려 준다.
“야.”
“넹?”
툭 말을 뱉자 최설아는 고개를 빼꼼 들었다. 의도적으로 깜찍한 말투를 섞어 가며.
나는 최설아를 빤히 쳐다봤다. 탁하게 번들거리는 동공은 그녀에게 인간성이 남아 있지 않다는 방증이다. 눈은 상냥해 보여도 알맹이는 텅 비어 있을 테지.
‘…그래도 얘 덕에 전혀 몰랐던 사실들을 들었지.’
조금 전, 최설아를 통해 들은 이야기.
빌런들 사이에서 아고르를 토벌했다는 덤터기를 나 대신 레온이 썼다고 한다. 처음에 난 내심 놀랐다.
이유는 빌런 녀석들의 정보력. 검제님이 입단속을 엄히 했을 텐데, 그들에게 이야기가 벌써 샌 모양.
아무래도 아카데미 각처에 빌런들이 이미 깊숙이 뿌리내린 듯하다.
최설아의 말에 따르면, 빌런들은 주기적으로 외모 변환은 하지만 위장 신분은 일관된다고 한다.
아카데미 임직원만 해도 수백이라 외모 좀 바뀐 정도로는 못 알아본다나. 그러나 방법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료조한테 아카데미 구성원들 리스트 출력 좀 부탁해야겠네.’
생각해 둔 빌런 색출 방법은 간단하다. 그 수백의 얼굴을 전부 눈에 담아 두고 실제 인물들과 대질해 보는 것.
발품을 팔아야겠지만 내겐 부원들이 있다. 잘 설명한다면 당연히 손을 보태 줄 거고.
그들로서도 아카데미 안에 빌런들이 있다는 건 불쾌할 테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싫다면, 뭐.
‘너희가 직접 부장하든가-.’
나는 상념을 마치고서, 낮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희는 왜 나 대신 레온을 노리는 거지?”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릅니다.”
흐릿한 목소리로 답하는 최설아. 내가 사시미를 목에 들이밀자, 날이 검집에 쌓여 있음에도 질겁한다.
“저, 정말이에요! 빌런 중에 웬 교수라는 녀석이 있는데, 거의 모든 일은 그 새끼 대갈통에서 나오는 거라서. 저 같은 말단은 잘 모, 몰라요!”
“그 교수라는 놈은 어떤 놈인데?”
“…그게.”
말하기 망설여지는 듯, 최설아는 침음을 흘렸다. 칼날을 목덜미 쪽에 좀 더 밀어 넣었다. 그녀는 그제야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실토했다.
“쿠아른 님, 아니 그 악마 놈의 종속이라는 것, 그거 빼고는 정말로 몰라요오-!”
……2군단장 쿠아른.
라이칸이 봉인된 지금에선 마왕 군의 총책이라 불리는 마인.
그 악마의 종마라면 골치 아픈 상대임은 확실했다.
‘그런 녀석이 아카데미에 있다라.’
최설아는 무릎만으로 살금살금 뒷걸음치다, 나한테 딱 걸리곤 원위치했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정체를 숨기긴 해도 암암리에 서로를 아는 다른 빌런들과는 다르게, 그 자식 정체를 아는 빌런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빌런들 사이에서도 평이 엄청 안 좋아요. 교수 코스프레면서 세상 고상한 척은 다 하고.”
최설아는 내게 열심히 뒷담을 깠다. 손짓, 발짓 다 써 가며 이빨을 터는 게 어지간히 살고 싶은 모양.
…겉모습은 멀끔한 미인이 십 대한테 이렇게 비굴하다니, 기분이 상당히 께름직하다.
‘도저히 신뢰가 안 가는 타입이네.’
나는 돌연 눈을 얇게 뜨고서 감각을 곤두세웠다. 모든 신경을 최설아라는 한 점에 집중시킨다.
육감을 개화시킨 직후라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대상이 투시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애용하기엔 자괴감이 몰려올 듯한 능력이다. 아무튼.
‘느껴지는 게…….’
마력의 찌꺼기만 남은 듯한 미약한 흔적. 아고르가 죽은 무렵부터 점점 마력이 새어 나가고 있는 거겠지. 여태껏 마법에 의존해 왔는지 신체 능력도 특별할 게 없다.
아무리 보아도 딱히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놔두자니 심사가 뒤틀릴 것 같고.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골몰히 생각했다.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다 소문날까. 한참을 고민하던 난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하는 최설아.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서 가증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나는 건조한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나지막이 말을 뗐다.
“최설아.”
“네, 네!”
“너, 지금부터 빌런해라.”
무슨 말인지 이해 안 가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최설아.
“…예? 그게 무슨.”
“뭔 말인지 모르겠냐?”
“어, 어. 그게… 알 것 같은데 좀 애매하달까? 전 원래 빌런… 아니, 지금은 주군이 죽었으니까 빌런이 아닌가. 어쨌든, 무슨 말씀이실까아…….”
최설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골랐다.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럴 수밖에. 왜냐면, 전생에 내가 좋아한 영화의 작중 대사니까.
호랑이굴에서 삐져나온 여우를 도로 굴속에 처넣는다. 영화로 배운 암투의 기본이었다.
* * *
목숨을 부지한 최설아는 도망가듯 자리를 피했다.
떠나기 전, 그녀는 허리를 접어 가며 연신 폴더 인사를 했다. 진심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그 이상 보면 최설아가 한 짓거리들이 떠올라 칼부터 나갈 것 같더라고. 손이 자석처럼 칼자루를 잡으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나는 말로 하는 대화가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다음이 손속. 말을 나눠 보고 안 통하면 그때 다른 방식의 대화를 하는 게 맞다 생각한다.
‘오늘 칼빵은 어쩔 수 없었지.’
최설아의 성향은 딱 박쥐. 아군이나 조력자로선 실격이나, 정보상으론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고민 끝에, 내 판단은 그녀를 이용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적당히 굴려 줘야지.’
당근과 채찍만 잘 사용하면 충분히 빨래질할 자신이 있었다. 종마의 증표도 받아 두었고, 문제 된다면 그때 가서 처리해도 늦지 않다.
나는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곧 있으면 기말고사, 연달아서 방학이 다가온다.
계획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어렴풋한 청사진이라도 그려 둬야 하는 법이다. 뭐든 대비가 중요하지, 그 후면 늦다.
교수라는 작자의 속내는 모를 일이나, 슬슬 배후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원로단을 축출할 아디토레도 움직이고 있고, 빌런 측에 최설아를 심어 두었다. 나는 그저 톱니바퀴가 맞물리길 기다릴 뿐. 그동안은 차곡차곡 내실을 쌓아 둘 생각이다.
마석의 채광, 검제님과 수련, 정보 수집.
거기에 더해 여러 이벤트. 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만반까지는 아니어도, 가능한 선까진 해 둬야지.
그 순간, 주머니에서 부웅- 하고 진동하며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
[료조: 어디임?]“아, 맞다.”
예기치 못한 일로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 놨다. 나는 검지로 천지인 타자를 톡톡 두드렸다.
[나: 잠깐 화장실]보내기 무섭게 들려오는 롤린~♬.
[료조: 만들어서 싸냐? 왤캐 늦어 ㅡ.ㅡ]잠시 멈칫하는 검지. 양갓집 규슈 같은 애가 쓸 만한 단어 선택은 아닌 것 같지만.
‘뭐, 원래 이런 애지.’
…근데 원래 만들어서 싸는 건 아닌가? 나는 헛웃음 하며 답신해 주었다.
[나: 지금 감] [료조: 올 때 매로나] [나: 비비빜 사간다] [료조: 우윀, 아재]문자를 송신하고 엉덩이를 털었다.
그와 동시에.
포옹- 하는 축포 음이 귓전에 내 닿았다.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소리를 쫓았고.
포옹, 파앙⎯!
다시 한번 망막에 빛줄기 하나가 솟아오른 뒤, 비산한다.
곧이어 검은 하늘에서 화려하게 튀는 불똥들. 빛의 파편을 분수처럼 흩뿌리는 장면을 넋 놓고 바라봤다.
“기숙사로 안 돌아가길 잘했네.”
나는 머리를 뒤로 많이 젖혔다. 계속해서 검은 바탕에 수놓아지는 불꽃들.
새, 코끼리 같은 동물들이나 각종 언어로 된 문구들이 새겨진다. 엄청난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되는 기분이다.
‘스케일 하나는 끝내준다.’
아카데미의 축제에서 저 폭죽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생도들의 축복을 별이 된 선현들에게 기린다는 의미. 아카데미 창설 이래 끊긴 적 없는 유구한 전통이었다.
“부원들이랑 같이 오자고 할 걸 그랬나.”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혼자 있어 뜻밖의 수확은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었다.
나는 퍼뜩 걸음을 옮겼다. 서두르면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까지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
타닥!
아래로 향하는 발소리가 가벼웠다.
파⎯앙⎯!
등 뒤로 밝은 색상들이 또 한 번 터진다.
여광이 밤 풍경을 밝히며 축제의 끝을 알렸다.
* * *
시간은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흘렀다.
지난날의 축제가 꿈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청춘들의 행사가 끝나고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아- 또, 또 시험이야.”
연필 지우개로 관자놀이를 벅벅 긁는 웨폰. 그의 미간은 짜증으로 좁혀져 있다.
그 옆자리에는 료조가 해조류처럼 축 늘어져 있고.
위이이잉-
클로이는 시선으로 날파리를 쫓는다. 동공의 움직임이 빠르다.
“젠장, 뭔 놈의 시험 범위는 또 이렇게 많아? 이거 완전 학생 인권을 묵살한 거 아니냐? 부장, 너는 어떻게 생각해?”
웨폰은 손바닥으로 백과사전만 한 교보재 세 권을 탕탕 내리쳤다. 책으로 쌓인 산이 흔들렸다. 참고로 저것들이 이번 기말 필기의 시험 범위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조해 주었다.
“아니, 기말고사를 무슨 필기만 봐? 실기도 보잖아. 하, 진짜 미쳐 버리겠⎯.”
“아, 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투덜거림을 자른 건 료조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사납게 치뜬 눈으로 웨폰을 노려봤다.
“언제까지 너 징징거리는 소리 들어줘야 해? 그냥 아가리 묵념하고 하면 될 것이지. 잠도 못 자게 쫑알거리냐, 어!?”
“야! 시험 나만 보냐? 료조, 너도 보잖아. 이 미친 분량을 어떻게 다 외우는데! 읽기만 해도 시간 없을⎯.”
“난 이미 다 외웠는데?”
“…뭐?”
료조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웨폰이 흠칫했다. 고개를 비틀며 ‘뭐, 문제라도?’라고 말하는 듯한 료조. 그러자 웨폰의 안색이 홍당무처럼 빨개지고 입술이 벌어지려던 찰나.
위이이잉⎯ 짝⎯!
살이 맞닿는 세찬 소리. 클로이의 맵싸한 손아귀가 웨폰의 따귀를 갈겼다.
“……?”
“어, 어.”
고개가 많이 돌아간 웨폰.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왼뺨을 감쌌다. 눈망울이 그렁그렁한 걸 보니 손속이 어지간히 매운 모양이다.
“죄, 죄송해요. 파리가 웨폰 씨 뺨에 붙어서 그만……! 저, 정말 죄송합니다!”
클로이는 미안한 기색으로 재빨리 사과했다. 웨폰은 정신이 덜 들었는지 입술만 뻥긋거리고, 그 장면에 료조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띡똑-! 문자 왔습니다.
메이루 데쓰! Rollin~♬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핸드폰 알림음.
멍한 웨폰을 제외한 우리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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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4년도 1학기 기말고사 실기 공고]모종의 사유로 인해 기존 기말고사 실기의 내용이 아래와 같이 변경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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