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8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89화(89/300)
89화 도둑잡기 (2)
기말시험 하루 전.
방과 후 시간에 랑 클래스로 료조가 나를 포함한 부원들을 소집했다. 전부 모이자 료조는 배낭에서 종이 뭉치를 쏟아 냈다.
“…이걸 그새 다 한 거야?”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료조와 서류들을 번갈아 보았다.
“응, 근데 출력만 하느라 검토는 못 해서 내용은 나도 몰라. 이제 확인해 봐야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침음을 흘리며 도로 서류 뭉치로 시선을 두었다.
‘리스트만 뽑아 온 게 아니야.’
임직원들의 세부적인 인적 사항, 명부 대질본, 의심 가는 인물들의 동선까지 차곡히 정리된 서류들. 이틀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작성한 거라곤 믿기지 않는 일 처리다.
‘할 땐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정된 보상 앞에 선 료조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대체 어떤 부탁을 하려고 이렇게 열심히 한 걸까? 스산함이 잠깐 스쳤지만, 물질적인 건 아니라 했으니까.
“…근데 부장, 이거 괜찮은 거야?”
종이 뭉치를 살피던 웨폰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빌런 색출이 목적이라지만 이거 순 범죄잖아……. 그리고 료조, 너도 이건 좀 심하지 않냐? 뭔, 하루에 화장실 몇 번 갔는지까지 적어 뒀냐? 이 사람들 인권은 어쩔 건데?”
“이미 해킹한 시점부터 범죄인데 인제 와서 무슨.”
“…얌마! 정도란 게 있지! 이건 죄질이 너무 고약하잖아!”
“늬예- 늬예- 성인군자 웨폰 님 납셨네-.”
료조의 비아냥에 웨폰은 표정을 사정없이 구겼다. 나는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보는 사소한 거라도 많을수록 좋아.”
“끄응, 부장 네가 그렇게 말하면 뭐…….”
나 역시 웨폰의 반응을 이해한다. 도의적으로 봤을 때 이는 잘못된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수단에 앞뒤를 재기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그래도 웨폰 같은 부원이 있어서, 최소한의 선을 지킬 수 있는 거지.’
솔직히 동아리 부원 중 나와 웨폰을 제외하곤 다들 도덕의 경계가 희미하다.
암살자 출신인 클로이야 그렇다 쳐도, 료조 또한 수단을 목적에 맞추는 냉담한 면이 있다.
하나 선배는 혼자 조용히 독서나 다과를 즐겨, 심중을 모르겠지만.
그녀는 부도덕한 일을 봐도 딱히 제동을 걸지도, 부추기지도 않는다. 그저 안경만 치켜올리며 묘한 미소로 관망할 뿐.
객관적으로 봤을 때, 웨폰과 나를 뺀 여성진들은 상식 밖의 성격이었다. 나는 웨폰의 등을 두드리며 타이르듯 말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전부 파쇄할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치, 료조?”
턱짓으로 료조의 의사를 물었다. 그녀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긍정의 한숨을 내쉬는 웨폰. 나는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아무튼, 료조를 통해 들었겠지만, 우리 여행 동아리는 기말고사 동안 빌런 색출을 위해 움직여야 해. 질문 있는 사람?”
“나.”
하나 선배가 돌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의 안경알이 한 차례 번뜩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정보의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
“…….”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의문스러운 시선들에 내게 모였다.
‘어물쩍 넘어가려 했던 걸 콕 짚어 내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최설아의 존재를 누설할 순 없다. 마력은 잃었으나 빌런인 그녀와의 내통했다는 걸 밝힐 시, 설명할 게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귀찮기도 하고, 무엇보다 근래 잠잠한 클로이가 얀데레 모드에 돌입할 것 같았다.
알맹이가 썩긴 했지만 최설아 같은 미인을 시다바리로 부린다는 걸 클로이가 알면……. 분홍색 커터칼에 불귀의 객이 될 수도. 나는 슬쩍 클로이의 눈치를 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말해 줄 수 없어, 선배. 다만 믿을 수 있는 정보원이라는 것, 이거 하나만큼은 말해 줄 수 있어.”
“헤에-.”
‘믿을 수 있는’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종마의 증표를 뺏긴 마당에 내게 거짓을 고할 리가. 딴맘 품으면 어떻게 될지는 최설아 본인이 잘 알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보원이 누군지 밝힐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래 뭐, 알았어.”
나는 느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나 선배를 쳐다봤다. 안경알이 눈을 가리니 의중을 가늠키 힘든 상대다. 그녀는 언뜻 조용한 모범생 같으면서도 간간이 짓궂게 군다.
‘같은 부원 중에서도 가장 모르는 인물.’
료조도 티는 안 내지만 하나 선배를 주시 경계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입만 히죽 웃는 하나 선배. 그녀는 지긋한 미소를 입가에 담으며 턱을 괴었다. 순간 기시감이 몰려왔다.
‘아 씨, 누구랑 닮았는데 누군질 모르겠네.’
나는 의념을 애써 누그러트렸다. 다들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듯한 분위기. 신망이 낀 눈초리들이다. 나는 한 차례 시선들을 새기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제1회 여행 동아리 회의를 시작할게.”
* * *
“후우…….”
나는 한숨을 길게 끌어 쉬었다. 그리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쳤다.
이런 식의 회의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했다. 그래도 의도는 잘 전달됐는지, 안건에 관해 부원들끼리 서로 논의하고 있었다.
“야야, 료조. 이 사람은 어때. 저번 달에는 없던 직원에다가 동선도 좀 수상쩍은데.”
“의심되는 정황 있는 사람은 일단 다 표시해 놔”
“오키.”
처음엔 망설이는 기색이었던 웨폰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는 연필을 분주히 움직인다. 필기 고사를 준비하던 며칠 전과는 달리, 눈에서 열정이 타오른다.
‘역시 시험 기간보다 딴짓이 즐거울 때는 없어.’
나는 멀찍이서 부원들이 토의하는 걸 눈에 담았다. 머리 쓰는 노동은 쟤네가 해 줄 테니까. 난 안건 설명하는 선에서 역할을 마쳤다. 그것이 부장으로서의 특권일 것이다.
그 순간, 클로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리고는 살포시 생수 한 통을 건넨다.
“거, 검마 군, 수고했어요. 이거.”
“어, 고마워. 안 그래도 목 탔는데.”
“…아, 아니에요.”
나는 물을 들이켜며 클로이를 곁눈질했다. 얼굴에 침울함이 도는 게 기가 한풀 꺾인 듯한 기색. 나는 클로이와 나머지 부원들을 번갈아 보았다.
‘음, 그런 거구나.’
나는 클로이에게 툭 말을 내뱉었다.
“너무 신경 쓸 거 없어, 클로이.”
“네?”
나는 목구멍으로 마지막 물방울을 넘긴 후,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료조나 웨폰은 평소에도 저런 걸 좋아하잖아? 애초에 머리 싸매는 걸 좋아하는 녀석들이기도 하고.”
“그래도…….”
“클로이, 너는 쟤네가 못 하는 걸 할 수 있잖아. 전에 버팔로 던전 때랑 이번 축제 때도 네가 없었으면 동아리가 굴러가질 않았을 거야.”
그녀 역시 우리에게 소중한 재원이다. 버팔로 던전에서도 암살자인 클로이가 아니었다면 뒤끝을 찝찝하게 남길 뻔했으니.
‘클로이가 통문소 직원을 처리해 줘서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 지었지.’
그녀의 뛰어난 기척 감지 능력과 손속은 앞으로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저, 정말요?”
“당연하지.”
클로이의 안색이 한순간에 밝아진다. 곧 그녀는 초롱초롱한 시선을 내게 쏟아 냈다.
“검마 군이 그렇게 말해 준다면… 저!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볼게요!”
꽉 쥔 주먹을 가슴에 모으며 다짐하는 클로이.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돌연 클로이는 홍조 띤 얼굴로 무어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번 시험에서도… 검마 군이랑 같은 조였으면…….”
그러던 찰나.
롤린~♬
수신 알림음이 울림과 동시에 난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문자가 날아온 게 나뿐이 아닌지 부원들도 일제히 확인한다.
===
[생도 ‘강 검 마’ 님의 2034년도 1학기 기말고사 조 구성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3학년 생도들은 입시로 인해, 전 학년 공동으로 치르는 이번 시험에서 제외되었음을 알립니다.
⎯⎯⌜조원⌟⎯⎯
산하나 – 범(凡) 클래스 2학년.
강검마 – 랑(狼) 클래스 1학년.
⎯⎯⎯⎯⎯⎯⎯
⎯⎯⌜조장⌟⎯⎯
……
……
===
눈을 살짝 내리자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 좆됐다.”
나는 허망한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조장⌟⎯⎯
레이첼 드 뮈라 – 성(星) 클래스 1학년.
⎯⎯⎯⎯⎯⎯⎯
[※ 한 번 배정된 조는 변경 불가합니다.]===
가장 피하고 싶은 녀석과 같은 조가 되어 버렸다.
* * *
동아리의 회의가 미처 끝나기 전, 강검마는 피곤하다며 먼저 빠져나갔다. 클로이는 강검마가 있던 자리를 한참 쳐다보다 말을 뗐다.
“검마 군, 안색이 많이 안 좋던데… 이번 시험에 대해 걱정이 많은가 봐요.”
옆에 있던 웨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조장이 레이첼이잖아. 부장, 아마 이번에도 피곤할 것 같네.”
“…그 썅ㄴ, 아니 금발 여우분이랑…….”
클로이의 안광에 독이 바짝 올라왔다.
사납게 이를 갈며 레이첼의 상판을 떠올렸다. 검마 군을 보며 군침을 흘리던 발칙한 여자. 그리고 야생마 같은 육감적인 몸매의 소유자.
문득 클로이는 자신의 가슴께 살포시 쓸어 본다. 그녀는 눈살을 구기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검마 군은 작은 가슴이 좋다고 했어.”
잠시 침묵이 일었다. 복잡미묘한 기류가 교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웨폰이 어색하게 웃으며 적막을 깼다.
“뭐, 중간고사 때도 같은 조였으니까, 잘하겠지. 하나 선배도 같은 조잖아. 별일이야 있겠어? 그리고 부장 걱정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어.”
“…그건 그렇죠.”
클로이는 산하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많은 감정이 깃든 눈길.
산하나는 부드러운 미소로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 클로이. 내가 한눈팔지 않게 잘 감시할게.”
그제야 클로이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중에도 한쪽에서 열심히 서류를 뒤척거리던 료조. 그녀는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리더니 돌연 낮게 말했다.
“부장도 갔으니까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자. 내일부터 시험이잖아. 나도 기숙사 가서 준비해야 해, 이제 그만 해산하자.”
“뭐야, 료조 너도 시험 준비라는 걸 하냐?”
웨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료조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웨폰은 멋쩍게 뒷덜미를 긁고는 짐을 챙겼다. 그를 시작으로 클로이, 산하나도 저마다 자리를 정리했다.
“다들 낼 필기 잘 보고-!”
“화, 화이팅!”
손을 휘휘 흔들며 빠져나가는 웨폰. 뒤이어 클로이도 남은 부원들에게 직각 인사를 하고 발을 옮겼다. 그렇게 랑 클래스에는 료조와 산하나 둘만이 남은 상황.
“…….”
료조는 산하나의 안경을 똑바로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서 시선을 쏘아 내는 료조. 마주하는 산하나의 안경알이 노을을 받아 반짝거렸다. 두 여인 사이에서 불편한 정적이 흐르던 때에.
“나도 이만 가 볼게.”
쌀쌀한 시선을 받아 내던 산하나가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나 선배.”
“응?”
하지만 료조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운다. 산하나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걸며 답했다.
“더 볼 일이라도 있어?”
“…….”
료조는 작게 혀를 차더니 이내 눈을 치켜떴다.
“…당신 정체가 뭐야.”
고개를 기울이는 산하나. 그녀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료조는 책상 위의 서류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왜, 선배 이름이 교직원 리스트에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