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wing the Academy With a Single Piece of Sashimi RAW novel - Chapters (9)
사시미 한 자루로 아카데미를 씹어먹음-9화(9/300)
9화 엑스트라는 살고 싶다 (2)
자정 무렵, 나는 한적한 뜰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놀란 마음도 좀 추스르고 별도 보고 미래를 위한 다짐도 하면서 말이다.
음, 근데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 타이밍이 어쩜 이렇게 운 나쁘게 절묘할 수 있을까.
“거기, 자리 좀 비켜 줄래?”
잘 쓸어 내려진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빛 장발, 청명하게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와 얇은 턱선, 개연성 있는 이목구비.
군청색 트레이닝복 타이즈와 크롭 티를 입은 옷맵시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위에서부터 절묘한 곡선을 그리다 골반 아래에서부터 곧게 똑 떨어지는 미끈한 다리 선.
아직 봄바람이 좀 추운지 베이지색 가디건 외투를 망토처럼 어깨에 걸치고, 허리에는 흰색 검집에 싸인 클레이모어가 걸려 있었다.
입학식 때는 멀리서 대충 봐서 몰랐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녀를 보기 전과 보고 난 후로 미인의 기준이 뒤바뀔 만큼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내가 잠시 입만 뻐끔거리자, 아벨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산산하지만 이지적인 분위기는 달이 그녀만을 비추는 것 같다.
근데.
벤치에 내 자리 네 자리가 있었던가? 엄연히 아카데미의 공용 자산이잖아. 설마 특진반은 벤치에도 맘대로 못 앉는다는 좆같은 교칙 같은 게 있나 싶었다. 하기야, 이 정신 나간 아카데미라면 그럴 만도 했다. 어느새 신분 사회에 익숙해져 버린 나 자신에 현타가 왔다.
‘어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유가 어찌 됐든 되도록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정사와 연관되지 않겠다는 행동 방침을 막 세운 참이다. 미인과의 조우는 언제나 환영이나, 지금 내 입장에서는 마냥 유쾌하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메인 히로인과 얽히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을 테니.
게다가 먼젓번 클로이의 일 때문에 누구를 상대해 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클로이의 탁한 눈동자가 잠깐잠깐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미미하게 손이 떨렸다.
뭐, 삥 뜯는 것도 아니고 자리 좀 비켜 달라는 건데, 딱히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힘 없는 무릎을 짚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갈 필욘 없어. 옆으로 조금만 비켜 주면 돼.”
아벨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바로 옆에 다가왔다. 그녀가 살짝 비키라는 듯 손짓해 나는 귀퉁이 쪽으로 엉덩이를 밀었다. 방금까지 운동이라도 하고 왔는지 이마에서 땀 한 줄기가 이슬처럼 흘렀다.
“…….”
“…….”
고요한 새벽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풀벌레들도 어느새 퇴근했는지, 수목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감돌았다.
나는 턱만 살짝 옆으로 돌렸다. 아벨은 흐르는 땀을 옷소매로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히로인 버프를 어찌나 세게 받았는지 눈길이 저절로 그쪽으로 돌아간다.
“여기가 별이 가장 잘 보여.”
의외로 먼저 적막을 깬 목소리는 아벨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밤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밤하늘을 쳐다보는 아벨의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 검제의 손녀, 아벨 폰 니벨룽이 맞나?
게임 속에서 아벨은 빈말로도 좋은 성격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왜, 그런 캐릭터 있지 않나. 처음에는 철벽 속성에 틱틱거리다 같이 온갖 시련들을 이겨 내야만 감정을 쌓아 갈 수 있는 그런 캐릭터.
심지어 그 잘생긴 주인공조차 초반부에는 아벨의 적대적인 태도에 말 몇 마디 못 나눴었는데.
그렇기에 나는 비교적 살갑게 말을 거는 그녀가 생경했다. 별바다를 쳐다보던 아벨은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네 무장도 검이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할아버지가 그랬어. 검사들은 눈부터 좀 다르다고.”
그렇게 말한 아벨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찰랑이는 긴 머리가 어깨를 타고 가슴을 쓸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턱을 매만지더니 팔걸이에 기대 놓은 검을 들이밀었다.
“한번 잡아 볼래?”
“그다지 안 당기는데.”
그리 말하자 아벨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그리고 고개를 휙 돌려 버린다. 설마 삐진 건가?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던 아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나 알지?”
“대충.”
“난 너 몰라.”
뭐지?
“좀 치사하지 않아? 넌 내 이름을 아는데, 난 네가 누군지 전혀 모르잖아.”
“방금 본 사이인데 이름까지 밝혀야 하나?”
나는 좁힌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혹시 모르지, 네가 학생으로 변장하고 아카데미에 몰래 스며든 마왕 측 첩자일지. 아니면 이 야밤에 혼자 이렇게 있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아벨이 검 자루를 손톱으로 톡톡 건드렸다. 시선은 마치 나를 가늠해 보려는 듯했다. 눈만 보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간다.
“그럼 너는 뭔데.”
내가 차갑게 되받아치자 아벨은 기가 막힌 얼굴로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짧은 한숨을 뱉으며 대꾸했다.
“딱 보면 몰라? 난 방금까지 운동 겸 훈련하다 온 거고, 너는 그냥 벤치에 늘어져 있었잖아.”
“나도 운동 중이었어.”
“무슨 운동?”
“숨 쉬기.”
“…….”
아벨은 입매를 한번 비틀더니 이내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짚은 손 군데군데에는 거즈나 반창고 따위가 붙어 있었다. 내가 눈길을 흘리자 그녀는 손을 등 뒤로 잽싸게 숨기며 멋쩍게 뺨을 긁었다.
내가 알던 철벽녀 속성 쿨데레랑 동일 인물인지 의문이 갈 정도로 상상한 이미지와 너무나 괴리가 심했다. 분명 스토리상에선 교과서적인 차갑고 도도한 인상이었는데, 눈앞의 소녀는 꽤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아벨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를 흘끗거리고는 눈치를 살폈다. 중간중간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열심이네.”
“뭐, 그치.”
아벨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사람들은 모를 거야. 니벨룽의 피를 이어받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항상 최고여야 하고, 완벽해야 하거든. 사소한 흠 하나라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너도 알겠지만 나, 올해 수석 아니잖아? 솔직히 태어나서 누군가한테 져 본 적 처음이야.”
아벨은 입술을 움츠리며 꽉 깨물었다. 곧이어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그거 알아? 한편으론 좀 개운하더라.”
아벨이 말을 잇는 동안 나는 굳이 말꼬리를 잡지 않았다.
“그래도 수석이 누구인지 궁금하긴 해, 누가 날 이겼는지. 그래야 다음에 만날 때 그 녀석을 뛰어넘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다음에는 꼭 조져 버릴 거야.”
“조질 것까지야…….”
“솔직히 자존심 상하잖아. 할아버지한테 졸라서 들었는데 수석 걔, 우리 클래스 애도 아니래. 게다가 수석 선서식도 넘겨 버리고. 차석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녀는 볼멘 목소리로 짧게 중얼거리다 이내 상념을 털듯 머리를 흔들었다.
“나도 참 주책이네, 처음 보는 애한테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고. 시험 결과가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봐.”
“나한테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거야?”
“응? 약해 보여서. 원래 우리 집은 ‘강자에게 엄하고, 약자에게 자비로워야 한다!’라는 게 가훈이거든. 그리고 우리 클래스 애들은 전부 밥맛이라 친구도 딱히 없어.”
‘주인공한테 쌀쌀맞은 이유가 이거였군.’
아벨은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타이즈에 묻은 먼지를 툴툴 털며 몸을 일으켰다.
“난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어, 잘 가.”
“넌 그래서 이름 언제 알려 줄 거야?”
“알려 주기 싫은데.”
“야!”
* * *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는데 참 신기한 남학생이었다.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대화에 어째서인지 많은 것을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재밌긴 했어.”
허심탄회하게 누군가와 속마음을 공유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밖에서는 니벨룽의 후손, 검제의 손녀라는 무거운 타이틀이 주는 압박.
동급생들과 함께하는 아카데미에서는 경외와 질투가 섞인 시선들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변덕으로 말을 걸어 본, 이름 모를 남학생은 오롯이 자신을 봐 주었다. 침묵도 대화라고 했던가.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진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남학생의 그런 태도는 솔직함을 끌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다소 성격이 무례하긴 했다. 아니, 오히려 재수 없었다. 심지어 끝까지 이름도 안 알려 줬다. 같은 클래스 남자애들은 말 한번 걸어 보려고 번호표까지 뽑을 정도인데.
“어쩐지 고백한 적도 없는데 차인 기분이네…….”
아벨은 쓴웃음 지으며 기숙사로 향하는 어슴푸레한 길을 걸어갔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경쾌했다.
* * *
날이 밝자마자 나는 도서관을 찾았다.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위명에 걸맞은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 피사의 사탑을 연상시키는 우뚝한 8층짜리 고층 건물이었다. 이 세계는 다른 건 몰라도 스케일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도서관 내부는 더 장관이었다. 중앙에 있는 원통형의 홀을 중심으로, 서적들이 둘러 싸맨 형태로 맨 위층까지 빼곡히 꽂혀 있었다.
나는 잠시 주말이라 한산한 도서관 안을 살핀 후,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이러니까 진짜 학생 같네.’
사실 살면서 책과 친하게 지내 본 적이 없었다. 중학교 졸업장만 받고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유였지만, 활자만 보면 멀미가 났기 때문이다.
붕 뜨는 마음을 뒤로하고 나는 가장 먼저 찾아봐야 할 것들을 되새겼다. 이 세계관에 대한 여러 가지 개론서들과 살아남기 위한 지식.
그중에서도 가호의 운용법과 앞으로 학기 중에 있을 실전 훈련에서 맞닥뜨리게 될 마수들의 목록을 우선하여 찾아봐야 한다.
전생에는 모든 마수 사냥을 자동 사냥에 맡겨 버려서 공격 패턴에 대한 지식도 전무하다. 막힐 때마다 그때그때 현금 박치기로 클리어하기도 했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의 모든 것들이 생소해,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꾸준히 몸을 단련하면서 일반적인 검술도 익힐 심산이었다. 몸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검신의 가호’ 사용은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다. 목숨이 촌각에 달할 때만 사용하는 걸로. 사실 그게 마음처럼 될지는 모르겠다.
‘아마 위급한 상황에서는 반사적으로 사시미부터 빼 들 것 같긴 해.’
그래도 어쩔 텐가. 뜻대로 이루어지는 건 없어도 최대한 노력은 해 봐야지.
나는 천천히 도서관 카테고리를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구석에 삐죽 튀어나온 한 책이 눈에 띄었다.
‘빗치 학원장의 은밀한 사생활♥’이라는 제목의 빨간 잡지.
손때가 얼마나 탔는지 표지색이 거의 바래 있었다. 어디를 가나 똑같단 생각에 실소를 흘리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운이 좋군.”
공부도 중요하지만, 혈기 왕성한 남자에게는 더 중요한 게 있는 법이다.